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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이리 만물 대여점’을 대여점이 아니라 ‘위아전용 종합서비스센터’라고 말하고는 한다. 대여점에서 본격적으로 일하면서부터는 그 생각에 더더욱 확신을 가졌다.
특정 이물이 필요하다고 찾아오는 위아는 절반 정도고, 이물은 됐고 이리 선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찾아오는 위아가 나머지 절반이니까…….
오랜만에 소개팅을 하기로 했는데 붉은 옷을 입을지 푸른 옷을 입을지 고민이다, 친구랑 내기를 했는데 심판 좀 봐 달라, 핸드폰 사용 방법을 모르겠으니 알려 줘라….
위아들은 별 터무니없는 것들까지 다 이리에게 해결해 달라며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그걸 이리는 다정하게 웃으며 다 받아준다.
‘네 소개팅 상대는 붉은색을 좋아하니 붉은 옷을 입으렴.’
‘나라도 괜찮으면 심판을 봐 줄 테니까 친구를 데리고 와.’
‘자,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화면이 변하지? 이게 터치라는 거야.’
이러고 있으니 도진의 속에서만 열불이 났다.
그런 종류를 위한 시설은 사실 따로 있었다.
복지관.
이리의 업무 과중을 염려해 진현계 임금님이 중간계에 세운 시설인데 만들어진 지 30년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많은 위아가 존재를 몰랐다.
“아예 홍보 자체를 안 하는 거라니까요. 자기들 일하기 싫어서! 이래서 혼령이나 인간 갈래 것들은 믿어서는 안 돼요!”
방금도 잡신 하나가 고민 상담을 빙자로 이리 선인과 마주 앉아 맛있는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갔다.
도진이 하도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리가 상담실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고, 고객이 대여점을 나가자마자 도진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나타났다.
“그 새끼들 지금도 탱자탱자 놀면서 아 여기 내려오길 잘했다, 그냥 누워만 있어도 매달 덕이 들어오는구나, 이리 종합서비스센터야 지금도 바쁘겠지만 뭐 상관없지, 위아들이 이리 선인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우리는 그냥 놀면서 덕이나 받자 이 지랄 하고 있을 거예요. 인간 갈래란 다 이런 족속이라고요!”
자기도 인간 갈래면서 인간에 대한 무척 편협한 발언에 이리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근거 없이 폄하하면 덕 날아가.”
“좀 날아가도 돼요. 저는 이 정도 덕 무서워서 할 말 못하고 참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어차피 기도식 열 정도의 덕만 보존하면 되잖아요?”
도진이 씩씩거렸다.
“그리고 씨발 모든 인간 혼령이 이러지는 않다는 거 알지만 적어도 복지관 새끼들은 죄다 이래요. 윗대가리부터 아래까지 전부 썩었어요!”
“근거 없이….”
“근거가 왜 없어요? 30년이나 홍보도 제대로 안 하고, 스승님 업무 과중인 거 뻔히 알면서도 조치가 없는데! 분담하려는 노력도 없고 연락도 안 하잖아요! 아악, 열 받아!”
도진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상수리나무에서 새순을 뜯어먹으며 놀고 있던 작은 동물들과 잔챙이들이 놀라며 흩어졌다. 도진의 셔츠 앞주머니에서 꿀잠을 자던 끼웅이가 놀라서 일어나 후다닥 이리에게 건너왔다.
“저는 진짜 열 받아요. 화병에 걸릴 것 같아요. 당장 복지관 쳐들어가서 뒤엎고 싶, 아이, 진짜. 스승님 이거 제가 할게요. 스승님은 차 마시면서 쉬세요.”
이리를 졸졸 따라다니며 포효하던 도진은 이리가 작업대 앞에 앉자 냉큼 그 옆에 앉았다. 작업대 위에는 장기 대여를 나갔다가 반납한 이물이 있었는데 172조각으로 분해해 놓은 상태로, 한 조각, 한 조각 정성 들여 닦아야 했다.
도진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와중에도 스승의 업무를 어떻게든 분담하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물론 입도 함께 움직였다.
“이리 만물 대여점에서는 이물 관련 업무만 해야 해요. 이물 관련이 아니면 이곳이 아니라 복지관으로 가라고 못 박아 놔야 한다고요. 솔직히 이물 업무만 해도 24시간이 부족하잖아요.”
“그래도 네가 와서 많은 도움이 됐어.”
“달콤한 칭찬으로 제 기분 전환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도진이 눈을 부릅떴다. 허가 찔린 이리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은 억울하지 않아요? 개인 생활도 없이 아침이고 밤이고 고객들 찡찡거림이나 받아 줘야 하는데.”
“음…. 애들도 내가 밤에 잠을 자야 하는 건 알아서 새벽에는 웬만하면 오지 않고.”
“스승님.”
도진은 손을 멈추고 이리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최근에 화내신 게 언제예요?”
“…….”
“진짜 분노하셨을 때 말이에요. 머리가 차가워지고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화가 났을 때. 아무리 마음 넓고 다정한 스승님이라도 살면서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고는 안 하시겠죠.”
제자의 물음에 이리가 눈꺼풀을 내리깔고 기억을 더듬었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화가 났을 때.
