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가족의 날이라 오후 두 시에 학교를 마쳤다. 선생님은 남아서 자율 학습할 사람은 하라고 말했지만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일어났다.
“야, 유재호! 피시방 갈 거지?”
재호 또한 일어나서 가방을 싸는데,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너네 피시방 그제도 가고 어제도 가지 않았냐? 고3이 무슨 스카보다 피시방을 더 자주 가냐.”
“그래서 안 갈 거야?”
“오늘은 못 가. 내일 쪽지 시험도 있고. 오늘 집에 아무도 없어서 내가 리리 밥 챙겨 줘야 돼.”
“새끼, 고3 됐다고 공부 열심히 하네. 리리는 또 뭐야?”
“재호가 키우는 고양이. 개귀여워.”
“씨발, 그러면 밥 챙겨 줘야지.”
“밥 주고 피시방 오면 되잖아. 존나 핑계 대네.”
대부분은 납득하는 분위기였으나 한 명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병호는 요즘 들어 놀아 주지 않는 재호에게 섭섭한 듯 보였다.
“앞으로 유재호한테 물어보지 마. 이 새끼가 며칠을 연속으로 차는 거야.”
재호는 삐친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내일은 가 줄게. 약속함.”
“시끄러워. 꺼져”
“알았어. 그럼 내일도 안 간다.”
“아, 왜! 방금 간다고 약속했잖아!”
바로 말을 바꾸는 병호를 다른 친구가 단기 기억상실증이냐며 놀렸다. 친구들이 와하하 웃었다.
“얼른 안 가면 자리 없어. 존나 뛰자. 간다. 내일 봐.”
“어.”
친구들이 몰려들었을 때처럼 또 우르르 몰려 나갔다. 재호는 가방을 마저 챙기고 교실을 나갔다.
집은 학교에서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했다. 단독주택 대문을 열기 전부터 냐앙, 냐앙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다.
“빨간 놈 또 왔구나.”
재호가 피식 웃으며 열쇠를 돌렸다. 대문을 열자 역시나, 좁은 마당에서 노란 고양이랑 빨간 고양이가 서로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노란 고양이는 재호가 키우는 코숏 리리, 빨간 고양이는 동네 길고양이였다.
특이하게도 털이 새빨개서 재호네 가족이 빨간 놈이라고 부르는 이 길고양이는 몇 달 전에 처음 나타났다. 목걸이를 찬 걸 보면 유기묘인데, 성격이 순하고 애교도 많았다. 리리랑 처음부터 서로 좋아 죽는 모습을 봤을 땐 신기했는데, 지금은 그냥 얼굴 보면 “또 왔냐” 하고 말았다.
“대체 무슨 종일까.”
처음엔 못된 인간이 염색시킨 줄 알았으나 본래 털색 자체가 붉은색이었다.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고 종을 물어봐도 답변은 없었다. 대신 어느 동네냐는 질문만 쏟아졌다. 재호는 잡종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리는 또 어떻게 나온 거야. 네가 또 창문 열어 줬어? 그러다 리리 집 나가서 미아 되면 어떡하려고. 차라리 집 안에 들어가서 놀든가.”
냐앙.
애앵.
나란히 배를 까뒤집고 누워서 고개만 들고 작게 우는 고양이들의 모습에 재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반응해 줘서 고맙다. 들어와. 밥 줄게.”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양이들이 벌떡 일어나 졸졸졸 따라왔다.
재호가 사료 그릇을 내려놓자 리리가 아구아구 고개를 박고 먹었다. 빨간 놈은 재호의 손등에 얼굴을 한번 부비적 하고는 먹기 시작했다. 항상 이렇게 나름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똑똑한 놈이었다.
“너네는 좋겠다. 공부 안 해도 돼서.”
재호가 작고 동그랗고 보드라운 고양이들을 쓰다듬으며 신세를 한탄했다.
고3이 되고 맨날 시험이다, 학원도 안 다니고 과외도 안 받으면서 진도 따라가기 벅차다, 어제는 코피도 났다, 이 짓을 8개월 간 해야 하는데 어떡하냐…. 재호의 한탄은 멈출 줄 몰랐다.
“내일 쪽지 시험은 심지어 내신에 들어가는 시험이란 말이야. 진짜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지 미치겠어. 너네처럼 때 되면 밥 먹고 때 되면 자고 때 되면 밥 먹는 삶 살고 싶다.”
애앵.
빨간 놈이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노란 고양이 눈이 재호를 쳐다보는데 그 표정이 꼭 ‘왜 밥 먹는데 시비야.’처럼 보였다. 재호는 내가 뭐하고 있나 싶어졌다.
“간식은 쉽게 안 줄 거야. 요즘 시대는 고양이도 똑똑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야. 알았어?”
재호는 고양이용품 두 개를 꺼냈다. 고양이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는 기능성 장난감으로, 퍼즐처럼 생긴 장난감 안에 간식을 넣어 두면 고양이가 머리를 써서 꺼내 먹어야 했다.
싸우지 않도록 두 개에 각각 간식을 넣어서 줬다. 리리는 늘 그렇듯 코만 킁킁거릴 뿐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반면 빨간 놈이 이 장난감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마치 수십 번 해 본 것처럼 솜방망이로 투둑, 툭 하며 금세 간식을 빼먹었다.
“와. 뭐냐. 너 똑똑하네.”
앵.
“우리 바보지만 착한 리리한테 방법 좀 알려줘. 혼자 하지 말고.”
애앵.
빨간 놈이 앞발을 핥으며 대충 대꾸했다.
“리리, 너도 옆에서 친구가 하는 거 보면서 좀 배워. 앞발만 핥지 말고.”
