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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62화 (6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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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장사의 본능’은 나보다 힘이 약하다고 느꼈는데 어째서 갑자기 괴력을 발산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사를 압도할 만한 괴력이라니. 이자가 장군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도진의 팔이 점점 뒤로 밀려났다. 이를 악물고 버텼으나 무리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이지만, 도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손등이 쿠션과 닿을락 말락 하는 그때…….

“도술을 사용하는 건 반칙이지, 염라.”

“……!”

어디선가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에 도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동시에 상대의 괴력이 사라졌다. 둘 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손을 푸는 바람에 시합이 결과를 내지 않고 끝나 버렸다.

관중의 웅성거림 속에서 도진은 무대 아래를 바라봤다.

이리 선인이 그곳에 있었다. 대여점에서와 같은 차림새로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그 옆에 흡혈귀도 쭈뼛쭈뼛 서 있었지만 도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으음…. 이리 선인…….”

장한이 낭패 가득한 탄식과 함께 이리의 이름을 불렀다.

대부분이 인간인지라 이리를 알아보지 못했던 율도국 국민들이 깜짝 놀랐다. ‘뭐? 이리 선인?’, ‘저 사람이 이리 선인이라고?’, ‘잠깐, 근데 염라라는 건 또 뭐야.’ 관중의 숙덕거림이 점점 커졌다.

무대는 관중석보다 1m는 높았다. 그런데 이리가 한 걸음 내딛자, 다음 순간 이리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선인이 제자의 옆으로 다가왔다.

“스승님…….”

도진이 울망울망한 얼굴로 이리를 쳐다봤다. 이리는 도진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고는 시선을 뗐다. 그의 시선은 심판에게 향했다.

“홍 왕, 자네도 심판으로서 개입했어야지. 그걸 보고만 있어?”

“아, 이런. 역시 들켰소?”

심판이 능청맞게 되묻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그를 제외한 다른 아홉 명의 삿갓 쓴 심판들은 밀짚 허수아비로 변했다.

심판이 삿갓을 벗어 던지자 짧은 하늘색 머리에 입술 끝에 흉터가 있는 호쾌한 미남이 나타났다.

“왕이시다!”

“홍길동 대왕!”

“대왕님!”

관중들이 이제까지 중 가장 크게 환호했다. 얼마나 컸는지 메아리로 돌아올 정도였다. 율도국에서 홍길동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했다.

“우선 대회부터 끝내고 얘기하지요.”

홍길동이 무대 앞으로 나섰다.

“안녕, 나의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마이크 같은 도구가 없음에도 일대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 대회는 1번 선수의 반칙으로 인한 실격패로, 최종 우승자는 201번 선수입니다.”

와아아아아! 이방인이 승리했음에도 관중은 크게 환호했다. 율도국 국민의 수명은 혼령 시기를 포함해 200세 남짓. 많아야 생애 두 번 겪는 팔씨름 대회를 그들 또한 진심으로 즐겼다.

“늘 그렇듯 시상은 비공개로 진행합니다. 그럼 우리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께서는 율도국의 영원한 남사당패, 활빈당의 무대를 보며 남은 시간을 즐기도록 하세요. 자자, 공무원들은 얼른 무대 정리하고.”

와아아! 활빈당! 활빈당!

스태프들이 무대 정리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홍길동이 자리를 이동하자고 고갯짓했다.

“염라, 너도 같이 가야지.”

“…같이 갈 생각이었네.”

몰래 도망치려고 했던 1번 선수가 시무룩하게 이리의 뒤를 따랐다.

* * *

일행은 홍길동을 따라 무대 뒤편으로 내려갔다. 일행이 조금 많았다. 이리와 도진, 흡혈귀, 1번 선수 장군신 염라대왕과 혼령 둘까지.

스태프들이 그들 근처를 알아서 피해 지나갔다. 홍길동이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찻집 가서 얘기 나눕시다. 율도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곳으로 안내하겠소.”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잘 시간이라 얼른 돌아가고 싶어.”

“나도 저승 일이 바빠서…….”

“그래, 어색한 사이다 이거지. 알겠소. 그럼 얼른 시상이나 하지.”

홍길동이 품에서 손가락만 한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에서 안이 보였는데, 정제된 알약 하나만 들어 있었다.

“승자는 나오거라.”

도진이 앞으로 나서자 홍길동이 유리병을 건넸다.

“축하한다. 실로 경이적인 육체 능력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알약이 바로 100년치의 덕인가 보다. 도진은 히죽거리며 염라대왕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염라대왕이 에잉, 하며 둔갑을 풀었다.

홍길동의 결계 안에서조차 유지했던 둔갑을 풀자 거대한 장한은 사라지고 인자하면서도 조금 피곤한 인상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장군신이니만큼 체격이 좋긴 했으나, 위압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거무죽죽한 눈 밑이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염려하게 했다.

“내가 좀 더 젊었다면 이겼을 거다, 아가야.”

“저 아가 아닙니다.”

“그래, 아가야. 아가라서 다행인 줄 알거라.”

