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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씨. 힘들게 약 얻어 갔다가 연인 얼굴 보자마자 화 풀려서 약 안 먹이는 건 아니에요?”
“저, 절대로요. 저는 이제 그 사람 사랑 안 해요. 오히려 약만 먹이고 영원히 떠날 거예요. 다시는 얼굴 안 볼 거라구요.”
“사람은 사랑에 미치면 별짓을 다 하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지.”
홍연이 어깨를 으쓱이자 일호가 곁눈질하더니 은근슬쩍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 너도 사랑에 미쳐서 별짓거리 한 적 있냐?”
“죽은 지 오래돼서 기억 안 나는데. 너는 있냐.”
“나, 나도 죽은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 안 남.”
도진은 왠지 둘 사이에 수상한 기류가 흐름을 느꼈다. 그러나 흡혈귀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두 분은 죽은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
“나는 50년. 일호는 300년.”
“와, 그럼 도진 씨가 여기서 가장 막내네요.”
도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닌데? 이 녀석이 젤 어려.”
도진은 소맷자락에서 암인을 꺼냈다.
끼우웅…….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잡귀가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싶어서 발버둥 쳤다.
“뭐야, 그 잡귀는 네 부하야?”
“…어. 내 부하야.”
거짓말로 인해 약간의 덕이 날아갔으나 이제 곧 100년 치의 덕을 얻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린데 벌써 부하도 있고 대단하네. 야, 너도 같은 왕 후보로서 분발해.”
“장난하냐? 이 녀석은 후견인이 이리 선인님이잖아. 나는 후견인이 한낱 저승차사 1호 따위고. 비교할 걸 비교해라, 엉?”
“아, 빡쳐…….”
일호는 빡치는데 할 말이 없어서 더 빡친 듯했다.
도진이 생각하기에도 저승차사 1호와 이리 선인을 비교하는 건 저승사자에게 가혹한 짓인 것 같았다.
나중에 그 이리 선인과 연인이 되면 아주 난리가 나겠지? 벌써부터 뿌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리랑 붙어 있고 싶어서 도진은 무리에서 슬쩍 빠져 어른 그룹으로 합류했다.
“이제 곧 백호의 장례가……. 음, 아가야. 어쩐 일이냐. 네 스승과 얘기 중인데.”
염라가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다 멈추고 도진에게 눈치를 보냈다. 그러나 도진은 꿋꿋하게 이리의 옆에 섰다.
“말씀 계속하세요. 저는 그냥 스승님이랑 같이 오색 바다 구경만 하면 되니까.”
이리가 옅게 웃고는 염라에게 이제 대화는 그만하자고 눈짓했다. 제자에게 항상 마음이 넓은 스승 덕분에 도진은 이리와 찬란한 오색 바다를 함께 구경할 수 있었다.
오색 바다에서 크게 도약하며 물 분수를 내뿜는 빙고래를 이리와 함께 구경하는 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황홀한 일이었다.
출입국장에 도착한 후 저승 일행과도 헤어지고 대여점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곧 해가 뜨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흡혈귀를 하루 더 재웠다가 보내기로 했다.
다음 날 저녁, 도진이 정성을 기울여 만든 ‘해혈제’를 제임스에게 건넸다.
“먹이는 즉시 바로 순도 100% 인간으로 돌아갈 거다. 괜히 마음 약해지지 말고 꼭 먹여.”
“걱정 마세요. 저는 단호하게 마음먹었으니까요.”
흡혈귀는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꾸벅꾸벅 인사하고 대여점을 떠났다.
그리고 또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밤 10시가 되었다.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도진과 이리는 정원에서 마주 보고 섰다. 도진은 작은 알약을 들고 있었다. 이 알약을 삼키면 100년치의 덕을 얻는다. 이리 선인에게는 대서양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도진에게는 지금껏 모은 덕의 80배 분량이었다.
“저 먹어요. 지금 먹을게요.”
“깨물지 말고 바로 목구멍으로 넘겨야 해.”
“네. 걱정 마세요.”
도진은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양제를 포함해서 알약을 먹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스승 앞에서 강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아주 여러 번 먹어 본 것처럼 여유로운 태도로 알약을 한 번에 삼켰다.
꿀꺽.
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도진은 심장에서부터 무언가 따뜻한 열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진이 양손을 불끈 주먹 쥐었다. 우어어어어어-!
“굉장한 힘이 용솟음 친다! 스승님, 이건 대체……!”
도진의 전신에서 오오라 같은 게 피어올랐다. 덕은 아무 형태도 없으니 현재 도진의 느낌이 무의식중에 표현된 것이다.
끼웅? 끼웅! 끼우우웅!
도진의 셔츠 앞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끼웅이가 식겁하면서 빠져나왔다.
“그래. 그 힘은 잘 갈무리해서 넣어 두렴.”
다행히 이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스승은 제자가 대견하면서도 귀여워서 빙긋 웃었다.
“스승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도진이 이리를 끌어안았다. 이리는 품에서 빠져나올까 하다가 기쁜 날임을 고려해 조용히 등을 다독였다.
“축하해, 도진아.”
이 일은 도진뿐만 아니라 위아 세계 전체에 있어서도 아주 묵직한 한 걸음이었다.
