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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17화 (1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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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스승이 전쟁 영웅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도진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이리를 쳐다봤다. 이리는 무안한 듯 눈썹을 아래로 기울였다.

“전쟁은… 우두머리가 나서면 졸개들이 죽을 필요가 없어.”

“맞는 말이야.”

나비가 깔끔하게 인정했다.

이리의 활약으로 중간계에서는 서로 싸우지 못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쟁이 뜸해졌다. 중간계가 아니면 하계와 진현계의 존재들이 서로 마주칠 일이 없고, 마주침이 적으니 싸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얼마나 평화롭냐면 100년에 한 번 열리는 정기회의 때 찰마 공주가 직접 평화가 좋긴 좋더라, 나는 이제 전쟁이 싫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아무튼 손님들의 일탈일 수도 있고. 우려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려다가 보고하는 거야. 예전에 너한테 크게 혼난 적 있어서.”

“당연히 말해야 해. 작은 불씨가 언제 어떤 풍랑을 만나서 커질지 모르니까…. 그리고 네 요물이 극락왕생하길 바랄게.”

실제로 요물들이 죽는다고 극락에 가지는 않는다. 그냥 명복을 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나비 선인은 새침하게 끄덕이고는 파르페를 한입 퍼먹었다.

“인간계 음식도 괜찮네. 장미토, 이거 싸 가서 잔칫날 나눠 먹자.”

“몇 개 사 올까요?”

“열 개 포장해 와.”

“예에.”

장미토가 순순히 일어났다. 도진은 역시 권속이란 심부름꾼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이리가 심부름꾼을 붙잡았다.

“포장은 이따가 해. 지금은 역병 발생지에 같이 가 봐야 하니까.”

“거긴 왜? 나 거기서 한 시간이나 있다 왔어. 허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 확인했는데 대놓고 나를 못 믿네.”

나비는 툴툴거렸으나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리, 나 용마도 안 데리고 왔다구.”

“내 거 타.”

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비는 세상에서 가장 수수한 용마를 타게 생겼다고 칭얼거렸다. 도진은 나비의 치렁치렁한 장신구들을 보면서 나비 선인이 용마를 안 데리고 내려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렁이가 떼죽음을 당한 곳은 강원도였고, 꿀벌과 나비들이 죽은 곳은 남양주의 생태 공원이었다.

이리는 강원도에는 이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남양주에만 방문했다.

공원은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위아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어서 많은 위아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위아들 수십 마리가 모여 살면 그곳을 ‘위아 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이 공원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별 좋은 봄날이라 인간과 위아가 둘 다 많았다. 서로 팔짱 끼고 데이트하는 인간 커플 뒤에서 위아 커플도 서로 팔짱 끼고 데이트 중이었고, 아이와 놀러 나온 인간 가족들 옆에서 위아 가족도 어린 자식과 도리도리잼잼을 하며 놀고 있었다.

“위아들은 여기서 전염병이 돌았다는 소식을 모르나 봐요.”

도진이 속삭였다. 이리가 고개를 저었다.

“다들 알아. 위아는 몇몇 떠돌이 특성을 가진 것들을 제외하면 한번 마을을 구성하면 그 터를 잘 떠나지 않지. 그래서 역병의 창궐이 위험한 거야.”

“전염병이 떠돌면 이사를 가라고 좀 주입시키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요?”

“네가 왕이 되면 그런 규율을 만들어 줘. 아마 그 전까지는 말로 타일러 봤자 절대로 듣지 않을 거야.”

이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공원을 훑었다.

공원 내 위아들은 저들끼리 놀고 있다가 일행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선인님! 선인님이 두 분이다!”

“아까 왔던 나비 선인님이 이리 선인님을 데리고 오셨어!”

“대여점의 선인님이야!”

“이리 선인님이 오셨어!”

“이리 선인님 옆에 흉악한 인간이 있어!”

“마지막 누구야. 씨.”

도진이 버럭 하자 다들 히익, 놀라며 수풀과 조경수 뒤에 숨었다. 그러다가도 빼꼼 고개를 내밀며 호기심과 호감을 표했다. 이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나비도 한껏 턱을 치켜들었다.

다만 장미토가 조용히 도진에게 일렀다.

“갑자기 소리 지르면 사람들이 보잖아요. 권속이면 권속답게 조용히 합시다.”

“나 권속 아닌데. 제자예요.”

“아무튼간에 조용히 하자고요.”

공원의 위아들만 그들을 보는 게 아니었다. 인간들 또한 일행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도진도, 이리도 이목을 끄는 외모이기에 보통 둘이 외출하면 주술을 펼쳐서 관심을 흩트리지만 오늘은 관심을 좋아하는 나비 선인을 배려한다고 주술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웬 한복이냐, 저 사람들 연예인이냐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저 안경 쓴 남자는 매니저가 확실하다는 목소리도 들었지만 도진은 모처럼 넓은 마음으로 장미토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따라 걷던 나비가 멈춰 선 곳은 고즈넉한 작은 정자 앞이었다. 정자 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크고 잘생긴 사람 하나, 청초하고 맑은 사람 하나, 번쩍번쩍하고 화려한 사람 하나. 그리고 그들의 매니저일 게 분명한 흐릿한 인상의 사람을 보고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자리를 비켜 줬다. 암시를 건 것도 아니고 그냥 기세에 눌린 것이다.

