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45화 (4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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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실제로 만났을 때 ‘함구령’과 비슷한 주술을 걸었나 보네요. 2년 전 주술이 아직도 통할 정도면 아마추어는 아니에요.”

“그날 이후로 거듭해서 주술을 보강했겠지.”

도진이 가장 최근에 올라온 주술 글에 들어갔다.

[익명] 친구를 만드는 주술 (초보)

“부적 종이로 오로 석영지를 사용한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고…. 이쪽에 발을 걸친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술 자체는 엉성하고 어설펐다. 하지만 실제로 주술을 행하려면 일반인은 구하기 어려운 도구들이 필요하니, 일부러 구하기 쉬운 도구들로만 펼칠 수 있게 하려다 어설퍼진 듯했다.

“민아야. 너 이 주술을 따라 했구나.”

“네.”

민아는 잡아뗄 생각이었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빠른 긍정이었다. 이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글을 올린 사람이 거짓말을 했어. 이건 친구를 만드는 주술이 아니라 노예를 만드는 주술이야.”

“노… 노예라고요?”

“그래. 상대를 내 말에 잘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주술이지.”

“그런…. 저는 몰랐어요. 저는……!”

민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민아의 옆에서 도희는 ‘아, 그래서 며칠간 우리가….’ 하고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개를 끄덕일 때가 아니라 일단 민아를 감싸 줄 때였다. 친구의 어깨를 둥글게 안아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푸는 방법이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너…. 너 왜 화를 안 내?”

“네가 알고 한 게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는 친구인데 내가 왜 화를 내냐.”

“네가 이렇게 날 위로하는 것도 다 내 주술 때문인 거지?”

민아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도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주술 따위가 없어도 친구야.”

“아니야. 너는 착각하는 거야. 주술 때문에…….”

“아니야. 나는 진심으로 너를 친구로서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속고 있는 거라고! 주술이 풀리면 너는 날 경멸할 거야!”

“웃기지 마. 나는 쉽게 사람 경멸하는 사람 아니야.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세상 진지하고 절박하게 우정의 진실성을 다투는 고1 학생들을 도진이 한심하게 구경했다. 이리가 조용히 헛기침하고, 시선이 집중되자 나긋나긋하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술은 너희가 여기 앉을 때 내가 이미 풀었단다.”

“아…….”

“거 봐! 맞지? 나는 너를 진심으로 우정해. 우리는 진정한 친구야!”

“도희야….”

“민아야!”

도희와 민아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도진이 크게 하품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던 우정 확인 시간이 끝나고 이리는 민아에게 주술 글의 위험성을 단단히 일러 주었다.

‘익명’은 친구 만드는 부적 외에 다른 주술 글들도 모두 위험한 목적의 주술을 사소하고 가벼운 것처럼 속여서 올리고 있었다.

여드름 사라지는 주술은 주변의 생기를 끌어다 쓰는 주술이고, 밥 먹어도 살 안 찌는 주술은 배 속에 ‘식충’이라는 요물을 들이는 주술이며, 길을 걸을 때 신호등 초록불만 걸리는 주술은 내 앞에 놓인 사소한 행운을 당겨쓰는 주술이었다.

“저 여드름 주술 쓴 적 있는데…. 그때 집에서 키우던 화분이 다 죽어서 엄마가 속상해했었어요. 어쩌면 엄마까지도…. 엄마는, 엄마한테는 영향이 없는 거죠?”

“어설픈 주술이라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진 못하니 걱정하지 마.”

민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문제는 다른 익명들이었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민아는 재료 구하기에 어려움이 있어서 다른 주술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연구회의 오컬트 매니아들은 ‘익명’이 올린 주술들을 다 해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래도 이 글을 올린 사람한테 직접 가 봐야겠죠?”

도진이 핸드폰 카메라로 필명 게시판과 익명 게시판의 모든 글을 하나하나 죄다 찍으며 물었다.

“아니면 모임을 가질 때 몰래 잠입하는 방법도 있지.”

민아가 네? 하며 끼어들었다.

“몰래 들어갈 필요 없어요. 두 분이 퇴마 영상을 찍은 퇴마사들이라고 하면 다들 환영할 거예요.”

“우리는 퇴마사도 아니고, 영상 출연자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도 없어.”

“왜요? 다들 정말 좋아할 텐데…. 석진 삼촌이 얼마나 두 분을 찾아 헤맸는데요. 오죽하면 공인인데도 TV에 나와서 퇴마 영상 얘기를 하겠어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졌다고 욕할 거 뻔히 알면서도 꾸준히 언급하잖아요. 유명한 연예인이 그러기 쉽지 않은데…. 삼촌은 진심으로 두 분을 좋아하고 있고, 정말 만나고 싶어 해요.”

민아는 이리의 눈을 직시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의미였다.

“모임에 이석진도 자주 참석해?”

“워낙 바빠서 거의 못 와요. 근데 저도 두 번밖에 못 갔어요. 근처에 사는 지연 언니랑은 자주 만나서 놀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제가 어리다고 잘 안 끼워 줘요. 단챗방도 어른 되면 들어오라고 저 초대도 안 해주고…….”