냐앙.
으이고. 재호는 아직 간식을 먹지 못한 리리에게 응원의 의미로 머리를 마구마구 쓰다듬어 주고 방에 들어왔다.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고, 재호는 슬슬 출출해졌다. 평소라면 엄마랑 아빠가 중간에 간식을 줬겠지만 오늘은 두 분 다 출장이었다. 재호는 라면이나 끓여 먹자는 생각으로 방을 나왔다.
냐아앙.
애앵. 엥.
냥?
앵앵!
거실에 빨간 고양이가 아직도 있었다. 아까의 간식 장난감 앞에 앉아 있었는데, 꼭 빨간 놈이 리리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재호는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핸드폰을 꺼내며 숨었다.
냐아. 냥냥? 냥.
애이앵….
빨간 놈이 한숨을 푹 쉬더니 목을 움츠리고는 꾸쉬꾸쉬 앞발로 머리를 비볐다. 뭘 하는 건가 가만히 보고 있으니 툭, 하고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건 고양이 목걸이였다. 길이 조절 스트랩이 달린 흔한 가죽 목걸이.
빨간 놈이 목걸이를 입으로 물어서 리리의 목에 채웠다. 아니, 저게 가능해? 재호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고양이가 자기 목걸이를 푼 것도 신기한데 다른 고양이한테 채운 건 더 신기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냐앙. 냥!
리리가 갑자기 빠릿빠릿하게 앞발을 움직여서 장난감 퍼즐에서 간식을 척척척 빼냈다.
착하지만 바보인 리리가!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애앵!
재호가 보고 있는 줄 몰랐는지 빨간 놈이 펄쩍 뛰었다. 빨간 놈은 벌떡 일어나 이족보행하더니 리리에게서 목걸이를 벗겨 내려고 했다. 그러나 재호가 더 빨랐다.
“목걸이에 뭐가 있어?”
간단히 목걸이를 벗겨낸 재호가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구경했다. 평범한 목걸이였다. 애앵, 앵, 앵. 빨간 놈이 당황하며 재호의 곁을 맴돌았다.
재호는 혹시나 싶어서 새로 간식을 꺼내 장난감 퍼즐 안에 넣고 다시 리리에게 시켰다. 그러나 리리는 킁킁 냄새를 맡고 솜방망이질만 몇 번 할 뿐 방금처럼 척척 해내지 못했다.
애앵, 애앵. 빨간 놈이 급기야 재호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손아귀에서 목걸이를 가져가려고 했다. 재호는 빨간 놈을 떨어뜨리고 얼른 제 방으로 돌아왔다. 벅벅 문 긁는 소리가 들렸다.
“와씨…. 이거 뭐야. 무슨 일이야….”
설마 이거 차면 갑자기 똑똑해져?
아니겠지?
설마….
재호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스트랩을 제 손목에 가져갔다.
* * *
“우우우. 우우. 우우우.”
“그래. 몽두에 최근 유행하는 푸른색 염색을 하고 싶다는 거지?”
“우우.”
“근데 네 몽두는 이미 너덜너덜해. 이 천을 봐. 너무 헤져서 염색약을 견디지 못할 거야. 아예 몽두를 새로 만드는 게 낫겠어.”
“우우우….”
“마지막으로 교체한 게 언젠데?”
“우우.”
머리 전체에 천을 뒤집어쓴 커다란 위아가 기억을 더듬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도진은 이리가 어떻게 저 ‘우우’를 다 알아듣는지 신기했다. 예전에 인간 말을 하지 못하는 위아와 어떻게 대화를 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 이리는 느낌으로 알아듣는다고 했다.
도진이 그 경지가 되려면 한참은 멀었다.
“우우우.”
“39년 전이구나.”
“네? 39년 전이면 얼마 안 됐는데요. 그때 존나 싸구려 천으로 만들었나 봐요.”
“우우.”
“어머니의 유품이었대.”
“…….”
도진은 괜히 끼어들었다 싶어서 몽두요에게 꾸벅, 사과하고는 상담실을 나갔다.
다음 예약 고객에게 줄 이물을 점검하고, 여러 가지 작업을 하는 사이 상담이 끝난 몽두요가 팔랑거리며 나왔다. 몽두요의 몸체는 팔다리가 없고 천만 늘어뜨려져 나풀거린다. 동그란 얼굴에 천만 뒤집어쓰고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눈사람 얼굴을 한 서양식 유령 고스트 같기도 했다.
“우우우.”
“그래. 내일모레 와. 안녕.”
“우우.”
몽두요가 나가고 도진이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새빨간 색으로 염색하기로 했어.”
“아, 몽두 새로 안 사고요?”
“응. 유품이라서 계속 유지하고 싶은가 봐.”
이리는 메모지에 물품을 적었다.
필요한 이물은 ‘도채리약’, 필요한 재료는 생수, 적색구인 껍질, 불고양이 털….
“적색구인 서식지는 아는데 불고양이는 어디서 살아요?”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살아. 어차피 이제 곧 이물을 반납할 때가 돼서…. 아.”
이리가 문득 말을 멈췄다. 도진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런데 이리 또한 의아한 표정을 하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밖에 뭐 있어요?
“도진아. 대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는 고객이 있거든. 가서 데리고 와. 만약 도망가면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와야 해.”
“…예!”
도진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강림도령과의 주술 대결을 앞두었을 때와 준하는 마음가짐으로 기세등등하게 나갔다.
대체 밖에 누가 있느냐. 도둑놈이냐!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빨간 것이 움찔했다.
애… 애앵.
빨간 털의 고양이가 놀란 눈을 깜빡거리며 어색하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