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55화 (5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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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정인을 향한 연정도 아니고 고작 연예인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감정에 권속 능력까지 사용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신령들은 본래 덕질을 그렇게 무섭게 해요?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속담이 신령들 때문에 나왔나 봐요. 나 좋자고 하는 덕질에 너무 진지하다구요.”

올라오는 길에 도진은 아까 신령 앞에서 차마 못 한 말을 쏟아 냈다.

“그리고 뭐 팬심이 영원할 줄 아나. 하루아침에 돌아서기도 하는 게 팬인데 뭘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도진아.”

이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도 나중에 선인이 되어 권속 능력이 생기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그 말투는 아까 딴또리에게 탈피하고 나면 알게 될 거라고 말할 때와 비슷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

도진과 이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다정한 시선에 안심하면서도 도진은 어딘가 울컥했다.

“저는 바보가 아니라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억눌러야만 하니 얼마나 참기 힘들겠냐는 거잖아요.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자처럼 펭귄 한 마리 정도는 굶주림으로부터 구해 줄 수 있는데.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데, 자연의 일이니 간섭해서는 안 된다. 힘들지만 참아야 한다, 저 유혹으로부터 버티기가 힘들다 이 뜻이잖아요. 다 이해한다고요.”

“그래. 비슷하지. 잘 아는구나.”

“저는 제 가족한테 절대로 권속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부모님이랑 도희가 원한다면…….”

그러면… 권속해 줘도 되지 않나…?

도진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이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은 이리가 원하는 정답을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다’는 건 무서운 일이구나…….’

할 수 있는데도 참아야 한다는 건 정말 어렵고 무서운 일이다. 도진은 저보다, 산신령보다 훨씬 더 전지전능한 이리는 얼마나 많은 유혹을 뿌리치며 사는 걸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스승님이 감정 기복이 없어서 다행인 건가…….’

도진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리는 도진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았다.

용마는 빠르게 달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도진이 사는 아파트였다.

“아, 진짜!”

서운함이 최대치에 다다른 도진이 꽥 소리를 질렀다. 왜냐하면 내비게이션에는 분명히 대여점을 입력했기 때문에.

“너 왜 이쪽으로 와. 대여점으로 가야지!”

[(⊙_⊙;)]

용마는 선인에 종속된 존재라 이리의 뜻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알면서도 도진은 씩씩거렸다.

“너무 오래 집을 비우면 빈집인 줄 알고 도둑 들어.”

“오늘 도둑 들면 어떡해요? 오늘 빈집인 줄 알고 도둑 오면요?”

“그럼 네가 잘 붙잡아야지. 도둑을 붙잡아 경찰에 넘기면 덕도 상당히 많이 쌓이겠구나.”

“스승님은 가끔 너무 냉정해요.”

“미안. 이제 내려야지?”

도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앞주머니 안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암인이 냉큼 빠져나와 이리에게 향했다. 하지만 심통난 도진이 가만두지 않고 암인을 집어 들었다.

“너는 나랑 자.”

끼웅…….

“스승님.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일찍 갈게요.”

“응. 아, 맞다. 잠깐.”

이리가 붙잡자 도진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멈췄다. 이리는 서류 가방에서 백지를 꺼냈다. 오늘 마지막으로 찾아낸 이물이었다.

“아, 그게 있었죠.”

도진이 냉큼 문을 닫았다. 그는 운전석이 아니라 이리가 있는 뒷좌석으로 건너왔다. 몸이 워낙 커다래서 차체가 흔들렸다. 암인도 허둥지둥 이리에게 다시금 건너왔다.

“이건 어떤 이물일지 너무너무 궁금한데 우리 빨리 대여점에 가서 확인해요.”

“이건 예언장이야.”

“예언장…? 예고장 같은 건가요?”

이리가 종이를 도진에게 건네고, 잘 나오는 펜도 하나 꺼내서 줬다.

“이 흰 종이에 미래의 일 하나를 질문하면 답변이 달리는데, 답변은 질문한 사람만이 볼 수 있어.”

“…와.”

도진이 작게 감탄했다.

“진짜 위험한 이물이네요.”

“그렇지.”

이리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 이물에 바로 탐욕을 보이지 않고 ‘위험하다’라고 표현하는 게 기특했던 것이다.

“다행히 종이가 한 장이야. 딱 1회 분량.”

“한 번 쓰면 없어지는 거예요?”

“응. 가끔 이런 일회용 이물도 태어나더라고.”

도진은 이리와 제 손의 백지와 펜을 번갈아 봤다.

한 번 사용하면 없어지는 이물을 굳이 내 손에 쥐여 줬다는 건. 그것도 펜까지 함께 줬다는 건…….

“스승님. 제가 해석한 게 맞아요?”

“맞아.”

도진이 감격스러운 얼굴이 되더니 이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런 귀한 걸 제게 주시다니 스승님도 역시 절 좋아하고 계셨군요!”

“…스승으로서 좋아한단다.”

“스승님은 아마 자각하지 못하시는 걸 거예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으시니까요! 스승님도 절 사랑하신다구요!”

“그래. 제자인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제자의 힘이 워낙 강해서 목이 꺾일 것 같던 이리가 도진의 등을 툭툭 쳤다.

