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리고… 나는 아프다.”
“그래. 머리가 아파 보이긴 한다.”
“도진아.”
“알았어요. 닥칠게요.”
이리는 상냥하게 물었다.
“어디가 다쳤어? 아니면 병에 걸렸어?”
“요즘 들어… 머리도 아프고 삭신이 쑤시고……. 체력도 전보다 떨어진 느낌이고…….”
“그래.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하지.”
“도진아…….”
이리는 조용히 있으라는 뜻에서 테이블 밑으로 도진의 허벅지를 살짝 만졌다. 도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언제 입을 열었나 싶을 정도로 꿀 먹은 듯 조용해졌다.
이리는 도진을 아주 확실하게 입 다물게 하고 싶을 때는 이렇게 허벅지를 짚고는 했다. 허벅지를 만지면 도진은 손이나 팔, 어깨를 짚을 때보다 더 꽁꽁 그리고 더 오래 얼어붙었다.
“그렇다. 나는 나이 들었다. 내 수명은 앞으로 몇 시간 남지 않았노라……. 그래서 석쇠 모래시계와 금물 금붕어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살고 싶다. 적어도… 몇 달만이라도.”
석쇠 모래시계와 금물 금붕어는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자그마한 모래시계와 금붕어 조각상으로, 둘 다 소유자를 나이 들지 않게 하는 이능을 지녔다.
석쇠 모래시계는 위쪽의 모래가 아래쪽에 전부 떨어지기 전까지 소유자가 나이 들지 않게 한다. 모래가 전부 떨어지기 전 뒤집고, 뒤집고, 계속 뒤집으면 영원히 불로(不老)하는 것이다. 금물 금붕어는 조각상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 노화가 역으로 작용하게 한다. 바라보는 시간만큼 더 젊어진다는 뜻이었다.
이 두 이물로 인해 수명이 다한 위아의 혼을 거두지 못하는 일이 몇 번 발생하자 염라대왕이 이리에게 직접 부탁했다. 수명 관련한 이물은 좀 신중하게 팔아 주지 않겠느냐고. 이리의 배분이 염라대왕보다 높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당장 쳐들어와서 물건들을 깨부쉈을 것이 분명했다.
“내게 빌려준다면 내 모든 덕을 선인께 드리겠소.”
이리의 표정을 살피던 복배바리가 결심한 듯 말하자 도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몇 달 더 살겠다고 180년 간 모은 덕을 포기하겠다고? 미친 거 아냐?”
180년 어치의 덕이면 다음 윤회 때 장소와 시기, 성별, 갖추고 태어나는 재능까지 전부 결정할 수 있는 양이다. 그 값진 걸 고작 몇 달 더 살겠다고 포기한다니까 도리어 수상해 보였다.
이리는 가만히 복배바리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어. 빌려줄게.”
“네? 스승님? 빌려주신다고요?”
도진이 깜짝 놀랐다. 복배바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둘 다 빌려주는 거냐?”
“응. 둘 다 빌려줄게. 도진아, 가져와.”
“스승님, 진짜요? 진짜 가져와요?”
“내가 가서 가져올까?”
“아, 아뇨. 제가 갈게요.”
도진은 어벙벙한 얼굴로 일단 일어났다.
제자에게 이해하지 못할 심부름을 시킨 이리가 가만히 복배바리의 눈을 들여다봤다.
복배바리는 지금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지만, ‘더 살고 싶다’라는 말을 할 때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복배바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리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고맙소!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그런데 정말 덕을 그만큼만 가져가도 괜찮겠소?”
“이 정도면 충분해. 조심히 들어가.”
“알겠소. 정말 고맙소!”
원하는 것을 얻은 복배바리가 새벽 달빛 아래에서 희희낙락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이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저런 아이들이 간혹가다 있지.”
“거짓말하는 새끼들이요?”
“저승의 명부를 속이려는 아이들.”
“아아….”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이나 위아나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도진이 돌연 심각해졌다.
“스승님, 혹시 이 일로 저승사자들이랑 반목하게 되는 건 아니겠죠? 정해진 수명을 거스르는 일은 금기시되는 일이잖아요. 우리 안 그래도 저승이랑 사이 껄끄러운데…….”
“금기는 맞지만 인간들의 속설처럼 들켰다고 천벌이 내리거나 하진 않아. 수명을 늘리고 저승사자를 속이는 일은 예로부터 수없이 있어 왔어. 너도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아?”
“세 가지 알고 있긴 하죠. 왜 봐주는 거래요? 저승은 좀 딱딱하고 삭막한 곳이 아니었나.”
“한번 잡기 시작하면 끝이 없거든. 굿을 하고, 부적을 짓고, 풍수지리에 맞춰 인테리어를 꾸미고. 이런 것들이 다 야금야금 수명을 늘려 주는 일인데, 그런 사소한 행위들을 전부 잡으라고 하면 저승사자들은 다들 과로로 쓰러질 거야.”
“하긴 그렇겠네요.”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사자는 전부 인간 혼령인데, 죽어서까지 일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지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았다.
