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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불고양이? 여기서 뭐해요? 안 들어오고.”
애앵….
“저는 그쪽 말 못 알아듣습니다. 얼른 들어오기나 하세요. 이리 선인이 기다려요. 이물은 가지고 왔죠?”
…….
불고양이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앵!
불덩어리로 변해서 갑자기 골목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이래서 스승님이 도망가면 잡아 오라고 하셨구나!
도진이 두 발을 박차고 불고양이를 따라갔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골목을 빠른 속도로 굴러 내려가고, 그보다 빠른 속도로 장사가 달려갔다.
축구공만한 새빨간 불이 데굴데굴 구르는데도 무시하고 골목을 지나가던 인간들은, 체격이 커다랗고 무섭도록 잘생긴 남자가 쿵쿵거리며 빠르게 달려오는 걸 보고서야 기겁하며 양옆에 비켜섰다.
도진은 다행히 큰 길가에 들어서기 전 골목 끝자락에서 불고양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야, 이. 씨발. 아, 나 진짜.”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뭐라고 말을 하면 미친놈이 될 터라 말을 잇지 못하는 도진의 품에서 불덩어리가 날뛰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지만 도진에게는 조금 따뜻할 뿐이었다. 도진은 불고양이를 품에 꼭 낀 채 대여점으로 돌아왔다. 이리가 대문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애앵….
다시 고양이 형태로 돌아온 불고양이가 힘없이 울었다. 도진은 이 축 처지고 힘없는 모습이 익숙해서 ‘어디서 봤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잠시 후, 이리에게 꾸중을 듣는 불고양이를 보며 ‘아. 나 혼날 짓 했을 때랑 똑같구나’ 하고 깨달았다.
* * *
도진과 이리는 신고 고등학교 앞 골목에 차를 주차하고 아직 하교가 시작되지 않은 정문을 바라봤다.
“그래서. 지금 이물을 가진 사람이 저 학교에 있다는 거지?”
애앵….
불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영 기운이 없어 보였다. 꾸지람을 들은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불고양이에게서 들은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불고양이는 몇 개월 전 한 고양이에게 반해서 구애 중이었다. 자태는 아름다우나 뇌가 청순하여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고양이는 그 고양이, 리리가 좋았다.
평화롭게 애정을 키워 가던 어느 날, 리리의 주인이 퍼즐 장난감을 사 오면서 평화가 깨졌다. 퍼즐 장난감이 너무 어려워 간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리리는 불고양이에게 짜증을 내거나 스트레스를 풀 때가 많아졌다. 불고양이가 방법을 수도 없이 알려줬지만 리리는 기억력조차 청순했다.
결국 불고양이는 대여점에서 이물을 빌리기로 했다.
사해 목걸이.
눈앞에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이물로, 불고양이는 이 목걸이를 리리에게 채워서 편안히 간식을 쟁취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리리가 집고양이라고 했지? 인간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애앵!’
몇 번이나 당부하는 이리 선인에게 걱정 말라고 큰소리친 게 바로 한 달 전이었다.
한동안 평화로웠다. 불고양이는 인간이 보지 않을 때만 잽싸게 리리에게 목걸이를 채워서 간식을 쟁취하게 했다. 간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리리에게서 그루밍도 받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 리리의 주인 되는 인간이 웬일로 불고양이에게도 퍼즐 장난감을 줬다. 이집 간식은 꽤나 맛있어서 식탐을 참지 못한 불고양이는 간식을 능숙하게 빼먹어 버렸다. 인간은 불고양이와 리리를 비교하고서는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
비교당한 리리는 당연히 짜증을 냈고, 이러다가 이별 선언까지 들을 판이라 불고양이는 어쩔 수 없이 목걸이를 채워 줬다.
그 광경을 인간이 보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애앵….
“당일에 바로 달려왔어야지. 이미 한 주나 지난 다음에 오면 어쩌자는 거냐? 그러고도 네가 요괴야?”
앵. 앵앵.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 난 못 알아듣거든. 한국에서 살면 한국어 좀 해라.”
애앵!
고양이로 둔갑한 불고양이가 팽, 하고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이 녀석이 뭐래요?”
“요괴 말도 못 알아들으면서 그러고도 도사냐고 하네.”
“야, 넌 내가 도사 아닌 것도 못 알아보냐. 그러고도 요괴냐?”
불고양이가 유치한 시비를 거는 도진의 무릎에서 이리의 무릎으로 건너갔다. 실컷 꾸지람을 들었긴 하지만 여전히 이리보다는 도진이 더 무서운 듯했다.
이리 또한 불고양이에게 꾸중을 했어도 불같이 화난 건 아니었다. 이리는 귀여운 요괴의 털을 쓰다듬으며 정문을 바라봤다.
“아직 학교 끝나려면 네 시간이나 남았다고?”
“네. 근데 뭐 솔직히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당장이라도 제 기막힌 은신술로 유재호란 녀석 교실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가서 뭐라고 하게. 순순히 건네주지 않을 텐데.”
“우리가 이 빨간 고양이 주인이고, 훔쳐 간 목걸이 돌려 달라고 하죠. 어쨌든 자기가 훔친 게 맞으니 찔리긴 할 거잖아요.”
“이미 이물에 대한 탐욕이 생겨서 절대 안 돌려줄 거야.”
