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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의 말투는 미련하다는 투였는데, 딴또리는 정반대로 해석한 듯했다.
“그, 그렇다. 내가 형이랑 누나들보다 엄청 큰데, 형이랑 누나들이 한글도 알려주고 벌레 잡는 방법도 알려주고, 우리 형이랑 누나들은 포동포동한 벌레를 완전 잘 잡는다! 근데 형이랑 누나들은 먹지 않고 나한테 다 준다…….”
“식성이 다른가?”
“형이랑 누나들은 이슬을 먹는댔는데, 그래서 나도 이슬을 먹어 보려고 했는데, 배가 하나도 안 차서, 형이랑 누나들이 도, 도토리랑, 산수유랑, 말린 곶감이랑, 인간들이 떨어뜨린 과자도 줬는데 하나도 배가 안 불렀다. 그래서 나는 형이랑 누나들이 아침에 이슬을 먹을 때 옆에서 아침에 일찍 일어난 벌레를 잡아먹는다!”
“역시 일찍 일어난 벌레는 일찍 잡아먹히는 법이지….”
도진이 부지런한 벌레를 애도했다.
이리는 옆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듣다가 창문을 막고 있는 신령에게 종이를 한 장 달라고 했다. 그는 빈 종이에 어딘가의 주소를 적어서 딴또리에게 건넸다.
“탈피 후에는 그 주소로 찾아가. 거기가 융의 서식지거든. 융이 먹어야 할 맛있는 것들을 잔뜩 먹을 수 있을 거야.”
“나, 난 버섯이 형이랑 누나들이 있는 곳에 돌아갈 거라서…. 다들 날 기다리고 있어서.”
“…그렇구나. 그래도 일단 이 쪽지는 가지고 있어.”
이리는 딴또리의 깃털을 쓰다듬어 주고 마저 원을 그렸다.
신령과 도진이 맡은 일을 마치고 방 밖으로 나가자 이리는 허리를 굽혀 방바닥에 손을 댔다. 그러자 소금 선의 바깥에 있는 바닥이 부풀어 올라 낮은 벽이 만들어졌다. 눈에 보이는 부분은 30cm의 벽이었으나, 도진이 밖에서 허공에 손을 갖다 대니 전체가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듯 들어갈 수 없었다.
햇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어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차단막이었다.
“허물을 벗는 데에는 15시간에서 20시간 걸릴 거야. 여물지 않은 딱지가 떨어져 나갈 때처럼 따끔따끔하겠지만 이 방 안을 나오지 말고 참아야 해. 손으로 벅벅 긁지도 말고. 피부가 흉져서 어른 융들이 꼭 이 점을 후회하더라고.”
“아, 알았다…….”
“어른 융이 되면 투명한 푸른색의 얇고 긴 꼬리가 생기고 몸은 날씬해질 거야. 눈 주위는 붉어지고, 부리와 발톱은 날카로워지며, 눈썹 끝이 세 갈래로 갈라져서 굉장히 멋있단다. 몸통의 깃털 색은 각자 다르게 변해서 예측할 수가 없어. 하여튼 멋있는 새가 될 텐데… 식성은 조금 달라져.”
“식성?”
“탈피하고 나면 본능적으로 알게 될 거야. 모쪼록 순조롭게 탈피하기를 바랄게.”
딴또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리는 미리 얘기하면 탈피에 지장이 있을까 봐 얘기하지 않았다. 혹여라도 탈피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이별을 각오하고 이 아이를 보냈을 음버섯이들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선인 하나, 장사 하나, 신령 하나, 그리고 잡귀 하나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이리는 본래 바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신령이 오랜만인데 대화를 좀 나누자며 붙잡았다.
신령은 씁쓸한 맛이 나는 차와 상대적으로 달콤한 약과를 대접했다. 그러나 약과에 손을 대는 이는 암인 말고는 없었다. 약과의 그림자를 손톱만큼 갉아먹은 암인은 도진의 앞쪽으로 기어와 꺼억 하며 드러누웠다. 나름 안전 구역을 찾은 것이다.
“모처럼 내려오셨는데 주무시고 가시지요. 저희 집은 처음 아니십니까?”
“잠은 집에서 자야지…. 내일 딴또리 허물 벗고 나오면 잘 챙겨 줘. 융 서식지까지 꼭 바래다주고.”
“네. 제게 맡기세요.”
도진이 암인의 불룩한 배를 쿡쿡 찌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융 서식지요? 딴또리는 음버섯이들한테 돌아간다고 했잖아요.”
“허물을 벗고 나면 계속 그곳에 살기는 힘들 거야. 요괴 융의 주식은 버섯 요물이거든.”
“아…….”
도진이 탄식했다. 그 바람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암인이 약과 그림자를 도로 내뱉어 버렸다.
“음버섯이들도 그 사실을 알기에 미루고 미루다가 5년째가 된 지금에야 얘기해 준 거겠지.”
“그런 거였군요….”
도진이 꽁꽁 닫힌 문을 바라봤다. 딴또리가 탈피 중인 방이었다.
“얘기 들어보면 어지간히 애지중지 키운 모양인데, 탈피하라고 보내며 무척 슬퍼했겠어요. 식성은 어떻게 의지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죠?”
“웬만한 의지력이 아니고서야 힘들어.”
“그럼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긴 하다는…….”
