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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46화 (46/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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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이리의 옆에서 두 팔을 뒤로 뻗으며 몸을 풀었다.

“자정이 지나서 접속할 생각인 걸까요. 음기가 가장 강한 시간대가 자정 이후라면서요.”

“그럴 수도 있지. 호기심을 잘 참는 녀석이네. 그런데 야, 나도 좀 으스스한데 겉옷 좀 갖다주라. 치사하게 선인님한테만 드리냐?”

“본인이 가져다 입으세요. 그러게 왜 그런 차림새를 하고 와 가지고.”

이해자는 남성체를 하든 여성체를 하든 대개 고운 한복을 차려입는데, 오늘은 백발에 민소매 야광 셔츠를 입은 껄렁껄렁한 양아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양팔에는 문신도 가득했다.

“악신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잖아. 기선제압용이지. 요즘 인간들은 상대 겁줄 때 이러고 다닌다며.”

“누가 그래요?”

“내 애인이.”

도진은 처음 이해자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나름 신묘한 능력을 지닌 신령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팔불출 신령이었다.

“옷 안 줄 거야?”

“본인이 가져다 입으라고요.”

“선인님, 선인님네 제자 너무 건방진 거 아닙니까? 이래서 왕 노릇 제대로 하겠어요?”

“날 찔러서 안 되니까 이제 내 스승님을 찌르겠다? 신령 노릇 제대로 못 하는 게 누구예요, 지금.”

“나는 선인님한테 말했는데 왜 네가 뭐라고 하냐.”

“스승님과 저는 한몸이니까요.”

이해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솔직히 꼬박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웃겨. 아직 기도식도 안 했으면서. 사제지간이 아니라 그냥 고용주와 고용인이지.”

틀린 말이 아니라 도진은 눈만 매섭게 뜰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제자가 궁지에 몰리자 스승이 입을 열었다.

“본격적인 적덕은 이제 시작했으니 금방 쌓을 수 있어. 가을이 지나기 전에는 기도식 할 거야.”

“글쎄요. 지금 딱 봤을 때는 진현계 입장료 내려면 100년은 더 수행해야 할 것 같은데요. 흠, 뭐, 화이팅.”

“이해자. 비아냥거리지 마.”

“비아냥이라뇨! 선인님은 요즘 너무 제자 편만 들어요! 서러워서 살겠나. 나도 내 편 부를까.”

이해자가 툴툴거렸다. 이리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 악신이랑 싸울 때 스승님이랑 이해자 님은 나서지 마세요. 제가 처리할 테니까. 솔직히 제가 덕이 조금 부족한 것뿐이지 도술은 이미 이해자 님 뛰어넘을걸요?”

절대 주눅 드는 법이 없는 도진이 오히려 이해자를 도발했다.

이해자는 이런 도발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일단은 침착했다.

“너 강림도령한테 처발렸다는 소문이 신령들 사이에 자자한데 무슨 헛소리냐.”

“도중에 스승님이 오셔서 대결이 갑자기 끝났단 말입니다. 제가 이겼을 수도 있어요. 끝까지 해봐야 아는 법이라구요. 그리고 이해자 님도 강림도령한테 몇 분 버티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렇게 생각해? 나도 꽤 강한 혼령이야. 그리고 나는 강림도령이랑 도술 대결을 벌일 생각 자체를 안 해요. 왜냐하면 나는 누구랑은 다르게 의젓하거든.”

“장난하나. 제가 지금까지 신령님들을 몇 분 만나 뵀는데, 그중에서 이해자 님이 제일 철이 없거든요.”

“뭐, 인마? 약사는? 약사보다 내가 철이 없어?”

“네. 완전요. 덕분에 나는 절대 이렇게 안 돼야지의 롤모델로 잘 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철없어 주세요.”

“야! 대결해! 한 판 떠!”

이해자가 결국 도발에 넘어갔다. 당장 도술을 펼칠 듯 흥분한 이해자와는 달리 도진은 뻔뻔하게 이리에게 달라붙었다.

“스승님, 춥지 않으세요? 겉옷 더 가져올까요?”

“…그만해. 둘 다. 정신 사나워.”

결국 이리가 미간을 좁힌 채 주의를 준 후에야 조용해졌다.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와서, 이해자가 말했다.

“만인사와 배리모스 말고도 또 악신이 있을까요?”

이아진이 받은 악신, 만인사.

통영 도깨비를 골탕먹인 악신, 배리모스.

현재 그들이 알고 있는 악신은 이 둘이었다.

“배리모스가 인터넷 접근을 막고 있는 거겠죠? 설마 악신이 또 있으면….”

“일단 더 있다는 가정하에 움직여야지. 음(陰)의 존재들은 자기 얘기를 하는 것들에게 끌리는 법이니까.”

유명한 괴담인 ‘귀신 얘기를 하면 귀신이 온다.’라는 말은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원혼이란 기본적으로 관심종자들이다. 관심이 필요해서 순순히 저승에 떠나지 않고 꾸역꾸역 이승에 남은 이들이 바로 원혼이었다.

새보르미 연구회라는 모임의 발단이 된 2년 전의 퇴마 영상.

그 영상 또한 관심을 원한 원혼 때문에 부득이하게 촬영한 것이었다.

2년 전, 염라대왕이 이리에게 골치 아픈 원혼의 회수를 의뢰해 왔다. 이리는 저승과 연관된 일은 꺼리는 편이기에 처음엔 거절했다. 그러나….

