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일주일이 지났다.
따르릉- 전화가 울리고 마침 작업대 앞에 있던 이리가 막 수화기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전에 다른 손길이 수화기를 낚아챘다.
“네! 이리 만물 대여점입니다!”
정원에서 오동 화로를 보고 있다가 전화 소리에 전력을 다해 뛰어온 도진이었다.
“네, 직원 김도진입니다. 의뢰 내용은? ……아, 그래요. 그럼 딱히 이물이 필요해서 연락하신 건 아니네요? 음. 다음 주 주말로 예약 잡아놓겠습니다. 더 빨리는 무리입니다. …거짓말이라니요? 저 선인의 제자고 적덕 중인 신분입니다. 거짓말 못 해요. 네, 네. 그렇다니까요.”
도진은 통화를 하면서 이리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요 며칠간 도진은 2층에 있든, 정원에 있든, 심지어 대문 밖에 있든 전화가 울리면 전력 질주를 해서 이리보다 먼저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물이 필요한 의뢰가 아닌 경우에는 언뜻 정중한 말투지만 은근히 강압적으로 상담 날짜를 나중으로 미뤘으며, 그 상담 일정은 함께 사용하는 스케줄표가 아니라…….
“그럼 다음 주 토요일 세 시로 잡아놓습니다. 금저 고객님 이름이랑 연락처 남겨주시고요. 네, 네.”
품에서 따로 메모지를 꺼내 거기다 작성하고는 다시 품에 넣었다.
이리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말이다.
전부 다 다음 주, 혹은 다다음 주로 일정을 잡고 있는데…….
이리는 도진의 표현으로 ‘쓰잘데기없는’ 고객들을 한꺼번에 받아 한번에 빠르게 해결하려는 건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상담 날짜를 뒤로 잡긴 해도 고객을 거부하는 건 아니었고, 정말 급한 상담은 도진도 미루지 않고 융통성 있게 약속을 잡았기에 크게 터치하지 않은 채 며칠이 더 흘렀다.
아침 여섯 시쯤 잠에서 깬 이리는 옷을 갈아입고, 여느 때처럼 은은한 차향을 맡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스승님, 일어나셨어요.”
도진이 작업대 앞의 의자를 빼주며 인사했다. 이리가 앉자 도진은 자연스럽게 고풍스러운 찻잔에 차를 따랐다.
끼우웅…….
그 옆에서는 끼웅이가 미니어처 찻잔에 얼굴을 박고 졸고 있었다. 이리는 손가락으로 끼웅이를 꺼내 티슈로 얼굴을 살살 닦았다. 아침마다 있는 일이었다.
“애는 자게 놔두지 꼭 아침마다 데리고 나와야겠어?”
“그럼요.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축내는 놈이 퍼질러 자게 할 수는 없죠.”
도진이 입까지 벌리고 자는 끼웅이에게 손가락을 튕기려 하자 이리가 가로막았다.
“오늘 오전은 한가하니까 고객이 오면 그때 깨우든가 하자. 도진이 네가 이물이 필요하지 않는 의뢰들을 적절하게 뒤로 미룬 덕분에 이렇게 한가한 시간도 갖는구나.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알았어요. 넘어가 드릴게요.”
도진이 헤벌쭉 웃었다. 이리의 제자는 엄청 예민하지만 또 엄청 단순해서 한번 다루는 방법을 깨우치면 컨트롤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아, 아까 12신장한테서 ‘멀리 나비’ 답변이 왔어요. 7월 중순이면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다행이네. 그밖에는?”
“바리공주는 불참하게 됐으니 양해 바란다고 왔고…. 칠성신이랑 오방장군, 49차사는 전부 참석, 시왕 중에 진광대왕이랑 변성대왕, 평등대왕 제외하고 다 참석 확정했어요. 변성대왕이랑 평등대왕은 아직 모르겠고, 진광대왕은 8월 이후에나 가능하대요.”