“결국 저승의 명부를 속이는 건 무단횡단 같은 거군요. 불법이지만 다들 그냥 저지르고 사는. 편도 1차선 도로 무단횡단 정도?”
“으음. 그중에서도 노량이 하려는 일은 왕복 6차선 무단횡단에 가깝지.”
도진이 치를 떨었다. 왕복 6차선 무단횡단이라니…….
“그 정도면 자기도 죽여 달란 거 아닌가요? 저승사자들도 개빡치겠는데.”
“맞는 말이야. 아무래도 감시를 해야겠어.”
도진이 눈을 빛냈다.
“지금 바로 뒤쫓을까요?”
“응. 얼른 가.”
“넵.”
도진이 바로 복배바리의 뒤를 따르려다가 이리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설마… 저 혼자 감시하라는 뜻이에요?”
“나는 좀 자야겠어. 너는 며칠 잠 안 자도 튼튼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노량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였어?”
도진이 미간을 좁혔다.
“되게 짧다는 건 느껴졌어요.”
“앞으로 25시간 남았어.”
생각보다 더 짧은 시간에 도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25시간 동안 노량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면서 네가 판단했을 때 저 이물들을 허튼 일에 사용하려고 하면 못하게 막아.”
“제가 판단했을 때 허튼 일이 아니면요?”
“그럼 협조해야지.”
도진은 커다란 몸을 구부리며 겁먹은 흉내를 냈다.
“제가 허튼 일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하죠? ‘씨발’, ‘뒤진다’를 입에 달고 사는 무시무시하고 부리부리한 제가 어떻게? 스승님은 정말 제 도덕적 기준을 믿으세요? 저도 절 못 믿겠는데? 오히려 제가 무단횡단을 해 버릴지도 모르는데?”
“나는 네 판단을 믿어.”
도진은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만약 제가 그릇된 판단을 해서 스승님을 곤란하게 만들면 어떡해요? 저 혼자 엿 되는 건 상관없는데 스승님까지 엿 되면…. 금지 이물 실수로 대여해 줬다가 큰일 났다고 막 평판 깎이고, 염라대왕도 임금님께 꼰지르고 이러면요?”
이리가 덩치만 커다랗지 아직도 애 같은 제자를 다정하게 바라봤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일어나도 상관없어. 염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금지 이물을 빌려주는 것 정도로 임금님이 날 문책하지는 못한단다. 이 일 때문에 저승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제야 좀 불려 가서 한 소리 듣고 나오겠지만.”
“……진짜죠?”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
선인은 거짓말을 못하므로, 도진은 이리의 말에 안심했다.
사실 그는 이리와 떨어지는 건 싫었지만 이런 믿음이 필요한 일을 맡는 날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신묘한 작업을 하는 이리의 옆에서 이리가 시키는 걸 그때그때 처리하는 보조 역할이 아니라 정말 어엿한 한 명의 직원으로서 홀로서고 싶었다.
“맡겨 두세요. 철저히 감시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게요. 들어가서 주무세요!”
원래의 자신감 넘치는 제자로 돌아온 도진이 노량이 멀어지기 전에 얼른 달려갔다.
이리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25시간. 복배바리와 도진에게 긴 시간이 될 터였다. 이 일이 도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지만 이리는 제자에게 말한 대로 그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 * *
도진은 노량의 그림자 안에 숨었다. 둔갑술은 서툴지만 은신술은 무척 잘하기 때문에 복배바리 같은 작은 요괴는 쉽게 속아 넘어갔다.
노량이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서울에 있는 아파트였다. 여기까지는 도진도 놀라지 않았다. 복배바리란 본래 인간의 집에 터를 짓고 사는 요괴이므로. 도진이 현재 거주 중인 대단지 아파트에도 집주인인 인간들이 산책하면 그 뒤를 뒤뚱뒤뚱 따라 다니는 복배바리가 최소 열 마리가 넘었다.
노량의 그림자에 숨어서 침입한 집은 적당한 평수의 깔끔한 집이었다. 노량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다다다 안방에 달려갔다. 안방에는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명이 자고 있었다. 몸이 아픈지 침대맡에 약 봉투가 보였다.
“지숙아. 또 이불을 내팽개치고 잔다.”
노량은 석쇠 모래시계와 금물 금붕어를 협탁에 올려 두고는 아주머니 명치까지 내려가 있는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듯 노래를 부르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 노래 가사는 이러했다.
“지숙이는 이제 살았다. 지숙이는 오래 살 거다. 오래오래 살아서 손주가 손주 낳고 그 손주가 손주 낳는 것도 볼 거다. 지숙이는 이제 좋겠다. 지숙이는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면 된다. 지숙이는 늦잠 자고 여행도 간다. 지숙이는 좋겠다.”
티슈로 식탁에 흘린 물을 닦고, 바닥에 떨어진 방석을 탁탁 털어서 소파에 올려 두고, 켜져 있는 화장실 불을 끄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