이리 선인의 제자가 이제 진현계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11. 휴일
진현계에 입성할 덕을 모았다고 바로 기도식을 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도식은 진현계의 시간 개념으로도 드물게 열리는 큰 행사라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윗사람들도 참석하는 게 관례. 이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먼저 날짜를 조율한 후 행사를 준비해야 했다.
“조율이 쉽지 않을 거야.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멀리 나비’용 오색 종이를 만드느라 새벽부터 오동 화로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도진에게 이리가 걱정스레 말했다.
연기 속에서도 두 눈을 또렷하게 뜬 도진이 뭐가 걱정이냐는 듯 능청을 떨었다.
“스승님도 참. 대단한 성격이라고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가 있는데 뭘 걱정하세요. 제가 연락 돌릴 테니 맡겨 두세요.”
“…뭐라고 쓸 건데?”
“저는 이리 선인님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정인이 될 김도진이라고 합니다. 오는 7월 중순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언약식을 열 예정입니다. 가능하시다면 참석하셔서 저희의 앞날을 축하해 주시길 바랍니다. 동봉된 종이에 언약식 참석 여부와 희망 날짜를 적어 보내 주세요. – 이리 선인의 유일한 정인 김도진 올림.”
“…….”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전부 뜯어고쳐야겠네…….
이리가 속으로 생각하며 자욱한 연기 속에 휩싸인 도진에게 다가갔다.
끼웅!
연기를 피해 이리에게 와 있던 끼웅이가 사사삭 몸을 기어내려가 대여점 안으로 들어갔다. 도진이 손을 내저었다.
“스승님, 오지 말고 거기서 말씀하세요. 연기 심해요.”
“이제 그쯤 부채질했으면 됐어. 불 끄고 뚜껑 열자.”
“네.”
도진이 뚜껑을 열고 이리가 집게로 종이 뭉치를 꺼냈다. 흑수 속에서는 시커멓던 것이 밖으로 꺼내자 오색 빛깔로 찬란하게 빛이 났다. 멀리 나비용 종이들이었다.
“이 정도 양이면 충분하겠네. 널어놓고 들어가자.”
“네!”
도진이 테이블에 한 장, 한 장 가지런히 펼치면서 장수를 세 보니 무려 500장이나 되었다.
“이렇게 많이 필요하다고요? 설마 진현계 모든 주민에게 보내려는 건 아니죠?”
“더 만들고 싶은데 한 번에 보관할 수 있는 양이 500장이라 이만큼 만든 거야. 선인이랑 장군신만 해도 412명이니까…….”
“와. 선인이나 장군이나 되기 어렵다더니 엄청 많…….”
도진이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취소했다.
“많진 않네요. 호모사피엔스의 출현 시기를 생각해 보면 진짜 적은 수예요.”
불로불사의 육체지만 스스로 영면에 드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기에 그런 이들까지 포함하면 수는 412명보다야 많겠지만. 인류 역사 전반으로 보면 없다시피 한 숫자였다.
“이 세상에는 임금님이 계신 진현계 말고도 네 개의 세력이 있다는 건 알지?”
“당연하죠. 저승, 극락, 하늘꽃밭, 천지천해. 여기에 중간계와 하계를 포함해 칠계라고 부르잖아요.”
“맞아. 저승에 몇 장의 초대장을 보내야 할까?”
갑작스런 테스트에 도진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암산했다.
염라대왕, 대별왕과 강림도령, 대별망 밑의 시왕(十王), 강림도령 밑의 월직·일직차사와 49차사.
“64장이요.”
“극락에는?”
옥황상제, 소별왕, 칠성신과 오방장군.
“14장.”
“거기에 대충 곱하기 3을 해. 오방장군과 칠성신 중에는 가족이 있는 애들도 있거든.”
“…….”
“하늘꽃밭이랑 천지천해도 마찬가지야. 그나마 마고할미와 바리공주는 가족이 없고, 박씨부인과 도화녀는 가족 구성원이 적지만 사신방과 십이신장은 각각이 대가문을 이루고 있으니까…….”
“앞으로 한동안 종이 공장을 연다 생각해야겠네요.”
도진이 이리가 차마 끝내지 못한 말을 이어받았다. 그는 그 많은 이들에게 연락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 딱히 불만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리와의 관계를 많은 사람 앞에서 선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쨌든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일손이 부족하면 보부상 형 부르면 되죠.”
“보부상도 요즘은 바빠서…….”
“그 형이 왜 바쁜…. 아, 임금님이랑 인간계 관광할 계획 짜느라 바쁜가? 그래서 요즘 뜸했군요.”
왕의 유일한 권속이자 친우인 보부상은 이리 선인의 친우이기도 해서 도진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아 온 이 중 하나였다. 도진이 가만 생각해 보니 올해 들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걔가 너한테 그 얘기까지 했어? 왕이랑 인간계 관광한다고.”
“네. 왕은 오래 일했다면서. 옆에서 인간계 관광이라도 강제로 시켜 주지 않으면 분명히 영면에 들려고 할 거래요.”
“보부상이 걱정이 많을 거야. 왕이 지금 번아웃이 심하거든.”
“스승님도 왕이 걱정스러워요?”
“걱정되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