“다들 이 근처에 살았어.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살펴봐 보든가.”

나비는 새초롬하게 말하고는 정자에 걸쳐 앉아 아까 장미토가 사 온 쿠키를 깨물어 먹었다.

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요물들이 떼죽음 당한 장소에서 너무 한가한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저게 싸패야…. 선인이야….”

천만다행으로, 나비는 제게 호감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인간들을 향해 웃어 주느라 도진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나비의 권속인 장미토는 들었다.

“꿀벌과 나비 같은 벌레 요물들은 길어야 30일 살고, 큰 죄를 짓지 않은 이상 반드시 윤회하므로 슬픔이 덜하신 겁니다. 이미 오전에 오셨을 때 애도도 마치셨으니 그런 말씀은 지양해 주십시오.”

유약한 인상의 남자가 안경을 들어 올리며 날카롭게 말하고는 나비의 곁에 가서 무릎 꿇고 앉았다.

도진은 와우, 감탄사를 내뱉고는 주변을 훑어보는 이리에게 속삭였다.

“역시 권속이라 충성심이 높네요. 누가 스승님 험담하면 저도 똑같이 반응하겠지만.”

“너는 똑같이 반응하진 않겠지…. 장미토처럼 점잖게 타이르겠어, 네가?”

“지금 저 토끼 새끼랑 저를 비교하는 거예요? 비교는 좋은 훈육 방법이 아니랬거든요? 그리고 점잖은 대응이 무조건 좋지는 않거든요? 착하게만 대하면 호구 잡히는 거라고요. 윽박지르고 성질을 내야 효과가 큰 법이에요. 저도 목 아파서 소리 지르기 싫은데 효과적인 교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질내는 거란 말입니다. 저 사실은 점잖은 사람이에요.”

“만약 나중에 누가 내 험담하면 점잖게 타일러 봐. 그럼 네 말을 믿을게.”

“진짜요? 혹시 칭찬도 해 주실 거예요?”

“뽀뽀 빼고.”

“치.”

도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리는 삐친 제자를 무시하고 화단을 뒤지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비. 저게 뭐야?”

“뭐. 뭐. 뭐 말하는데.”

오자마자 뭔가를 발견한 건가 싶어 나비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리가 가리킨 것은 다 부스러져 가는 낙엽이었다. 푸릇푸릇한 수풀 사이에 혼자 부스러져 가는 게 특별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3월 중순이란 점을 감안하면 별로 특이할 것도 없었다. 나비가 코웃음을 내걸었다.

“이리. 그건 바로 낙엽이란다. 3월 중순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체지. 정말 놀랍지?”

“고욤나무 잎사귀네요. 근처에는 안 보이는데.”

도진이 낙엽을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뭐어? 하고, 나비가 또 한 번 놀라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 공원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 분명 어딘가 있을걸!”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고욤나무를 찾았다. 그러나 이 공원 어디에도 고욤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위아들에게 물어 봤으나 원래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원 관리인 또한 그런 나무는 못 봤다고 대답했다.

일행은 다시 정자에 모였다.

“이거 고욤나무 맞아? 확실해?”

“맞아요. 자, 보세요.”

도진이 인터넷으로 고욤나무를 검색해서 나비에게 보여줬다. 다 부스러져 가는 낙엽과 고욤나무의 나뭇잎은 확실히 같은 모양이었다.

“희한하네.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인데 왜 여기에만 없지.”

“이 나뭇잎을 묻혀 온 곳에 직접 가 봐야겠어.”

“어떻게? 혹시 강원도를 말하는 거야?”

이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판단한 나비가 끄응, 신음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내 용마 데리고 올걸…. 내 용마가 얼마나 오색찬란한지 아니? 이리 네 용마는 너무 까맣기만 하고 멋이 없어. 날개도 안 달아 놔서 타고 다니는 재미가 없단 말이야.”

“이번엔 용마 안 탈 거야. 대여점을 너무 오래 비워 둘 수는 없어.”

“그럼 어쩌게? 네 제자만 보내게?”

듣고 있던 제자가 퍼뜩 놀랐다.

“스승님. 저는 스승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이 사람들이랑 갔다가는 빡쳐서 쌓은 덕만 다 잃고 돌아갈걸요. 강원도의 죄 없는 고욤나무 한 그루가 뽑혀져 나가도 좋으면 저 혼자 보내세요.”

“걱정하지 마. ‘통로’로 다 같이 갈 테니까.”

“통로…!”

나비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장미토와 도진은 통로라는 게 무엇인지 몰라 의아한 얼굴이었다. 나비는 무척 놀라는 한편 믿기지 않는 투로 물었다.

“목적지가 강원도가 아니구나. 정말로 이 나뭇잎의 출처에 가려는 거였어. 그런데 가 본 적 없는 곳도… 통로를 만들 수 있단 말이야?”

“응.”

이리가 팔을 앞으로 뻗었다. 무언가 도술을 펼치는 동안 장미토가 조심스레 물었다.

“통로라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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