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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썼어.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해. 너 글씨 진짜 존나 예쁘다.”
“이번에는 좀 오랫동안 연애해라. 지금까지 최장이 한 달이었나.”
“닥치고 얼른 가서 처자기나 해.”
“아, 존나 어이없어. 자기 일 끝났다고….”
도희가 민아를 쫓아냈다. 과학실 문을 닫고 뒤돌아서니 보이지 않았던 이리와 도진이 서 있었다. 도희가 헤벌레 웃었다.
“선인님, 어때요? 글씨 예쁘죠?”
“응. 그런데….”
“야, 저 오민아라는 애는 뭐 하는 애냐?”
도진의 물음에 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내 친군데 왜? 되게 순하고 착해. 좀 오타쿠 기질이 있긴 하지만.”
“오타쿠? 어느 쪽으로 오타쿠인데?”
“만화 좋아하고 좀 정신세계가 인터넷 세상에 빠져 있어. 근데 착해. 봐 봐. 이런 부탁도 들어주잖아. 캐묻지도 않고.”
“뭐 집안에 문제가 있다거나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거나 그러진 않고?”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왜 그래?”
도희가 수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도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뺨을 긁적였다.
“너는 이만 가서 밥이나 처먹어라.”
“내 친구한테 무슨 일인데? 당장 말해.”
도희는 급기야 도진의 멱살마저 잡으려고 했다. 도진은 어렸을 적 도희와 장난치다가 뼈를 부러뜨렸던 기억 때문에 두 손을 뒷짐 진 채 그 손길을 쓱 피했다. 발끈한 도희가 다시 손을 뻗고 도진은 가뿐히 피했다. 몇 번 그 행위를 반복하다가 도희가 씩씩거리며 의자를 들어 올리는데 이리가 끼어들었다.
“도희야. 네 친구가 인터넷에 올라온 어설픈 주술을 따라 한 것 같아. 지금 위험한 건 아니니까 손을 댈 필요는 없는데, 나중에 민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한테 연락해 줄래?”
“아…. 네! 혹시 무슨 일이라는 게 막 민아가 흑마법에 빠져서 학교에 저주를 퍼뜨린다거나, 악마 소환 의식을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학교가 위험해지면 잔챙이 위아들이 난리가 나서 주위의 신령이고 잡신이고 할 것 없이 다 도움을 호소하고 다닐 것이다. 한 장소에 서식하는 잔챙이들은 그곳의 오염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얼른 밥이나 처먹으러 가.”
“아, 알았다고. 선인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응. 안녕.”
도희가 씩씩하게 인사하고는 나갔다. 도진은 누굴 닮아 다혈질인지 모르겠다며 한탄했고, 이리는 웃었다.
둘은 교실을 나와 편지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학생들이 많이들 지나다녔는데 아무도 도진과 이리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리가 문득 멈추더니 지나가는 학생 한 명을 붙잡았다.
“안녕, 민석아.”
“어? 안녕.”
“이 편지 좀 3학년 1반 유재호 선배한테 전해 줄래?”
“응, 그래.”
학생은 편지를 받고는 곧장 3학년 교실로 올라갔다.
이 대화가 이뤄지는 동안에도 주위 학생들은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건 대체 무슨 주술이에요? 기가 막히네 진짜. 이런 거 가능했으면 김도희 부를 필요 없이 지나가는 학생한테 부탁해도 됐겠는데요.”
“주술이 아니라 도술이야.”
“도술은 종류가 한 수천 가지는 되나 봐요.”
“도술은 결국 하나의 흐름이지.”
“무슨 소리실까요.”
“자연히 이해하게 될 거야.”
약속 장소에 도착한 둘은 유재호 말고는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결계를 펼치고는 유재호를 기다렸다.
* * *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고백 편지라니 세상에 이런 건 감히 받는 상상도 한 적 없는데. 맙소사….
‘이 팔찌를 얻은 후로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어.’
재호는 빨간 고양이의 목걸이였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 후로 집에만 가면 빨간 놈이 졸졸졸 쫓아다니며 애옹애옹 울어 댔지만 절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목걸이를 채운 주인이 나타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팔찌는 정말 신기한 물건이었다. 차고 있으면 지능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문제에 대한 풀이법과 답이 눈에 보여서 그대로 쓰기만 하면 되었다. 옛날에 부모님이 음이온 팔찌라며 가져왔을 때는 걸리적거리기만 했는데….
‘이 팔찌만 있으면 내가 고3이라도 연애해도 돼!’
재호는 신이 나서 편지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이것만 있으면 수능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설렁설렁 공부하면서 연애하고 놀다가 팔찌의 힘으로 수능을 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또 설렁설렁 놀다가 팔찌의 힘으로 시험을 보고…….
잔뜩 꿈에 부푼 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이 되기 5분 전이었다.
‘내가 너무 빨리 왔나.’
편지를 보낸 사람보다 더 빨리 와 버리다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여자애를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은 것 같아 기분을 풀었다.
재호는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기다렸다.
벤치 뒤에 있던 도진과 이리가 시선을 마주쳤다.
