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39화 (39/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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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선인님.”

“잘 가. 곧 또 보자.”

“네. 선인님의 인간 제자도 나중에 또 봐요.”

“예엡. 안전 귀가 되세요.”

도진이 손을 흔들었다. 제인은 즐거운 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아니, 묵직하게 미끄러져서 대여점을 빠져나갔다.

배웅을 마친 둘은 안으로 들어왔다.

“구렁댕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어디더라…. 다른 구렁댕이들은 실버처럼 핸드폰을 갖고 있을 확률이 적어서 사진 찍으려면 우리가 직접 가야겠는데.”

“야외 데이트! 언제든 환영입니다. 일정 확인할게요.”

“서너 군데 정도인데, 내일 혼자 다녀올 수 있지?”

스케줄 표를 확인하던 도진이 눈을 치켜떴다.

“왜 저 혼자 보내려고 하세요? 제가 ‘데이트’라고 해서 그래요? 부담스러워요?”

득달같이 달려드는 제자를 이리가 달랬다.

“내일 일정을 봐. 갈 시간이 없어서 그래. 위험한 곳도 아니고 구렁댕이들도 다 순박한 애들이라 문제없을 거야. 지금이 구렁댕이들이 알 낳을 시기라 짝 없는 구렁댕이도 쉽게 찾을 거고.”

이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4월 12일 날짜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06:00 불씨시계 반납

07:00 사해 목걸이 반납

08:00 오발-선비화

09:00 석굴요-상담

.

.

밤 11시에 끝이 나는 메모를 보고 도진은 푸시시 식었다.

“죄송해요, 스승님. 직원으로서 1인분을 해야 하는 이 때에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알긴 아는구나. 그럼 구렁댕이 일은 너한테 맡길게.”

“네, 맡겨 두세요!”

도진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상형이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설마 충족하는 이가 한 마리도 없겠는가.

하지만 일은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 * *

다음 날 도진은 아침부터 대여점을 나와 인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인천 구렁댕이들은 전부 탈락이었다. 죄다 알파벳 A도 읽을 줄 몰랐다. 미리 알아둔 구렁댕이 서식지인 수원, 오산, 평택, 천안에도 들렀으나 영어를 아는 구렁댕이는 찾지 못했다.

-그래? 한 명도 없었어?

“네. 단 한 마리도요! 저는 그래도 영물이라 무리에 한둘은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다들 이렇게 무식- 아니, 아무튼 없었다구요. 이제 공주에도 없으면 어떡하죠? 공주가 마지막 서식지라면서요.”

이리가 전화 건너편에서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집단 서식지는 공주가 마지막인데, 이제 실버처럼 도시 근교에 홀로 살아가는 구렁댕이들을 수소문해 봐야지.

“와씨…. 그냥 불가능하다고 의뢰 취소하면 안 됩니까? 아니면 좀 눈을 낮추라고 하든가요. 생김새 들어맞는 훤칠한 구렁댕이들은 좀 있었거든요.”

-그래? 알았어. 실버한테 연락해 보고 다시 전화할게.

“네.”

전화를 끊고 도진은 시트를 한껏 뒤로 젖혔다. 용마는 간간이 핸들을 잡아 줘야 하기 때문에 아예 눕지는 못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은 벌써 캄캄한 밤이었다.

이리와는 아침에 보고 못 봤다. 이대로라면 잠도 따로 잘 판이었다. 이리가 늦었으니 집으로 바로 들어가라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무조건 대여점으로 돌아가서 문 안 열어 줘도 대문 두드려야지.’

이리가 집으로 보내려고 하면 무조건 뻗대고 드러눕고 땡깡 피워야 한다. 그래야만 이리가 대여점에서 재워 준다.

도진은 이리 앞에서 어른스럽고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이리가 자꾸 땡깡을 피울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씨발. 내 연애도 못 하고 있는 판국에 남 연애 도와주느라 시간 다 가네.’

짝사랑도 서러운데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려니 더 서러웠다. 본래 대여점의 업무가 아니라는 점도 억울했다.

‘복지관 새끼들은 지금도 처놀고 있겠지. 나랑 스승님을 이렇게 생이별 시켜 놓고….’

도진이 이를 가는 사이 제인과 통화를 마쳤는지 이리에게 전화가 왔다. 도진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스승님.”

-응. 미안한데 자기는 그 이상형을 포기할 수 없대….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 왔다고. 대신 껍질이 황색이어도 괜찮다네.

도진이 핸들에 이마를 박았다.

“대체 이상형이 뭐가 중요하지? 누굴 좋아하면 그 사람이 이상형이 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스승님을 좋아해서 스승님이 이상형이 되었는데요!”

-……그럼 수고하고. 공주 갔다가 여기 오지 말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

예상과 똑같이 나오는 이리에 도진은 서러움이 폭발했다.

“스승님. 저 너무 피곤해요. 아홉 시간째 혼자 산 타고, 영물들이라서 성격 누르면서 대화해야 하고. 너무 스트레스 받아요.”

-응, 힘들지.