유재호는 목걸이를 팔에 차고 다니고 있다고 한다. 쪽지 시험에서 갑자기 풀이 과정과 정답에 눈에 보이는 기현상을 겪은 후 1분 1초도 팔에서 빼지 않는다고. 심지어 씻을 때도 말이다.
“그럼 뭐 힘을 사용하든가, 도술을 사용하든가 아니면 스승님의 그 신묘한 능력을 사용하든가. 방법은 많아요.”
“그렇지….”
사실 ‘회수’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기억도 없애야 하는데, 그러려면 경계심이 풀린 상태여야 한단 말이야.”
“기절한 상태에서는 기억 못 없애요?”
“정신을 잃어도 경계심이 없는 상태였어야 해. 안 그러면 기억을 없앨 때 혼이 저항을 해서 실이 부드럽게 나오지 않거든”
“실이요?”
“기억의 실. 이따가 보면 알 거야. 아무튼 완전하게 불안 요소를 제거하려면 경계심 없는 상태여야 한다는 거야.”
상황을 들은 도진은 이제 정말로 심각해졌다.
지니고 있으면 문제의 답이 보이는 엄청난 물건을 손에 넣었으니 접근하는 모든 존재가 이 보물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도진 같은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사람이 다가간다면 눈을 마주치는 즉시 도망갈 게 뻔했다.
“잠들었을 때 몰래 침입하는 건 어때요?”
“지금이 오전 11시고, 최소 열두 시간은 더 지나야 잠이 들 텐데 유재호는 이미 이물을 소유한 지 120시간이 넘었어. 1분이라도 더 빨리 이물을 회수하고 기억을 삭제하지 않으면 그만큼 어두운 욕망이 쌓여서 혼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야.”
“제가 수면제를 구해 올게요. 당장 재우죠.”
“…그 방법은 건강을 해칠 수도 있으니 좀 더 대안을 찾아보고 안 되면 사용하자.”
“네.”
그때 불고양이가 약간 서러운 듯한 울음소리로 말했다.
애앵. 앵.
“뭐래요?”
“유재호가 나쁜 심성을 가진 아이는 아니래. 요즘 공부로 스트레스 받아서 이물에 욕심이 나 버린 것 같대. 환경 탓이니까 너무 탓하지는 말래.”
도진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애앵, 앵’ 이 세 글자에 그런 긴 뜻이 있다고……?”
전혀 다른 사안으로 심각한 것이었다.
애이앵.
“이번엔 뭐래요?”
“재호가 친구들 중에 자기만 여자친구가 없어서 초조해한대.”
“갑자기 그 얘기를 왜…. 아!”
도진이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난 것처럼 탄성을 내질렀다.
“완전 경계심 풀린 상태로 혼자 으슥한 곳까지 끌어내는 법 생각났어요.”
“뭔데?”
“예쁜 편지에 ‘할 말이 있어. 오늘 점심시간에 어디서 보자’라고 예쁜 글씨로 쓰면 끝이에요. 마침 학교도 남녀공학이고. 그냥 편지를 보는 순간 환장해서 교실을 박차고 나올걸요. 저 잠깐 문구점 좀 다녀올게요!”
도진이 자신만만하게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문구점에서 핑크빛 하트가 그려진 예쁜 편지 서너 장과 예쁜 분홍색깔 펜을 사서 다시 차로 돌아왔다.
“자, 이제 여기에 예쁘게 편지 써서 책상에 몰래 올려 두면 됩니다.”
“예쁘게?”
“네, 스승님 얼굴처럼 예쁘게요.”
도진은 이리에게 펜을 주지 않고 자기가 썼다.
재호에게
안녕.. 예전부터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고백하고 싶어
12시 30분에 잠깐 학교 뒤쪽으로 와 줄래?
기다릴게… – ㄷㅈ
“어때요. 다정이라는 여자친구 생기나 싶어서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달려오지 않겠어요?”
“내용은 좋지만 필체가…….”
이리가 난감한 듯 웃었다. 도진의 글씨체가 너무 괴발개발이라 고백 편지보다는 결투장으로 보였다.
“그럼 스승님이 써 보실래요?”
“내가 써 봤자일 것 같은데.”
“그래도 한 번 써 보세요. 누가 더 나은지 불고양이한테 고르라고 하죠.”
도진이 실실 웃었다. 이리는 도진의 속셈이 눈에 빤히 보였지만 넘어가 줬다.
이리가 도진과 똑같은 내용을 썼다. 이리의 필체는 너무 멋들어지고 예스럽고 정갈해서 꼭 프린터로 출력한 것만 같았다.
“진짜 예쁘긴 한데 절대로 동년배 글씨가 아니고, 산속에 사는 도인 같은 글씨라 더 의심만 사겠어요.”
도진은 불고양이에게 고르라고 하겠다는 말과는 달리 이리가 쓴 편지를 봉투에 곱게 넣어서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은 이리가 핸드폰을 꺼냈다.
“우리 고객 중에 글씨체 예쁜 위아가 있어. 걔한테 부탁해야겠다.”
“잠깐만요.”
도진은 이리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커다란 손에 핸드폰 화면이 그대로 가려졌다. 이리가 다른 대안이 있냐고 눈으로 묻자 도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근처에 한 명 있잖아요. 실제 여고생 필체로 써 줄 수 있는 사람.”
“…….”
“제 동생이 바로 이 학교에 다니거든요.”
도진의 여동생, 김도희.
마침 신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