재호는 완전히 방심한 상태였고,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심장이 기대심으로 부풀어 콩닥콩닥 뛰는 소리가 도진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부채를 꺼내든 도진이 재호의 뒤쪽으로 스윽 다가가던 그때였다.
애앵!
시뻘건 것이 갑자기 재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뭐, 뭐야. 너. 빨간 놈?”
재호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불고양이는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재호에게 이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차 안에서 기다리랬더니 못 참고 나온 모양이었다.
“씨, 학교까지 따라왔냐? 이거 내 거야. 절대 못 돌려줘. 저리 가!”
재호가 팔찌를 감싸고는 고양이와 반대편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재호의 몸에서 스멀스멀 어두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팔찌에 대한 탐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 저 불고양이 새끼 진짜. 스승님, 어떡하죠?”
“어쩔 수 없지. 지금 기절시켜.”
“예!”
도진이 부채로 재호의 뒤통수를 퍽, 쳤다. 그 즉시 재호가 픽 쓰러졌다. 도진은 재호의 몸을 받아들여 벤치에 눕혔다. 그러고는 바로 불고양이의 뒷덜미를 잡아 맹렬히 흔들었다.
“야, 너 첩자냐? 왜 우리 방해해? 어? 차에서 기다리랬는데! 왜 방해를 하냐고!”
애앵. 애액.
“시끄러워. 닥쳐. 지금 너 때문에 골치 아파졌다고!”
애.
“스승님, 이 새끼 뭐라는 거예요?”
“자기 덕분에 일이 술술 풀렸는데 왜 뭐라고 하냬.”
“하, 존나 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고양이 새끼가.”
도진이 불고양이를 쥐불놀이하듯 둥글게 허공에 둘렸다. 불고양이가 발버둥 치면서 불덩어리 형태로 변하자 진짜로 쥐불놀이 같아졌다.
“도진아, 그만해. 정신 사나워.”
도진이 우뚝 멈췄다. 이리는 유재호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도진이 불고양이를 내던졌다.
“스승님은 뭔데 그 새끼 이마를 쓰다듬고 있어요? 장난해요?”
“일단 사해 목걸이부터 빼.”
“네. 빼긴 빼겠는데 그 손 갖다 대지 마시라고요.”
도진이 툴툴거리며 이물을 회수했다. 내던져졌던 불고양이가 얼른 돌아와 앵앵거리며 목걸이를 달라고 다리를 긁어 댔다. 아직 불고양이의 대여 기간이긴 하므로 이물을 돌려주고 도진은 얼른 이리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꼭 그렇게 이마에 손을 대고 있어야 하는 거면 저한테 방법 알려 주세요. 제가 잘 빼 볼게요.”
“뭐?”
“빨리 그 손 떼라고요. 네?”
도진이 이리의 하얀 손을 쥐어서 제 무릎에 올려놓고, 대신 제 손을 유재호의 이마에 가져갔다.
“어떻게 하면 돼요?”
“…….”
이리는 도진을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옅게 미소 지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네 마음은 알겠으니까…….”
이리가 도진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도진은 이마에 뭔가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유재호의 이마에 닿은 제 손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이제 손을 떼도 돼.”
“네.”
도진이 손을 떼자 도진의 손바닥과 유재호의 이마 사이에 오색으로 반짝이는 물질이 길게 주우욱 늘어났다. 유재호를 이루고 있는 기억과 감정의 덩어리였다.
도진이 감탄했다.
“제가 사람의 기억이랑 감정은 처음 보는데, 분명 실 형태라고 들었거든요? 실타래라고.”
“맞아.”
“이건 실타래가 마시멜로 같은데요. 존나 두꺼운 마시멜로.”
오색빛깔 마시멜로는 끈끈하게 뭉쳐 있었다. 60cm 지름의 완전한 덩어리. 가느다란 실 형태가 보여야 하는데 실의 흔적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점성이 있는 하나의 덩어리였다.
“실이 너무 단단하게 엉켜 있어서 그래. 이래서 경계심 없는 상태에서 뽑아내려고 했던 건데…….”
불고양이가 애앵, 딴청을 피웠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 이물과 관련된 실만 찾아서 제거하죠? 실 형태가 아예 없는데요. 그냥 실이 보이지가 않는데요?”
이리가 손으로 마시멜로를 건드렸다. 손끝으로 실 경계선을 느껴 보려고 했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뿌리 부분부터 색이 좀 이상해요.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 새끼는 원혼한테 잡혀가겠어요.”
도진의 말대로 기억의 뿌리, 재호의 이마에서부터 스멀스멀 어두운 색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이토록 무서웠다.
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도진은 포기하려나? 싶었는데, 이리는 항상 차고 다니던 검은색 실 팔찌를 풀고 있었다.
도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팔찌를 풀고 벤치 위에 올려둔 이리가 손가락 끝으로 마시멜로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환한 빛이 퍼져 나오며 끈끈하게 붙어 있던 덩어리들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엉켜 있던 덩어리가 빛에 휩싸인 채 저절로 정리되더니 이윽고 몇만 가닥의 오색 실타래가 되었다.
도진의 입이 허어어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하, 미쳤다…. 그 팔찌 그냥 패션이 아니라 막 능력 구속구 그런 거였어요? 그거 풀면 초선인이 되고?”
“초선인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