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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 의뢰를 완수해 내야 해.’
목적지에 도착한 도진은 용마를 적당히 조랑말 정도로 변하게 해 산속을 뛰놀게 두고 산을 올랐다.
반드시 이상형에 걸맞은 구렁댕이를 찾고 말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도 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이리 선인의 연인이 되겠는가? 지금으로선 답도 없이 멀기만 한 욕심이지만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도진이었다.
공주 계룡산에는 구렁댕이가 45마리 있었다. 그중에서 아직 짝이 없는 구렁댕이는 5마리였다. 도진은 그 다섯 마리를 모아 놓고 흙 위에 나뭇가지로 글자를 썼다.
‘ABCDE’
“영물 여러분, 이 글자가 뭘까요?”
“이게 글자인가요?”
“혹시 구렁댕이를 그리신 건지요?”
“그나저나 아직 짝이 없다는 구렁이는 언제 소개해 줄 테지요?”
여기서도 아무도 읽어 내지 못했다. 도진은 그야말로 절망했다. 앞으로 이틀 내로 나홀로족 구렁댕이를 수소문해야 한다니.
이렇게 소득 없이 돌아가면 이리가 실망을…. 물론 실망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리 선인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지만 도진은 스스로가 실망스러웠다. 멋지게 해결해서 이리의 앞에 당당히 서고 싶었는데.
어쩌겠는가. 없는 이상형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죄송합니다만 저희 고객님이 원하는 타입과 여러분은 어울리지 않아서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금 구렁댕이 놀려요?”
“괜히 기운만 뺐네요.”
“허탈하네요. 들어가죠.”
“이러다 알을 못 낳게 생겼지 뭐예요.”
짝을 찾아 주겠다는 말에 모여들었던 구렁댕이들이 실망하며 떠나갔다. 도진은 훠이훠이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다가 멈춰 섰다.
“방금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분?”
구렁댕이들이 눈을 깜빡깜빡하며 도진을 쳐다봤다.
“‘알을 못 낳게 생겼지 뭐예요.’라고 하신 분?”
한 구렁이가 앞으로 나왔다. 은색 가죽을 지녔고 키가 3m도 넘어 보이는 훤칠하고 튼튼한 구렁이였다.
도진은 다른 구렁댕이들은 다 돌려보낸 후, 그 구렁댕이만 앞에 앉혀 놨다.
“혹시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따로 없지 뭐예요. 그냥 우리 알을 잘 지킬 수 있으면 되지 뭐예요.”
“왜 아직까지 짝을 구하지 못하셨지요?”
“같이 짝하자고 찾아온 구렁댕이들이 몇 있었는데 제가 다 거부했지 뭐예요.”
“이유는요?”
“그냥 하나는 가죽이 황색이라 마음에 안 들고, 하나는 눈꼬리가 내려간 게 마음에 안 들고, 하나는 몸통 두께가 얇은 게 마음에 안 들고…….”
이상형이 없다면서 눈은 높은 구렁댕이였다.
도진은 핸드폰을 꺼내 실버 제인의 사진을 보여줬다.
“제 의뢰구렁댕이님은 이렇게 생긴 분입니다. 이름은 실버 제인이고요.”
“우어어어…….”
고성 구렁댕이가 온몸을 울긋불긋 물들이더니 몸을 배배 꼬았다.
“정말 아름다운 분이지 뭐예요. 이름도 독특하고 예쁘지 뭐예요. 꼭 만나 뵙고 싶지 뭐예요!”
다행히 높은 기준에 부합한 듯했다.
“네. 저도 당신… 혹시 성함이.”
“박철순이에요.”
“예, 철순 씨. 저도 철순 씨와 실버 제인 씨가 아주 잘 어울릴 거라고 확신합니다.”
“당장 만나러 가죠!”
들뜬 구렁댕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리에 흙구덩이가 깊게 파일 정도였다. 도진이 구렁댕이의 허리를 턱, 붙잡고 다시 앉혔다. 두껍고 육중한 구렁댕이의 몸이 마치 갈대처럼 힘없이 끌려왔다.
“진정하세요. 두 분의 만남을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박철순 씨는 짝짓기를 위해 얼마나 노력할 의사가 있습니까?”
“실버 제인 씨를 만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지 뭐예요.”
“아주 훌륭한 자세예요. 실버 제인 씨는 특정 이상형이 있는데, 바로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영어가 뭐예요?”
도진이 땅바닥에 적은 글자를 가리켰다. 구렁댕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꼬부랑 그림이요?”
“현재 인간 사회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언어입니다. 총 26자인데, 읽을 수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까… 자, 지금부터 함께 공부하도록 하죠.”
도진이 씨익 웃었다. 두 눈은 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어쨌든간 알파벳을 읽을 수만 있으면 된다.
이상형을 찾기 어려우면… 만들면 되는 법 아니겠는가?
* * *
박철순은 사진 속 실버 제인의 자태에 첫눈에 반했는지 열성적으로 공부했다. 그에 도진도 더욱 열정적인 스승이 되어서 박철순을 가르쳤다. 알파벳 26자를 읽는 것은 물론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라는 간단한 대화까지 성공했다.
비록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지만 도진은 뿌듯했다.
-도진아. 실버가 일단 겉모습은 마음에 든대.
“그렇죠? 제가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지만 이 정도로 훤칠한 구렁댕이는 못 봤다니까요.”
-정말 영어를 읽을 줄 알아?
“네. 저 못 믿어요, 스승님?”
-아니, 믿지. 그럼 용마에 구렁댕이를 태우고 대여점으로 와. 실버가 두 시까지 오겠대.
“바로 출발할게요.”
응,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이리를 도진이 얼른 붙잡았다.