도진은 포옹을 푼 후에도 여전히 감격과 감동에 겨운 얼굴이었다.

“이거 구석탱이 작게 찢어서 아껴 쓸 수는 없어요?”

“안 돼…. 지금 바로 소진하고 가. 이물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돌아갈 거야.”

“지금 바로요?”

“응. 질문할 거리가 없어?”

“아뇨. 많죠.”

엄청 많다.

부모님과 도희는 언제쯤 죽는지. 내가 언제쯤 선인이 되는지. 결국 진현계의 왕이 되는지.

마침내 스승님과 연인이 되는지…….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은 마지막 질문이었으나 연인이 되지 못한다는 답변이 돌아오면 충격이 상당할 것 같아 쉽게 물을 수 없었다.

“답변은 어떻게 좀 구체적으로 오나요?”

“그것까진 모르겠어. 나도 이 이물이 처음이니까.”

“네….”

도진은 머리를 굴렸다.

‘미래의 일을 물으면 답변이 달린다고 했지.’

백지는 도진의 손바닥만 한 사이즈였다. 아주 작진 않다는 뜻이다. 답변이 O, X 한 글자이진 않을 것 같았다. O나 X 하나만 딱 도출하는 점괘는 없다. 분명히 무언가 조언을 덧붙일 것이다. 질문을 결정한 도진이 볼펜의 뒤를 달칵, 눌렀다.

“저 씁니다.”

“얼른 써. 무슨 질문을 할 거야?”

“그건 비밀이에요.”

도진이 지체 없이 써 내려 갔다.

스승님과 제가 연인이 되나요?

이리가 이마를 짚었다.

“한 번뿐인 기회에 이런 질문을 한다니…….”

이리의 탄식에 도진이 화들짝 눌렀다.

“뭐야! 본인 외에는 안 보인다면서요?”

“답변이 안 보이지. 질문은 보여.”

“아우, 씨. 부끄럽게.”

“새삼스럽네…….”

백지가 까맣게 물들어 갔다. 백지가 아니라 흑지(黑紙)라고 불러야 맞을 정도였다. 종이보다 무거운… 나무껍질 정도의 무게도 생겼다. 흑지에 하얀 글씨로 답변이 떠올랐다.

너는 언젠가 네 스승을 배신한다.

그럼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

“도진아, 뭐래?”

도진은 금방 검게 변해 가는 글자를 하나하나 다시 읽었다.

스승을 배신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첫 문장은 말도 안 되고 뭔가 섬뜩하지만, 뒷 문장은 원하는 바를 이룬다고 했다.

원하는 바를 이룬다고.

원하는 바. 그것은…….

“연인…!”

“도진아?”

이리가 설마, 하는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잠시 얼어붙었던 도진이 벌떡 일어나다가 차 천장에 부딪혀 다시 앉았다. 이제 완전히 까맣게 되어 쓸모없어진 종이는 냅다 버리고 아까처럼 와락 이리를 끌어안았다.

“스승님! 우리가 연인이 된대요.”

“도진아.”

“연인이 된대요! 진짜예요! 저는 적덕 중인 신분으로 거짓말을 안 한다구요.”

“너 눈빛이 뭔가 흔들렸는데.”

이리가 의심하자 도진이 이리의 양어깨를 붙잡고 거리를 조금 벌렸다.

붉은 기가 도는 눈이 이리의 새카만 눈동자를 직시했다.

“스승님과 제가 연인이 된대요.”

“……!”

이번엔 이리의 눈이 요동쳤다.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면서 말했으므로,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말도 안 돼’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내, 내가…….”

어지간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이리 선인이 말까지 더듬었다.

“내가 네 기저귀를 갈았는데…….”

“네. 그랬는데 우리가 연인이 된대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룬다고 써 있었단 말이죠. 아, 씨발. 이럴 줄 알았지만 확인받으니까 존나 날아갈 것 같다. 스승님. 스승님은 이미 저 좋아한다니까요? 그만 부정하세요. 이물도 확인했는데 뭘 그렇게 당황해하냐고요. 인정만 하면 된다니까요? 다 처음이 무섭지 한 번 받아들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도 안 돼….”

“저 지금 스승님 눈 똑바로 보고 말하고 있는 거 아시죠?”

도진은 섬뜩한 첫 문장은 생략해 버리고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전했다.

그 때문에 이리는 혼란에 빠졌다.

제자와 연인이 된다고? 내가?

이 귀엽기만 한… 어제 갓 태어난 애를… 내가 그런 의미의 마음을 품게 된다고?

내가 이 아이의 기저귀를 갈았는데…? 어떻게… 어떻게 내가 이 아이에게 연정을…….

도진의 왜곡 아닌 왜곡이 언제나 고요한 이리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지막 태고의 선인이 처음 겪는 혼란이었다.

10. 율도국

다르릉-

오동 화로에 불을 붙이던 이리는 전화벨 소리가 세 번째 울리는 걸 듣고 대여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뾰로통한 표정으로 이물 작업 중이던 도진과 눈이 마주쳤다. 이리가 전화 받으라고 손 표시를 했으나 도진은 흥, 하고 고개를 팽하니 돌릴 뿐이었다.

이리의 하나뿐인 제자는 벌써 나흘째 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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