도진이 중얼거리다가 머리를 헝클였다.
어차피 요물인 음버섯이는 10년 살다가 죽을 테지만 요괴가 된 딴또리의 자연 수명은 수백 년에 달한다. 탈피하고 다시 음버섯이 군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최대 5년이 고작일 텐데, 그 5년을 위해서 식성을 바꿔야 할 필요는 없었다.
요물인 딴또리라면 모를까, 요괴가 된 딴또리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뻔했다.
“서로 사랑하는데 수명이 다르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에요.”
쓸쓸하게 읊조린 덕유산 신령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직까지도 어린 학생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신령이 모습을 바꿨다. 학창의를 걸친 노인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고는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품 안에 ‘샤먼’ 관련 온갖 물품이 들려 있었다. 도진이 엑, 이상한 소리를 냈다.
“뭐야. 거실에 있는 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저것뿐일 리가요. 저쪽 방을 아예 제 덕질 방으로 꾸며 놨지요.”
신령은 굿즈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하나하나 진열했다. 암인이 제 키만 한 키링을 보고서는 눈을 반짝이며 올라탔다.
도진은 이리의 등 뒤로 팔을 쭉 뻗었다.
“진짜 별의별 종류가 다 있네. 돈도 수백만 원 깨졌겠는데요. 산신령은 재산이 막… 많진 않잖아요. 노인 할인이라도 받았습니까?”
“다행히 덕유산에는 도토리가 풍족한 편이라 여유분의 도토리를 복지관에서 현찰로 바꿨습니다.”
“복지관 그 새끼들이 일을 하긴 하네요.”
덕을 인간 사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로 교환해 주는 환전 업무. 인간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살 곳을 잃은 이에게 주거지를 찾아 주는 주거 업무. 그 외에 위아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사소한 불편들을 해결해 주는 게 복지관의 업무다.
그러나 복지관을 모르는 위아들이 워낙 많은 탓에 죄다 대여점에 와서 이리에게 이거 해결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의뢰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위아에게 핸드폰을 만들어 주고 사용법을 알려 주는 것도 복지관이 해야 할 일인데, 위아들은 당연한 듯 이리에게 요구한다. 이리도 별말 없이 이해자를 통해 만들어 주고 설명까지 해 준다.
“복지관은 어땠어요? 고객 좀 많았습니까?”
“저밖에 없더라고요. 직원들도 다 놀러 나갔거나, TV 보면서 낄낄거리고 있고. 한쪽에서는 보드게임도 하고 있더군요.”
“아오, 씨. 열 받아….”
고객이 오지 않아도 달마다 따박따박 덕을 타가기 때문에 복지관을 홍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리의 신령들도, 도진도 불만이 쌓여 있었다.
“직원 중에 샤먼 팬이 있어서 덕토크도 했었죠.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아, 참.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덕질 할 때는 아까처럼 어린 모습을 취합니다. 그래야 요즘 아이들과 덕토크를 나눌 수 있거든요.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은 빙긋 웃고는 이리에게 특정 멤버를 본뜬 인형을 건넸다. 핑크색 머리에 눈꼬리가 올라간 예쁘장한 인형이었다.
“선인님도 이 아이 아시겠지요?”
도진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스승님이 걔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저도 모르는데. 스승님은 TV도 안 보고 노래도 안 듣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복지관 새끼들과는 달리 시간이 존나 없으시거든요. 샤먼이라는 것도 신령들 집에 포스터가 붙어 있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라구요.”
“알지. ‘요하’잖아.”
도진이 입을 쩍 벌리고 이리를 쳐다봤다.
“요하? 이 아이돌 이름이 요하라고요? 대체 스승님이 어떻게 아세요? 아이돌이고 배우고 전혀 관심 없는 분이잖아요! 이런 얼굴이 좋아요? 이렇게 요사스럽게 생긴 얼굴이? 저처럼 시원시원하고 부리부리한 얼굴이 더 낫지 않아요? 대체 이름을 어떻게 아냐구요. 빨리 대답해 봐요!”
“도진아. 이 아이는 여우 요괴야.”
“여우 요괴든 뭐든 왜 스승님이 아이돌한테 관심을…. 네?”
도진이 눈을 끔뻑였다.
“여우 요괴라니 무슨….”
“이 아이는 여우 요괴의 인간 둔갑이란다.”
“…….”
도진이 이번엔 입을 벌렸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선인님의 제자께선 한참 더 수행하셔야겠습니다…. 아직도 여우 요괴의 둔갑을 눈치채지 못하다니요.”
신령이 방금 전 도진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는 뜻이다.
도진은 ‘요하’라는 인물의 포토카드만 얼른 주워다 꼼꼼하게 훑어봤다.
“와…. 미쳤다. 알고 봐도 모르겠네요. 둔갑으로는 도깨비와 여우 요괴가 최고라더니 그냥 인간 같네.”
“여우 요괴가 들으면 섭섭할 소리입니다. 여우 요괴는 도구 없이도 한 바퀴 공중제비만 돌면 끝인 반면, 도깨비는 감투 없으면 어설픈 둔갑조차 못 하니까요.”
신령은 여우 요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도진은 신령의 태도가 고까웠으나 살면서 두 번째로 보는 여우 요괴에 대한 신기한 마음이 더 컸다. 포도청에서 봤던 여우 요괴는 스치면서 본 것에 불과하니 제대로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