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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는 통영에서 오래 살았지만 배리모스라는 이름의 악신은 처음 들었다. 구렁이는 그 악신이 외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최근 통영에 정착한 악신이라고 덧붙였다.
철수는 그 악신을 제령하는 일을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자처했다.
“영물인 저와 도깨비인 당신이 힘을 합친다면 악신을 무찌를 수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철수는 도깨비 마을로 돌아가 촌장 해소에게 이 일을 전했다. 그러나 해소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철수의 청을 불허했다.
첫째, 구렁이가 영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해쳤으니, 큰 죄가 아니므로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둘째, 악신이 인간 마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도깨비들이 흡수할 음기도 많아진다.
셋째, 악신은 도깨비보다 윗 갈래에 있는 강한 존재로 완전히 무찌르지 못하면 마을로 보복하러 올 것이다.
철수가 들으니 해소의 말이 전부 맞았다.
남편 구렁이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남편 구렁이는 침통하게 읊조렸다.
“어쩔 수 없지요. 저 혼자라도 애써 보겠습니다.”
“정말 미안타. 이를 우짜면 좋누. 니도 괜히 악신한티 덤비지 말고 피해 있으라.”
“눈앞에서 일어나는 악행을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정녕 미안하시다면 그것을 빌려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거?”
“도깨비방망이가 있다면 제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 알았다. 빌려주겠다.”
도깨비방망이는 도깨비의 힘의 원천으로, 가진 모든 재산을 내어 주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미안했던 철수는 남편 구렁이에게 자신의 도깨비방망이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도깨비님. 오늘 밤 악신을 무찌르고 이튿날 아침 이곳에서 돌려 드리겠습니다.”
“몸조심해라.”
“예, 도깨비님도요.”
철수는 이튿날 그 자리에서 기다렸지만 남편 구렁이는 해가 지도록 오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 날도.
아기 새들이 모두 활기차게 날갯짓하며 둥지를 떠날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철수는 통영 일대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잔챙이 위아들에게 남편 구렁이의 인상착의를 알려주고, 악신과 구렁이의 싸움 결과를 알아 달라고 시켰다. 곧 잔챙이 위아들이 한 편지를 가지고 왔다.
멍청한 도깨비야. 악신 같은 건 없다. 도깨비방망이는 내가 갖겠다
철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남편 구렁이가 도깨비방망이를 빼앗기 위해 자신을 속인 것이다. 아내를 잃은 직후 그런 꾀를 부리다니 어떻게 영물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억울하게 도깨비방망이를 오래도록 잃은 철수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철수의 사정을 들은 해소는 바로 마을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도깨비 마을은 외부에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반면 소속 주민들끼리는 결속력과 단합력이 뛰어났다. 철수의 원통한 일에 모든 도깨비가 자기 일처럼 분노했다.
해소는 철수를 등에 업고 동료 도깨비들과 함께 남편 구렁이를 추적했다. 남편 구렁이는 인간으로 둔갑해서 인간 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도깨비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괴물이야!”
“사기꾼 놈아! 도깨비방망이를 내놓거라!”
“으아악!”
해소의 불호령에 남편 구렁이는 경기를 일으키더니 눈물까지 흘렸다. 도깨비방망이를 내놓는다든가 구렁이로 변해 도망간다거나 공격한다거나 아무 수도 쓰지 않고 경기를 일으키며 울기만 했다.
해소는 철수에게 저것이 네가 만난 영물 구렁이가 맞냐고 몇 번을 확인했다. 냄새도 기운도 생김새도 아주 똑같아서 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이 왜 처음 본 사람처럼, 도깨비를 처음 보는 인간처럼 놀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놈이 또 꾀를 부리는 모양이구나. 도깨비방망이는 어디에 있느냐?”
“으아악! 살려주세요! 괴물이야!”
“시끄러운 겁쟁이로군. 그 둔갑이나 풀거라!”
“컥!”
해소는 인간으로 둔갑한 구렁이의 입에 자신의 도깨비방망이를 쑤셔 넣었다. 입이 찢어지면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빨이 모래처럼 부서지고 턱관절과 뼈가 우두둑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걱꺼억.”
컥, 그억.
인간으로 둔갑한 구렁이는 입에 두꺼운 도깨비방망이가 박힌 채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방망이를 더듬거렸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구렁이가 방망이를 뽑아내려고 하자 해소는 손을 잡고 우두둑 꺾었다. 다른 두 도깨비가 양발을 잡아 비틀었다. 빠드득, 소리가 나며 눈과 코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언제든 구렁이화 할까 봐 경계하고 있었는데 붉은 피만 계속 흘러나와 도깨비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철수는 안방의 침대 밑에서 자신의 도깨비방망이를 찾아냈다. 그런데 그 옆에 종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철수는 종이 위의 글씨를 눈으로 읽어 내렸다.
도깨비방망이는 아주 요긴하게 썼다. 나는 악신 배리모스. 인간의 몸은 잠시 빌린 것이다. 멍청한 도깨비야
* * *
“그 후로 마을로 돌아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역병이 퍼졌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녀온 자들은 다 걸렸고, 그들이 마을에 남았던 이들에게 병을 퍼뜨렸지요. 그중에서도 몸이 약해져 있던 철수는 심하게 퍼져서 지금은 몸뚱이만 남아 겨우 숨 쉬고 있습니다…….”