단챗방도 있군. 도진이 얼른 이해자에게 새로운 소식을 메시지로 전했다.

이리는 이쯤으로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민아야. 케이크가 정말 맛있네. 얼른 먹어 봐.”

“네? 네.”

민아가 포크를 들어 푹신푹신한 초코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 게 정말 달콤하고 맛있었다. 옆에서 도희가 얘기했다.

“여기 케이크 맛집이다. 그렇지?”

“어. 비싼데 맛있네.”

민아와 도희는 케이크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접시를 비우는 사이 민아는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를 모두 잊었다. 민아가 보는 맞은편은 텅 비어 있었다.

‘왜 우리 서로 마주 보고 앉지 않고 나란히 앉았지?’

오늘은 좀 특이하게 앉았네, 라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제 일어날까? 코노 고?”

“그래.”

코인노래방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때, 누군가 민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젊은 남자 둘이었다. 그중 키 큰 남자에게 민아의 시선이 꽂혔다.

저 얼굴은 어디선가 봤었는데.

저 얼굴은…. 저 사람은……!

민아가 허겁지겁 두 사람을 쫓았다. 두 사람은 카페 문을 열고 나갔고, 바로 민아도 뒤따라 나갔다. 그러나 둘은 이미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야, 오민아. 왜 그러냐?”

도희가 뒤에서 의아하게 물었다. 민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그 사람들이었을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민아는 핸드폰을 꺼내 ‘초상화’를 확인했다.

그래. 맞아. 이 얼굴이었어. 확실해.

그날 밤, 민아는 새보르미 연구회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미나55] 저 오늘 퇴마 영상 속 키 큰 남자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 봤어요

아까 낮에 친구랑 카페 갔다가 뭔가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옆을 지나가서 보니까.. 그 얼굴인 거예요. 키 큰 남자.

옆에 있던 사람 얼굴은 못 봤는데 그 남자보다는 작았고 개량한복 같은 걸 입고 있었어요.

저 너무 놀라서 한 0.002초 굳었다가 바로 카페 뛰쳐나갔는데 그 사람들은 사라져 있더라고요. 아무리 사람이 많았어도 뒷모습은 보여야 하거든요? 시간상

그런데 진짜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어요

솔직히 카페 cctv라도 뒤져보고 싶어요ㅠㅠ 진짜 그 얼굴 확실했던 것 같은데 진한 눈썹에 눈동자는 약간 붉고 이목구비 뚜렷하고 ㅈㄴ잘생겼고 체격도 운동선수만큼 커다랬단 말이에요ㅠ

지갑 잃어버렸다고 하고 내일 경찰이랑 같이 가볼까요? 요즘 경찰 없으면 cctv 안 보여주니까ㅠㅠㅠㅠ

글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댓글이 달렸다.

[새신을신고] 카페 장소랑 시간대 알려주실 수 있나요?

* * *

“2년 후 반납이야. 절대 까먹지 말고.”

“네네, 그라믄요. 이만 가보겠심니더. 들어가십셔, 선인님과 직원분들.”

약초 주머니를 소중하게 든 까만 요괴가 공손하게 인사하고 대여점을 나갔다. 야요광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오늘의 대여점 고객들이 모두 다녀갔다. 시간은 밤 10시였다.

“대여점은 여전히 바쁘네요. 이게 겨우 둘이서 업무가 돌아갑니까?”

초저녁에 왔다가 앉을 새도 없이 일을 도운 이해자가 툴툴거렸다.

“바쁜 거 알면 좀 자주 와서 도와주시든가.”

도진이 이해자의 품에 오늘 사용한 이물 뭉텅이를 껴안겼다.

“이거 이물 방에 가져다 놓으세요.”

“야, 네가 할 일 아니냐?”

“저는 오동 화로 청소해야 돼요. 아니면 신령님이 오동 화로 청소할래요?”

“장난해? 둘 다 네가 해. 나는 이미 충분히 일했어!”

이해자가 소리치자 작업대를 정리하던 이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해자 너는 이제 쉬어. 이물은 내가 가져다 놓을 테니까 여기 올려놔.”

“…이것만 갖다 놓으면 되죠? 오키오키.”

차마 이리에게 떠넘길 수 없었던 이해자가 이물 방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고객이 나가고도 30분을 더 일하고 나서야 정말로 대여점 업무가 끝났다.

셋은 정원의 정자에 모여 앉아 상수리나무를 구경했다.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건만 기어코 외투를 이리의 어깨에 걸치는 데에 성공한 도진이 말했다.

“따뜻한 차랑 약과 좀 가져올까요?”

“아니야. 언제 일어나야 할지 모르니까 그냥 있자.”

그들은 지금 상대가 미끼를 물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민아가 인터넷에 퇴마 영상 속 남자를 봤다고 목격담을 올렸고, 그 글에 ‘새신을신고’라는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민아는 그자에게 순순히 장소와 시간대를 알려줬다.

이해자는 현재 카페 CCTV에 연결된 상태로, 평범한 인간이든 혼령이든 누군가 CCTV에 접속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끼를 물면 바로 이리가 ‘통로’를 열어 상대가 있는 장소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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