떠오르는 날이 하나 있었다.
딱히 제자에게 숨길 이유도 없는지라 이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납치 사건 때인가?”
그런 대답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도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납치라면…… 15년 전… 저 납치됐을 때요?”
“응.”
도진은 다섯 살 때 납치당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위아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었다.
도진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기업과 경쟁사가 외국 수출 건을 두고 싸우다가, 경쟁사 쪽에서 깡패를 시켜 도진을 납치했다.
도진은 이리를 만난 후로 성장 속도도 평범한 아이와 동일해져서 겉보기에는 그저 귀여운 다섯 살 아이였다. 게다가 그날은 힘 조절 수련을 겸해서 이리의 부적을 등에 붙인 상태였다. 부적이 아니었다면 납치 따위 당하는 일도 없었다.
애초에 그걸 ‘납치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깡패들이 선팅된 SUV 차량에 아이를 태우고 막 손발을 묶고 안대를 씌우려고 할 때 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차 문을 녹이면서.
어떤 신묘한 도술을 사용했는지 차 문을 순식간에 녹여 버린 이리가 깡패를 가만히 바라보자, 깡패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로프와 안대를 벗기고 아이를 조심스레 부축해 이리에게 넘겼다.
‘선인님…….’
‘응, 이제 괜찮아. 도진아.’
이리와 함께한 모든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도진은 그날 역시 곧장 그림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소 어리벙벙한 표정의 도진이 입을 열었다.
“그날… 스승님은 계속 다정하게 미소 짓고 계셨는데.”
“내가 그랬나?”
“네. 따뜻하게 미소 짓고 계셨어요. 그래서 스승님이 화가 나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절 안심하게 만들려고 티를 안 내신 거군요.”
“내 제자가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하니 아주 화가 나더라고. 그렇게 화가 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지.”
“스승님 그날 진짜 멋있었어요.”
도진이 헤실헤실 웃다가 갑자기 입매를 굳혔다.
“잠깐만요.”
“왜?”
“오랜만이라고 하면 그 전이 있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때는 누구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어요? 제 납치에 비견될 만큼이면 엄청나게 중요한 일 때문이었겠죠?”
도진의 생각의 가지는 가끔 이렇게 이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고는 했다.
어쨌든 이 질문에 대한 답변 또한 굳이 숨길 이유는 없는지라 솔직하게 대답했다.
“천 년 전, 진현계와 하계가 전쟁을 선포했을 때도 화가 났었어.”
그 당시 하계 족속들은 이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크고 작운 사건들을 끊임없이 저질렀다. 결국엔 전쟁까지 한다는데, 그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 진현계도 하계도 아닌 중간계였기 때문에 화가 많이 났었다.
이리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세상사에 잘 끼는 일이 없었는데, 그때는 전쟁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임금에게 아무런 언질 없이 바로 움직였다.
“맞아요. 그때 스승님이 찰마 공주의 직속 수하를 셋이나 죽였다고 했죠. 백룡, 흑룡, 그리고 감악산 신령. 맞죠?”
도진이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무용담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이름들은 어디서 들었어?”
“얼마 전에 이해자 님이 말해줬어요. 진현계로 따지면 흑룡은 염라대왕, 백룡은 옥황상제, 감악산 신령은 12신장급이었다던데 셋의 수급을 들고 오는 스승님을 보고 찰마 공주가 존나 기겁을 했겠어요. 저라도 당장 항복 선언합니다. 그 정도면 거의 뭐 반파된 상황인데 더 싸울 마음도 안 들 듯요.”
이리가 시선을 내리깔고 까만 실 팔찌를 만졌다. 도진은 이리를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해자 님도 스승님이 어떻게 해치우셨는지는 모르더라구요. 그때는 신령이 아니라 일개 혼령이었을 때라고. 어떻게 죽이셨어요? 이물 사용하셨어요? ‘복숭아 나뭇가지’나 ‘피웅도’?”
“우리 일이나 하자.”
“흠, 그래요. 말 돌리셔도 봐드릴게요.”
이리가 웬일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도진은 식용유를 부은 듯한 눈깔로 말했다.
“제 납치가 전쟁 선포에 비견할 정도로 화가 났었다는 거잖아요. 저는 그걸로도 만족해요.”
도진은 맹수가 사육사에게 애정을 표하듯 이리에게 어깨를 비비적거리며 친애의 감정을 표현했다.
“스승님 정말 좋아요. 진짜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제자로서.”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을 왜 덧붙이는진 모르겠지만 그 점까지 좋아하니까 됐어요.”
도진은 불같이 성질낼 때는 언제고 이제는 배부른 맹수처럼 포만감에 젖었다. 이리는 이런 식의 기분 전환을 의도한 건 아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다음 상담도 이물과 관련 없는 상담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리의 생각과는 달리 도진은 원래의 주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스승님.”
“응.”
“이렇게 다정한 스승님을 고생하게 만드는 복지관의 게으름뱅이들은 제가 해결할게요.”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데…….”
이리가 미간을 좁히며 도진을 바라봤다. 도진은 생글생글 웃었다.
“걱정 마세요. 사고는 안 쳐요. 그냥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