“스승님, 그런데 혹시 영상 통화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갑자기 왜?
“스승님의 어여쁜 얼굴 못 본 지 너무 오래 돼서요…. 저 분리불안 생겼나 봐요. 어떡해요?”
-…….
“싫으시면 맑고 청아한 목소리라도 더 들려 주세요. 빨리요. 저 산에서 하룻밤 보내느라 피곤하고 지쳤단 말이에요.”
도진은 애처로운 말투와는 달리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게 왜 이리 즐거운지 모르겠다.
늘 여유로운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그냥 내 성격이 못된 건가.
-그래…. 조심히 올라오고…. 그럼 이따 보자.
이리가 한숨이 가득 담긴 문장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도진은 큭큭 웃으며 녹음 파일을 찾아 다시 재생했다. 이리와의 통화는 자동 녹음이 되게 만들었다.
“방금 그분이 이리 선인님이신가 봐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박철순이 쏘옥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네, 맞습니다. 이분이 바로 그 천지신명 이리 선인님입니다.”
“그분을 실제로 만난다니 긴장되지 뭐예요.”
“스승님이 좀 위대한 분이시긴 하죠.”
모태솔로인 점까지 위대했다.
“자, 그럼 출발할까요.”
도진은 용마를 1톤 트럭으로 변형시키고 짐칸에 구렁댕이를 태웠다.
산을 내려가 잠깐 시내에 들러 멀쩡한 인간 옷을 사 입히고, 영어 문제집도 한 권 샀다.
“가는 길에 풀어요.”
박철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짝짓기 한번 하기 정말 힘들지 뭐예요.”
“그럼요. 요즘 세상에 짝 만들기가 쉽겠습니까?”
“도진 님은 짝 있으세요?”
“안타깝게도 짝은 없고 짝사랑만 있습니다.”
“도진 님도 같이 영어 공부를 하셔야겠지 뭐예요.”
영어 공부한다고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도진은 지금쯤 원어민보다 더 유창하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철순 씨는 운이 좋은 겁니다. 상대가 이상형이 있으니 확실한 기준점을 가지고 이상형에 맞출 수 있잖아요. 저는 상대가 이상형이 따로 없다 보니 그저 막막하거든요.”
도진의 한탄에 구렁댕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어요.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도진 님이 운이 좋지 뭐예요?”
“뭐요?”
도진이 놀리나 싶어 인상을 확 썼다. 구렁댕이가 순박하지만 순박하지 않아 보이는 세로 동공을 깜박이며 말했다.
“…….”
그 말을 들은 도진의 눈이 커졌다.
막막했던 현실에 어떤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이분이 박철순 님….”
“이분이 실버 제인 님….”
이리 만물 대여점의 정원에서 두 구렁댕이의 만남이 이뤄졌다. 둘은 서로를 빤히 보더니 몸을 낮추고 원을 그리며 돌았다. 워낙 몸집이 거대하다 보니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렸다. 그 탓에 이리가 휘청거리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도진이 얼른 이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도진아. 팔…….”
“지금 두 분이 뭐 하는 겁니까? 탐색전?”
“…함께 알을 지키고 키우기 적합한 상대인지 보는 거야.”
이리가 슬며시 팔을 치우며 대답했다.
“빙글빙글 돈다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뭔가 힘겨루기를 한다거나 독니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본다거나 해야 하지 않아요?”
“빙글빙글 돌면서 그걸 다 파악하는 이들이야. 우리와는 다른 문화를 갖고 있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네에. 그러려니 말이죠.”
도진은 뚱하니 지켜봤다. 두 구렁댕이가 아니라 이리를. 혹시나 또 휘청거리지 않을까 했지만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몇 분쯤 지나서 두 구렁댕이는 만족한 듯 스르르 다가왔다.
“괜찮은 상대를 소개해 줬지 뭐예요. 역시 이리 선인님께 부탁하길 잘했지 뭐예요.”
“선인님과 도진 님 덕분에 좋은 구렁댕이를 만나 알들을 낳을 수 있게 됐지 뭐예요.”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실버와 철순은 방금 만난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함께한 연인 같았다.
“영어 테스트는 안 해요? 이상형이 맞는지 체크해야죠.”
“크흠. 흠.”
철순이 잘 끝난 마당에 왜 그 얘기를 하냐는 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다행히 실버는 테스트를 할 마음이 없는지 베시시 웃었다.
“영어를 모르면 제가 가르쳐 주면 되지 뭐예요.”
뭐라고, 이 구렁이 새끼야?
도진은 허무함에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차라리 뒤돌아섰다.
이럴 거면 왜 계룡산에서 밤을 새우며 영어를 가르쳤나…. 하여튼 위아들이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두 구렁댕이가 대여점을 떠나고, 도진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형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나 싶네요. 아, 스승님. 저 씻어도 돼요? 지금 씻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에요. 산에서 하룻밤 보냈더니 온몸이 찝찝해요.”
“그래, 씻고 나와.”
실제로 냄새가 난다거나 지저분하지는 않았지만, 하루 못 씻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서려니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도진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 바디샴푸로 온몸을 뽀독뽀독 씻은 도진이 개운한 마음으로 욕실을 나왔다. 자연스럽게 제 방에 들어가 옷을 입으려던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멈칫했다.
“…….”
도진은 작정한 얼굴을 하고, 하의만 입은 채 1층으로 내려왔다.
“스승님. 저 다 씻었어요.”
“응. 좀 쉬었다가 이물 방에서 우운 사전 좀 꺼내….”
이리가 말을 하다가 멈췄다.
갓 스무 살이 된 제자가 상반신을 탈의한 채 멋진 포즈를 취하고 보란 듯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