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66화 (66/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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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외출 코스는 제가 알아둔 대로 해요. 스승님도 좋아하실 만한 코스로 준비했으니까.”

“종이를-”

“멀리 나비용 종이는 제가 오늘 밤새 만들어 놓을게요. 저는 스승님과 달리 하루 안 자도 전혀 문제없는 장사니까. 오늘은 저랑 밖에 나가요. 그럼 그렇게 정한 거예요. 땅땅땅. 끝.”

도진이 속사포처럼 말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정원으로 나간 그는 오동 화로 앞에서 정열적으로 부채질하며 불을 지폈다.

“…….”

이리는 성난 제자를 바라봤다.

끼웅이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가 끼웅이에게 손가락을 내밀자 끼웅이가 손가락 끝에 매달렸다.

“끼웅아.”

낑.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끼웅!

이 잡귀가 없었다면 제자와의 외출이 무척 어색했을 것 같았다.

도진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외출을 종용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귓불이 뜨거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도진도 요새 들어 데이트니, 혼인이니 사용하는 단어가 좀 더 강도 있어지긴 했다.

‘정말 도진이와 내가 정인이 된단 말인가.’

이물이 도진이의 막무가내 주장에 넘어간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해 보는 스승이었다.

* * *

“오늘도 고마웠소, 이리 선인. 항상 신세를 지고 있소.”

“뭘. 앞으로도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

“고맙소. 건강하시오.”

오늘의 마지막 고객이 대여점을 떠났다.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대문을 닫은 도진이 이리의 작은 등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자, 이제 옷 갈아입어요. 아, 뭐. 그 옷 입으셔도 상관없지만. 아무튼 외출 준비하고 10분 후에 여기서 봐요. 알았죠?”

“알았어.”

이리를 대여점까지 밀다시피 하고 데려온 도진이 곧장 2층으로 향했다. 이리도 2층으로 올라갔는데 도진의 방에서 뭔가 쿵쿵거리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대체 뭘 하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리가 방으로 들어갔다. 작업복을 입고 있었기에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이리의 옷장은 본래 단출했으나 지금은 도진이 학창 시절부터 대여점에 올 때마다 사 온 옷들로 가득했다. 이리가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실컷 타이른 후에야 도진은 소비를 멈췄다.

이리는 가진 옷 중 가장 현대 한국인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한복을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재해석한 옷인데 이것도 도진이 작년에 사 온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이리가 1층으로 내려갔다. 작업대 위에서 햇살을 쬐며 드러누워 있던 끼웅이를 상의 주머니에 잘 집어넣었다.

끼웅……?

“아니야. 계속 자.”

끼웅…….

끼웅이는 다행히 빠져나가지 않고 주머니 속에서 잠들었다.

잠시 후 도진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후후. 스승님. 후후. 후후후. 저 어때요? 후후.”

도진의 입꼬리가 연신 씰룩거렸다.

아이보리색 반팔셔츠에 검은 슬랙스, 오늘이 첫 개시일 게 분명한 까만 구두. 그리고…….

“후후후. 저 잘생겼죠?”

앞머리를 올려 잘생긴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냈다. 평소 머리를 내리고 다녔을 때보다 더 성숙하면서도 사나워 보이고 더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오늘은 굳이 도술을 펼치지 않아도 우리 주위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잘생겼어.”

“그렇죠? 저는 진짜 너무 잘생겼어요. 아까 거울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콧날도 높고, 턱도 반듯하고, 눈썹도 진하고.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어요. 스승님 미래의 정인이 이렇게 잘생겨서 좋으시겠다.”

이리가 깔끔하게 칭찬하자 도진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도진은 이리에게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자세로 팔뚝을 내밀었다. 이리는 당연히 팔뚝에 손을 얹어 주지 않고 그냥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먼저 밥부터 먹어야죠. 한국인은 밥입니다!’라는 도진의 말에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도진이 예약한 식당은 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기념일에 가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검색해서 찾은 게 분명했다.

“안녕하십니까. 김도진 님 되시지요? 말씀하신 대로 창가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직원이 정중하게 둘을 안내했다. 일요일 낮이라 사람이 많았기에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잘생겼지만 너무 크고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 때문에 시선은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

도진이 메뉴를 시키고 잠시 기다리자 식전 빵이 나왔다. 이리는 제 몫으로 나온 빵을 도진에게 넘겼다.

“스승님, 조금이라도 맛보세요. 여기 바게트가 맛있네요.”

“이 빵 먹으면 이따 배 차서 메인 요리 못 먹어.”

“스승님은 너무 소식하세요. 어쩔 수 없이 제가 먹어 드릴게요.”

이리는 비록 인간의 몸이지만 음식은 섭취하지 않아도 된다. 적당히 취침을 해야 하고, 선인으로서의 능력이 다소 제한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패널티가 없는 신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오늘처럼 사람들 앞에서 식사를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본래는 액체만 섭취해도 배가 불렀으나, 야금야금 식사를 하다 보니 식사량도 야금야금 늘어 지금은 정량의 절반 정도의 식사량은 되었다.

