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47화 (4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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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을 몰라?’

‘이리 선인님을 모른다고?’

도진과 이해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존재는 ‘위아’ 단계에 진입한 순간부터 이리의 존재를 깨닫는다. 이 세상에 이리를 모르는 존재는 생령을 포함한 인간, 짐승과 초목, 사물 등 ‘뿌리’밖에 없다.

그러나 눈앞의 검은 덩어리는 분명 원혼 종류. 이리를 몰라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혹시 치매…? 아니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원혼일까요?”

도진이 이리의 옆에 서며 나름대로 추측을 했다. 이해자가 고개를 저었다.

“위아는 치매를 앓아도,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어떤 세뇌를 당해도 이리 선인의 존재를 잊지 않아.”

“그럼 대체 저건 뭔데요?”

“나야 모르지. 선인님께는 아시겠지.”

도진이 이리를 쳐다봤다. 이리는 무지한 두 사람에게 담담하게 답을 알려줬다.

“사역마.”

“사역마….”

이해자가 탄식하며 되뇌었다.

도진은 예전에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사역마 혹은 호문쿨루스. 퇴마사가 주술과 실험을 통해 만들어 낸 존재. 인간, 초목과 짐승, 사물이라는 뿌리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인위적으로 탄생한 위아.

“지금은 없어진 줄 알았는데.”

이해자가 사역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체를 몰랐을 때야 경계했지 한낱 인간 퇴마사가 부리는 사역마라는 사실을 안 지금은 겁먹기는커녕 여유를 되찾았다.

“사역마의 주인이 선인님에 대한 사실을 주입하지 않았다면 선인님을 모르는 게 당연하네요.”

이해자는 차갑게 비웃었다.

“너는 어디서 튀어나온 퇴마사냐? 요즘에는 퇴마사 가문도 명맥이 다 끊긴 줄 알았는데 사역마를 만들 정도면 제법 괜찮은 실력이네.”

-…….

“사역마의 주인은 이제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 앞에 무릎을 꿇거라.”

검은 인형은 고요하게 이해자를 내려다봤다. 관찰하는 듯했다. 이해자가 다시 한번 명령했으나 이행하지 않았다. 사역마의 시선이 도진과 이리를 훑었다.

“스승님, 뭔가 심상치 않은데요.”

도진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이리를 가리고 섰다. 뒤에서 이리가 기가 차다는 듯 도진을 가볍게 밀어냈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면 네가 내 뒤로 가야지.”

“제가 싸울게요. 스승님은 제자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세요.”

“확인은 하고 싶지만 싸울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이리의 표정과 말투에는 여유가 있어서 도진은 금방 다시 안도했다.

-선이이이이이이인…….

사역마가 이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물론 이리에게 닿기 전 이해자가 들고 온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없애 버렸다. 흩어진 검은 그림자가 다시 뭉쳐졌다.

사역마는 이해자에겐 관심을 두지 않고 이리만 바라봤다. 검은 몸체와는 대조적인 커다란 하얀 이빨과 붉은 혓바닥이 몹시 징그러웠다. 사역마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선인. 네가 선인인가? 왜 나는 선인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하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이리는 사역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사역마가 하는 말이 아니라 퇴마사가 하는 말임을 알았다.

“퇴마사. 너도 나를 모르는구나. 아무 교육을 받지 않은 것에 비해 큰 힘을 손에 넣었어. 악신이 준 힘인가?”

-악신…?

“배리모스.”

-배리모스….

“지금 너한테 붙은 귀신은 이곳에서 없어져야 할 악신이야. 죄 없는 도깨비들을 괴롭히고 도깨비방망이를 훔쳤지.”

-도깨비방망이….

“아오, 이 새끼. 뭐야? 지가 앵무새야?”

퇴마사가 이리의 말을 되풀이하기만 하자 도진이 폭발했다.

“너 말 똑바로 안 해? 어디 살아? 스승님, 이 사역마의 주인 놈을 추적하는 방법은 없어요? 그냥 확 제압해 버리면 주인이 안 끌려 나옵니까?”

“야, 조용히 해. 선인님이 알아서 하실 거, 으악.”

이해자가 도진의 입을 틀어막다가 도진에게 업어치기를 당했다. 고꾸라진 이해자의 등에 올라타 팔을 꾸깃하게 접어 제압한 채로 도진이 소리쳤다.

“스승님. 대화만 하실 거예요? 확, 그냥. 네? 확, 해 버리죠?”

“대화만 할 거야. 그리고 좀 조용히 하렴.”

“읍-!”

도진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들러붙었다. 이리의 금언령이었다. 답답해진 도진의 손힘이 약해지자 이해자가 낑낑거리며 빠져나왔다. 이해자는 도진을 보고서 대놓고 비웃었는데, 자기도 금언령에 당할까 봐 소리는 내지 않았다.

제자와 수하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이리와 퇴마사는 안정적으로 문답했다.

“도깨비방망이는 어디에 사용했지?”

-나는 도깨비방망이가 무엇인지 모른다….

“사역마를 부리는 방법은 누가 알려줬어?”

-친구….

“그 친구는 악신인가?”

-인간이다….

“그러면 배리모스는 네 친구에게 붙은 악신이겠구나.”

-나는 알지 못한다….

“통영 도깨비들에게 어째서 저주를 퍼뜨렸지?”

-…말할 수 없다.