‘500년이나 수거를 못 하고 있네. 저승과 포도청 둘 다 따돌리고 돌아다니는 지독한 놈이야. 자네의 힘이 필요해. 계속 두면 중간계를 혼란에 빠뜨릴 텐데 그러면 자네도 곤란하지 않은가?’

염라대왕이 간곡하게 부탁해 오니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차라리 제령이라면 그냥 원혼을 찍어 누르면 그만이지만, 혼을 회수하려면 원혼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이리가 소원을 묻자 원혼은 답했다.

‘유명해지고 싶소. 실력 있는 퇴마사와 싸우면서 장렬하게 산화하며 모든 이들의 기억에 남고 싶소.’

이리는 귀신의 존재가 비과학이 되어 버린 현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원혼을 기억에 새겨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 얘기를 들은 도진이 아이디어를 냈다.

바로 인터넷에 연출을 섞어 스트리밍하는 것.

그렇게 퇴마 영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틈만 나면 귀신 얘기를 하는 새보르미 연구회 사람들은 원혼과 악신에게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사람들이겠네요.”

“그렇지…. 아.”

이리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누르자 방만하게 퍼져 있던 이해자와 도진이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선인님?”

“스승님! 어디 아프세요?”

“아니……. 업보가 크다 싶어서.”

스트리밍이 너무 대성공을 해서… 이제 업보로 돌아왔다.

퇴마사도 거의 사라지고, 귀신도 허무맹랑한 취급을 받는 이 시대에 굳이 신기하고 괴이한 영상을 바깥에 내 놓는 바람에 2년 전부터 원혼과 악신들이 급격하게 힘을 받으며 살판이 나서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저승과 포도청도 바빠지고, 배리모스인지 새보르미인지 하는 악신이 설쳐 대도 몰랐던 것이다.

염라대왕도 그런 부탁을 한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스승님. 우리 업보가 아니에요. 염라대왕이랑 포도대장의 업보죠. 지들이 지 할 일 제대로 못해서 스승님한테 부탁한 거잖아요. 정신 차리세요. 네?”

이리가 종잇장처럼 도진의 손길에 흔들렸다.

“허…. 스승님이 마른 종잇장이 되어 버렸어. 악신새끼들 가만 안 둬, 씨발.”

“우리 선인님을 이렇게 만들다니 용서할 수 없는 자식들! 만인사는 네가 맡아라. 배리모스는 내가 맡으마.”

“맡긴 맡겠는데 우리 선인님이란 표현 다신 쓰지 마요.”

“너는 지금이 질투할 때가-.”

이해자가 멈칫했다. 까만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접속했어요.”

허공을 보며 말하는 목소리에 이리도 마른 종잇장에서 만물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장소는?”

“서울에 있는 아파트네요.”

이해자가 주소를 읊었다.

이리가 정자에서 내려와 팔을 뻗었다. 통로를 만든 후 이리가 말했다.

“너희는 들어서자마자 악신이 도망가지 못하게 결계부터 만들어. 나를 보자마자 도망치려 할 확률이 높으니까.”

“예.”

“맡겨 두세요.”

든든한 대답을 들은 이리가 바로 통로로 넘어갔다.

도착한 곳은 평범한 집 안이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삼인방을 보고 주르륵 마시던 물을 뱉고 있었다.

“뭐, 뭐야. 무슨…. 씨발, 너넨 뭐야? 어디서 나타났어?”

“평범한 사람 같은데요?”

이리의 지시대로 결계부터 만들며 도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해자가 여기가 맞다고 조용히 덧붙였다.

이리는 집 안을 둘러보며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뭐냐고,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허공에서, 귀신이야 뭐야!”

“…….”

“씨발. 가까이 오지 마! 너 뭔데. 강도야? 정체가 뭐야!”

겁에 질린 남자를 가만히 보던 이리가 말했다.

“그 안에서 나오거라.”

그 순간 남자의 신형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축축하고 냄새나는 진회색의 물질이었다. 기름때 같기도 하고, 석유 같기도 한 그것이 남자의 몸에서 빠져나와 한 덩어리로 뭉쳐졌다.

-도망쳐라아아아아…….

그 ‘도망쳐라’는 이리 일행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이었다.

낮게 울며 뭉친 그것이 천장으로 솟아올랐으나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엔 바닥에 스며들려 했으나 바닥이 넘실거리더니 검은 덩어리를 퉤 뱉어냈다. 당황한 그것이 사방으로 몸을 튕겼지만 도진과 이해자가 힘을 합쳐 만든 결계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끄으으으…….

“악신… 이 아니네요. 원혼?”

악신이 아니면 원혼밖에 없는데 도진은 저것이 원혼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모습을 바로 해라.”

이리의 말에 검은 덩어리가 울룩불룩 솟더니 이윽고 한 형태를 취했다.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한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 형태였다.

원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전제가 입을 쩌어어억 벌렸다.

-너희는 누구냐아아아아…….

“누구냐고?”

도진이 되물었다.

“지금 누구냐고 했어? 지금… 스승님에게.”

도진이 눈을 끔뻑끔뻑하며 이리를 쳐다봤다. 이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너, 나를 모르는구나.”

-내가 당신을… 알아야 하는가아아아…….

검은 것은 이리와 눈을 마주치며 말하고 있었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진실로 모른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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