육류는 최대한 배제한 코스 요리라서 이리는 편하게 풀떼기를 우물우물 먹었다. 메인은 생선 요리였는데 도진이 간을 많이 하지 말라고 미리 주문했기에 이리의 입에도 잘 맞았다.

“스승님, 진짜 맛있죠. 우리 가끔은 이렇게 외식해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날 좋은 날 나와서 비싼 레스토랑에서 기분 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시간이 있으면 나도 그러고 싶어.”

“하. 빨리 알바생을 구해야 하는데.”

도진과 이리는 여전히 알바생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구인글을 올리고 있었다. 조회수는 나날이 늘어 가는데 연락해 오는 인간은 없었다.

“그냥 위아 알바생을 구할까?”

“저는 찬성이에요.”

“본래 반대하지 않았어?”

“네, 뭐. 위아들은 절 보고 하도 겁을 먹고 부리부리하니 어쩌니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니까 별로였는데. 우리가 당장 위아랑 인간 가릴 때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위아들 중에는 멀쩡한 녀석도 있긴 할 테니까.”

끼웅! 테이블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위아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도진이 피식 웃었다.

“너는 안 되지. 그래도 1m 정도는 크면 모를까.”

끼웅…….

“인간처럼 팔 두 개, 다리 두 개에 손가락, 발가락도 달린 녀석이면 좋겠네요. 불고양이나 몽두요 같은 녀석들보다는 복배바리나… 하여튼 사람으로요. 혼령도 괜찮고요.”

“혼령이라…….”

이리가 샐러드의 녹색 채소를 삼키고는 포크로 샐러드 그릇을 툭툭 두드렸다.

“…스승님?”

도진은 둘의 근처에 결계가 생긴 것을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둘의 대화를 바깥에 들리지 않게 하는 결계였다.

“왜 그러세요? 무슨 비밀 얘기하시게요? 드디어 저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고백을-.”

“도진아. 저기.”

“네?”

이리가 등 뒤를 가리키기에 도진이 의아해하며 뒤를 돌았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 2m 남짓의 칸막이가 있었는데, 그 칸막이 위로 구불구불한 까만 머리를 늘어뜨린 혼령이 매달려 있었다. 아니, 거의 원혼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원혼은 이리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한 듯하고 먹잇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미친……. 저건 절대로 알바생으로 못 쓰죠. 당장 제령해야죠!”

도진이 벌떡 일어났다. 그때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 원혼이 둘을 발견했다. 으스스하고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원혼의 얼굴이 얼어붙더니 얼른 근처에 있는 아무 몸에나 들어갔다.

“으윽.”

“자기. 왜 그래?”

“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섬찟해져서.”

도진이 검지로 허공에 원을 크게 그린 다음 그 원을 칸막이 쪽으로 날렸다. 그러자 칸막이로 막힌 반대편이 보였다.

원혼이 들어간 사람은 중년 남성이었고, 아내로 보이는 이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환장하겠네. 이제 어떡하죠?”

“맞는 몸이 아니라 얼마 못 버티고 빠져나올 거야.”

원혼이나 악신이 빙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음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원념과 한 등 어두운 감정이 강해야 하는데 저 중년인은 오히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었다. 원혼은 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빠져나올 텐데 다만, 그 시간 동안 중년인은 강한 음기로 인해 건강에 악영향이 있을 터였다.

“으음. 이상하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

“왜 아까는 덥다더니?”

“나도 모르겠어. 감기 기운이 있나.”

중년인이 벗어 뒀던 재킷을 걸쳤다. 걱정스레 보고 있던 아내가 후식은 생략하고 일어나자고 종용했다.

“도진아. 우리도 후식은 생략해야겠다.”

“아오, 씨. 네. 그래야죠.”

도진이 툴툴거리며 끼웅이를 데리고 일어났다. 제자가 계산하는 사이 이리는 중년 부부를 따라갔다.

호텔이 산과 가까워서인지 주차장에는 잔챙이 위아들 몇이 놀고 있었다. 평소라면 몰려드는 아이들을 안아 주고 귀여워해 줬을 테지만 지금은 원혼을 빼내는 게 급선무이므로 손바닥을 내저어 쫓아냈다.

“갑자기 무슨 일이래. 뭐 알러지는 아니겠지?”

“그냥 감기 기운 같아. 어제 잠도 못 잤고.”

“병원 가 볼까?”

“무슨 병원이야. 집에 가서 약 먹고 쉬면 낫는데.”

집에 가서 며칠간 약 먹고 쉬면 몸이야 낫긴 할 것이다. 길어야 세 시간이면 원혼이 튕겨져 나올 테니까. 다만 정신에 끼친 악영향은 인간의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

상처 났을 때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듯 정신이 상했을 때도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야 한다. 이때의 연고와 밴드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과 애틋한 마음. 둘째, 운동과 건전한 취미 생활을 통한 자가 회복.

그 외에는 특별한 약초를 푹 고아 먹는다든가 이물로 치유를 하는 방법이 있다.

콜록콜록, 남편이 기침까지 하자 아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운전할게. 뒤에 좀 누워 있어.”

“으음.”

남편이 군말 없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가 막 올라타려는 순간 이리가 둘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응? 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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