“알려주지 못하는 게 많네.”

이리가 가까이 다가갔다. 읍, 읍! 도진이 당황하며 튀어 와 이리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사역마의 형체가 꿈실꿈실거리더니 점차 크기가 줄어들었다. 작아지고 작아지다 마침내는 손바닥만 한 종이가 되었다.

도진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종이를 낚아챘다. 종이는 오로석영지였고, 까만 색연필로 인간 형체가 그려져 있었다. 딱 사역마의 형태였다.

스승님이 사역마를 해치우신 건가, 하는데 종이가 흔들거렸다.

-그으으으…….

“읍!”

씨발, 깜짝이야. 아직 살아 있잖아.

도진이 종이를 손안에서 구기자 이리가 가져갔다. 이리는 종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네 이름을 말해.”

-밝힐 수 없다….

“네 친구의 이름은?”

-밝힐 수 없어….

“그자는 널 속이고 있어. 나쁜 사람이야. 네 친구가 아니야.”

-나도 알고 있… 그으으으…….

종이 속 그림이 괴로운 듯 신음했다. 저 ‘그으으으’의 의미를 도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

이리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퇴마사가 사역마의 입을 통해 다시 말했다.

-그들이 이곳에 왔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에 푸른 불이 붙었다.

“스승님!”

기겁한 도진이 급히 다가왔다. 도진이 종이를 낚아채려는 순간 푸른 불은 언제 타올랐다는 듯 다시 꺼졌다.

불을 제압한 이리가 평안한 얼굴로 종이를 손안에서 구겼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려 했구나.”

이리가 손을 다시 펼치자 종이는 온데간데없고 손가락만한 크기의 조그마한 암인(暗人)만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저 씨발 새끼가 감히 누구 다치게 하려고! 봐요. 화상 안 입었어요? 안 아파요?”

도진이 이리의 하얀 손을 붙잡고 주물럭거렸다.

“도진아, 너…. 아니,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이리는 사역마가 아니게 된 조그마한 위아를 도진에게 넘겼다. 자그마한 위아가 달달달 떨면서 도진의 손가락을 끌어안았다. 도진은 떨떠름 반, 걱정 반으로 이리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봤다.

이리는 왼손을 공중에 뻗어 무엇을 고르는 듯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몸 쪽으로 당기자 공간이 찢어지면서 사선으로 기다란 틈이 생겼다.

그 틈새로 방울과 깃발이 나뒹구는 신당과 사색이 된 채 주저앉은 무당이 보였다.

이아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악신 만인사가 빙의한 이아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경기를 일으키며 놀라더니 픽 쓰러졌다. 쓰러지는 이아진의 몸을 받아 드는 단단한 팔이 있었다. 남색 긴팔 셔츠를 입은 성인 남성. 그리고 그 옆에는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총 세 명.

사선으로 찢어진 틈이 넓지 않아서 보이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이아진은 무당이니, 퇴마사는 저 팔의 주인이거나 발의 주인이다. 받쳐 든 사람이 이아진의 남매인 이석진이라고 가정하면 저 낡은 운동화의 주인이 퇴마사인가…?

도진이 이리의 옆에서 가만히 그들을 노려봤다. 남자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리가 틈 안으로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스승……!”

도진이 말을 맺기도 전에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던 이리의 손이 다시 쑥 빠져나왔다.

이리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 한쪽이 들려 있었다.

남색 긴팔 셔츠. 이아진의 몸을 받아 들었던 그 팔이 맞았다. 도진이 급히 틈새를 돌아보자 그곳엔 아무도 없고 대신 신당 바닥에 핏물만 고여 있었다. 구석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멀리 피신하진 못한 것이다.

이리가 평소와 다르게 엄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죄 없는 이들에게 혼란을 퍼뜨렸다. 요물과 영물을 고통스러운 저주 속에서 숨을 잃게 했으며, 도깨비를 속이고 도깨비방망이를 훔쳤다. 죄의 대가로 네 팔과 사역마를 가져가겠다.”

이리가 들고 있던 팔을 푸른 불로 불태워 없앴다.

“다시는 저주로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해라. 다음번에는 네 목을 가져갈 것이니…….”

조금씩 닫혀 가는 틈을 보며 이리는 낮고 서늘하게 마지막 경고를 했다.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마침내 틈이 완전히 닫혔다.

“와, 씨…….”

도진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주저앉았다. 이해자는 이미 한참 전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스승님, 진짜…. 하…….”

진현계와 하계의 전쟁 때 하루 만에 전쟁을 끝내 버렸다는 이리 선인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실감한 도진이었다.

* * *

빙의되었던 사람은 새보르미 연구회 멤버로, 주술 글을 올리던 ‘익명’은 아니고, 영감도 영안도 없었다. 다만 악신이 빙의할 정도로 악랄한 인간임은 분명했다. 건강에 이상 없다는 걸 확인한 일행은 남자를 침대에 눕혀 두고 거실에 모였다. 이해자가 새보르미 연구회 사이트의 모든 것을 백업하는 동안은 여기에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스승님 말씀은 ‘뛰어난 영안과 영감을 타고났으나 이쪽 세계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이에게 악신 배리모스가 찾아왔고, 이자의 능력을 이용해 저주를 뿌리고 사역마를 만들었다.’ 이 뜻이죠?”

“확실하지는 않고… 추측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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