“스승님은 이상형이 뭐예요?”

-…….

“저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저는 이상형이랄 게 없었잖아요? 그냥 처음부터 스승님을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이상형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왜 어긋나서는 안 되는지 궁금한 거예요. 진짜 순수하게 이 의뢰를 위해 질문하는 거라구요.”

이리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수행 중인 신분으로 거짓말하면 안 돼…. 차라리 그냥 내 이상형이 궁금하다고 해.

“네, 스승님 이상형 존나 궁금해요. 대체 어떻길래 그렇게 오래 사시면서 연애를 안 하셨는지. 키는 역시 커야겠죠? 최소 192cm는 되어야. 얼굴은 너무 잘생긴 나머지 사람들에게 위압감까지 줄 정도로. 힘도 세고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사람 어때요? 스승님 타입이에요?”

만약 이리가 연애를 해 봤다면, 빡치긴 하겠지만 나비 선인이나 음악가, 이해자 등을 통해서 이리의 전 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든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리는 너무 감사하게도 정인을 둔 적이 없었고, 도진은 이리에게 직접 이상형을 묻는 수밖에 없었다.

도진이 계속 재촉하자 마침내 이리가 대답했다.

-나는… 이상형이 없어.

“네?”

-누군가와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이상형도 딱히…….

“짝사랑 같은 것도 안 해 보셨다는 말씀이에요?”

-응.

“…….”

선인은 거짓말을 못 하므로 이리의 말은 모두 진실이다. 도진은 서러움이 싹 사라지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셀 수 없을 만큼 오래 살았는데!

정인도 없었고 짝사랑도 없었다니.

오리 부리 같이 댓 발 나왔던 입은 이제 헤벌쭉 웃고 있었다. 맘 같아선 당장 대여점으로 달려가 이리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고 싶었다. 물론 이리가 순순히 끌어안겨 주지는 않겠지만.

-아, 고객 왔다. 그럼 끊을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전화 드릴게요!”

통화를 마친 도진이 핸드폰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온 세상에 감사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바깥에 오색빛깔 간판이 가득했다. 대부분 모텔이었다.

“…당연히 색욕을 느낀 적도 없으시겠지.”

함께 있었다면 민망해하셨을까.

난감할 때마다 늘 그렇듯 까만 실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용마에게 더 빨리 달리라 재촉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귀여웠을 것이다.

[(⊙_⊙)?]

“아무것도 아니야. 달려.”

[(⊙_⊙;)]

‘그러고 보니 이렇게 어두운 밤이었나.’

도진은 차창 밖으로 야경이 펼쳐진 도로를 볼 때마다 그날이 떠올랐다.

이리와 처음 만났던 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가득했던 ‘이리 선인’을 만났던 그날.

그날도 도진은 이렇게 어두컴컴한 밤을 차창 밖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

달만 덩그러니 떠 있는 어두운 밤. 고급 세단 한 대가 서울 외곽 도로를 질주했다.

싸늘한 적막이 흐르는 차에는 근심 가득한 얼굴의 젊은 부부와 볼살이 통통하고 귀여운 아기가 타고 있었다. 이제 막 8개월 지났을 법한 아기는 아동용 카시트에 앉혀서 창밖을 구경했다.

동그란 두상에 볼살은 통통하고 코끝은 분홍빛을 머금고 있는 귀여운 아기였다.

“아빠빠. 엄마. 까매. 밤 까매.”

“으응, 그래. 밤이라서 까매.”

“엄마. 밤이야. 까매.”

“응. 밤은 까매. 하늘이 까매져.”

아직 갓난아기임에도 말을 제법 잘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웃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이 아픈 듯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아기의 사지는 묶여 있었다.

부드럽고 널찍한 담요로 목 아래 전체를 감쌌고, 그 담요를 금색 밧줄로 묶었는데 부적도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이런 상태가 익숙해진 아기는 해맑게 웃으며 바깥 구경을 했다.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여보, 우리 더 빨리 가요. 도진이가 불편해 보여.”

“응, 그래요.”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발에 힘을 줬다. 차체가 가볍게 흔들렸다. 아내는 놀라며 아기를 봤는데 아기는 다행히 울지도 않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 꺄르르 웃었다. 아마 손뼉을 치고 싶은지 몸을 흔들다가 뜻대로 안 되자 볼이 부풀었다.

영락없는 아기였다.

그러나….

“도, 도진아!”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아기가 꿈틀거리며 담요를 벗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우, 우, 하며 몸을 뒤틀자 담요가 가슴 부근까지 스르르 내려왔다. 그러나 양팔을 빼지는 못했다.

“괜찮아. 진정해요. 부적을 붙였잖아요.”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엄청난 분이 만든 부적이랬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남편의 말대로 아기는 결국 양팔을 빼내는 걸 포기했다. 대신 뜻대로 안 되자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아. 아파. 엄마. 이거. 이거 아파.”

“도진아…. 조금만 참으면 돼. 조금만 참으면 자유로워질 거야.”

“아파. 엄마아. 도진이 아파.”

“괜찮아. 조금만….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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