“아가 아니라니까요? 제가 아가면 염라대왕께서는 아가한테 진 게 되는데 아가 취급을 하고 싶습니까?”

도진이 인상을 쓰자 이리가 진정하라고 팔을 톡톡 건드렸다. 홍길동이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염라께서는 그리 이기고 싶어서 까마득하게 어린 이에게 도술까지 사용했소?”

“자네도 못 본 체하지 않았나.”

“내가 막 중지하려던 참에 선인께서 끼어든 것이오.”

시치미 뚝 떼는 홍길동에게 이리가 말했다.

“길동아, 내 눈을 보고 다시 말할래?”

“그러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음, 선인께서 힘 좋은 제자를 뒀으니 대여점에 도움이 많이 되겠소.”

이리는 국민들 앞에서는 ‘홍 왕’이라고 높였으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낮췄다. 홍길동 또한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이리, 자네는 왜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 나왔는가. 어린 제자 홀로 두기 불안해서 따라 나왔는가?”

“어린 혼령 홀로 두기 불안했던 저승 대왕이 따라 나왔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나왔지.”

“대체 나를 뭐로 알고.”

염라대왕이 시무룩해졌다. 그때 내내 가만히 있던 혼령이 끼어들었다.

“대왕님은 좀, 참가하실 거였으면 진즉 말씀하시지. 왜 괜히 일호도 힘쓰게 만드세요?”

“나도 막판에 결정했다.”

“웃기지 마요. 1번 참가자면서.”

“크흠, 홍연아. 어른들 앞에서 무례하구나.”

“할 말 없으면 꼭 어른, 어른. 나중에 우리끼리 남으면 보자구요.”

“야, 야. 그만해.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대왕님 자존심 챙겨 드리는 게 저승 국룰이야.”

일호가 홍연을 말리며 하는 말도 퍽 무례했다.

도진은 일호와 홍연을 보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왕 후보라는 자도, 후보의 후견인도 왜 저리 당돌할까. 위아 세계는 도가적이면서도 유교적인 세계인데 말이야. 저런 혼령은 왕이 되어서는 안 돼.

방금 전 자신 또한 제법 무례했다는 사실을 잊은 도진이었다.

“네가 홍연이구나. 안녕.”

이리가 말을 걸자 홍연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인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제는 또 제법 예의가 발랐다. 홍연과 일호는 홍길동에게도 예의 있게 인사했다. 그저 염라대왕에게만 건방졌다. 마치 염라의 딸과 아들 같았다.

“더 얘기 나누고 싶지만 나는 알다시피 밤에는 잠을 자야 해서. 우리 고객도 여기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고 말이야. 이만 가야겠어.”

“이리 선인, 이렇게 치사한 자였소?”

“치사하다니?”

“그대의 제자가 강림도령과 대결을 펼친 데 이어 염라대왕까지 잡으면서 화려하게 이름을 날려 놓고는 쏙 빠지는데 그럼 이게 안 치사한 일이오?”

홍길동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고는 도진을 도발했다.

“어때, 나와도 대결을 펼쳐 이름을 날려 보겠느냐?”

“팔씨름이라면 좋습니다.”

이렇게 즉답할 줄 몰랐는지 홍길동이 오, 하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번 왕 후보들은 아주 기가 세고 사납군.”

“다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시무룩한 염라대왕이 고개를 저었다. 염라는 이리에게 물었다.

“현무의 왕 후보를 본 적 있는가?”

“아직 만나지 못했어.”

“나는 딱 한 번 봤는데 아주 작고 여린 아이더군. 작은 동물 같고…. 실제로 뿌리가 작은 동물이긴 하지.”

홍길동이 호기심을 보였다.

“뿌리가 무엇이오?”

“하늘다람쥐.”

홍길동은 가볍게 오호, 하고 말았으나 옆에서 혼령 둘이 화들짝 놀랐다. ‘존나 귀엽겠다.’, ‘미친, 개귀엽겠다.’ 다 들리게 속삭이는 둘을 반면교사 삼아 도진은 점잖고 의젓한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저 홍연이라는 후보보다 의젓하고 예의가 바르다. 기가 세고 사납지만 저렇게 가볍지는 않다. 나는 의젓하고 무게감이 있는 사람이다.

“조그만 녀석이 현무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게 귀엽긴 하다만 겁이 많아 보여서 걱정되더군. 현무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닐 것처럼 굴고 말이야.”

“그래?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네. 아무튼 우리는 이제 정말로 갈게.”

“우리도 이만 가야겠군.”

“멀리 안 나가겠소. 살펴 가시구려.”

홍길동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율도국의 대왕과 작별한 후 저승 일행들과 대여점 일행들은 나란히 하늘선에 올라탔다.

염라대왕과 이리 선인은 할 얘기가 있다며 한편에서 뭔가 어른스러운 대화를 했다. 그동안 혼령들과 도진, 흡혈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탐색전을 벌였다. 그러나 곧 상대적으로 젊은 청년들답게 금방 말을 트고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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