“…….”
자초지종을 들은 이리는 길게 탄식했다.
도깨비들은 희생된 인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전혀 반항하지도 않고, 기이한 것을 보고 기겁하기만 하는 반응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잘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깨비를 탓하기 전에 먼저 악신에게 죄를 묻는 게 옳았다. 약사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어디서부터가 악신의 설계였을까요?”
“철수가 머무는 나무에 새가 둥지를 틀었을 때부터일 거야. 어떤 도깨비가 특정 나무 위에서 인간 구경을 즐긴다는 걸 오랫동안 지켜봐 온 악신이 도깨비방망이를 빼앗기 위해 간계를 쓴 거지.”
“배리모스라는 악신이 역병을 뿌렸나 봐요. 저는 그런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정말로 외국에서 건너온 녀석일까요.”
“나도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
이리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꾹 눌렀다. 도깨비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가 있으니 외부에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저들끼리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까지 악신의 계책일 터였다.
그동안 핸드폰으로 최근 통영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검색하던 도진이 이리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일주일 전에 남자 하나가 자기 집에서 기괴한 모습으로 죽은 채 발견되었대요. 근데 엄청 흉악범이래요. 전과 12범에 3개월 전 출소하고 나서도 동네에서 자잘한 시비를 일으키던 놈이었다고. 이런 놈이면 잘 죽었는데요? 오히려 도깨비들 칭찬해 주죠.”
“그런 자여야 악신이 빙의를 하니까….”
“아하…….”
3개월 전 출소해 하필 이 지역으로 온 것 또한 악신의 계획인 듯했다.
“배리모스라는 개자식 찾으러 갈 거죠? 저 제령술 배운 거 좀 써먹어야지 이러다 까먹겠어요.”
“우선 여기 일부터 해결하고.”
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었다. 해소를 비롯한 도깨비들은 이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움찔움찔하며 눈치를 봤다.
“아직 죽은 도깨비가 없어서 천만다행이구나.”
이리의 손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더니 광장의 도깨비들, 운신 중인 도깨비들에게 스며들었다. 도깨비들은 ‘따뜻하다’라는 느낌 말고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이제 약사가 지은 약을 먹으면 썩은 부위가 돌아올 거야. 이미 흩어져 덜어진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도깨비들은 회복력이 빠르니 금방 회복하겠지.”
“예…?”
도깨비들이 어리둥절하게 제 몸을 훑었다. 과연 이리의 말대로 이제는 움직여도 파스스 흩어지지 않았다. 촌장이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했는데도 피부가 잘 붙어 있었다.
약사가 앉은 자리에서 보따리를 꺼내 펼치더니 손뼉을 짝짝 쳤다.
“자, 지금부터 약 배분한다. 다들 내 앞으로 일렬종대!”
“야, 약이라 했소?”
“그래. 썩은 부위 안 나아도 되면 먹지 말든가.”
“가, 가겠소.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은?”
“친구들, 가족들 몫은 너희가 받아 가야지.”
“알겠소….”
도깨비들이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가장 앞에 있던 도깨비가 약을 복용하자 바로 효과가 있었다. 여기저기 반점처럼 까맸던 부위가 점점 줄더니 건강한 피부로 돌아왔다. 도깨비들이 우와아아 환호하며 너도나도 약을 먹었다.
도진은 이리가 신묘한 도술을 부렸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왜 갑자기 듣지 않던 약이 드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스승님,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지금 약사 신령님이 나눠 주는 약은 신약이 아니라 ‘삭신’ 약 아니에요? 저게 갑자기 왜 효과가 있어요?”
“저건 삭신 약이 아니라 그냥 피부가 썩었을 때 먹는 약이야. 악신은 도깨비들에게 역병을 뿌리지 않았어.”
“네? 그럼……. 하지만 위아 역병은 자연 발생하지 않잖아요.”
“아예 병이 아니었어.”
이리는 확실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도진보고 스스로 궁리해서 알아차리라는 뜻이었다.
스승의 의도를 읽고 곰곰이 생각하던 도진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저주’였던 거군요! 스승님은 도깨비 마을에 걸린 저주를 파훼하신 거고요.”
“맞아.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설계된 저주야. 도깨비가 어떤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그 행동을 하는 순간 발동되는….”
“그 행동이란 게 살인이었던 거죠.”
이리는 글쎄, 하고 확답하지 않았다.
나비 선인의 꿀벌과 나비들, 그 이전의 지렁이들 또한 살인을 저질러서 저주에 당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도진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배리모스라는 악신 새끼가 저주를 뿌리고 돌아다니고 있나 본데 당장 붙잡아서 족쳐 버려요!”
“문제는 위아는 저주를 뿌리지 못한다는 거야.”
“…네?”
“그래서 지금까지 다들 역병이라고만 생각했지 저주라고는 추측하지 못했어. 저주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 수 있으니까…. 나조차도 저주를 파훼하는 것만 가능하지 만들어 내지는 못한단다.”
“…….”
도진이 입을 벌렸다. 이리는 광장 중앙의 수호나무에 기댔다.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는 나무가 이리 선인의 정순한 기운을 반가이 받아들였다.
어떤 인간이 삭신과 비슷한 저주를 만들어서 뿌리고 있다….
위아들에게 당분간 인간을 조심하라고 일러두어야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