이리와 도진은 7월 중순으로 기도식 날짜를 잡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임금님과 천지신명 넷은 이미 참석을 확정했고, 이제 직속 수하들과의 일정 조율도 마무리 단계였다.
“내일부터는 중간계에 사는 이들에게 연락을 돌리자. 산신령들과 전우치 등 아직 연락할 이들이 많이 남았어.”
“네. 저 잠깐 외출 좀 하고 돌아와서 열심히 종이 만들게요.”
“어디 나가게?”
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진은 이리가 시키지 않으면 혼자 외출하는 일이 없었다. 단 일 초라도 더 스승의 옆에 찰싹 달라붙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이리는 제가 까먹은 외부 업무가 있었는지 스케줄표까지 살폈지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후… 후… 후…….”
돌연 도진이 수상한 웃음을 짓고는 일어났다. 이리는 창고로 들어가는 도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도진은 서류철 다섯 개를 들고 왔다. 한 서류철에 스무 장 정도가 들어가니 딱 봐도 백 장이 넘었다.
“그게 뭐야?”
“우리가 일주일 동안 요청받은 ‘쓰잘데기없는’ 의뢰들입니다. 제가 요청서를 작성했죠.”
도진이 서류철을 작업대에 쾅, 내려놨다.
끼웅!
끼웅이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이리의 손가락을 베개 삼아 다시 잠을 청했다.
“그걸 가지고 뭐 하려고…? 불태우려고?”
“아뇨. 이 의뢰들을 처리해야 할 정당한 기관에 이관할 겁니다.”
“…복지관?”
“네!”
도진이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눈빛은 부리부리하게 번뜩였다.
“제가 해결하겠다고 했잖아요. 스승님은 그냥 여기서 제가 가지고 올 결과를 기다리시면 돼요. 제자가 담판을 짓고 올게요!”
도진은 의기양양해져서 가슴을 부풀리는 새처럼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턱을 얼마나 치켜들었는지 앉아 있는 이리에게 잘생긴 콧구멍이 보일 정도였다.
“…그래. 잘해 봐.”
이리는 제자를 말릴까 했지만, 이 기회에 복지관과도 인사를 해 두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 만약 말리면 나름대로 꽤 긴 시간을 계획해 온 도진이 삐질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 * *
복지관은 경남 하동군에 있다. 금오산 자락에 짓느냐, 시내에 짓느냐로 고민하다가 인간 사는 동네에 지었다. 가야산 동쪽 자그마한 공원에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여점과 마찬가지로 외관을 단독주택처럼 꾸며 놓은 복지관이 나온다.
도진은 근처의 유료주차장에 용마를 주차했다.
“인간 동네니까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차인 척해.”
[(∪.∪ )…zzz]
“그래. 차라리 자는 것도 좋고.”
도진이 차에서 내리자 선글라스를 낀 두 명의 청년이 다가왔다.
“이제 오냐?”
“일찍 오셨네요, 이해자 님.”
한 명은 하얀 머리에 문신 가득한 양팔을 드러낸 민소매 차림의 이해자였고, 다른 한 명은…….
“왔냐.”
“네, 학문가 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가자.”
“네.”
허리까지 오는 까만 생머리에 열심히 태닝한 듯한 구릿빛 피부. 눈 화장 진하게 하고, 보라색 립스틱을 바른 데다가 호피 무늬 옷까지 입은 이 여인이 바로 학문가였다.
학문가는 ‘붓’에서 귀물, 영물을 거쳐 신령이 되었는데, 사실 신물이 될 수도 있다. 신물은 신수와 버금가는 갈래로, 상당한 영예를 얻을 수 있었으나 제 덕의 일부를 포기하고, 아직 귀물에 머물러 있던 친우 벼루를 영물로 만들었다.
어떻게 이리의 신령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껄렁껄렁한 면과는 달리 아주 충직한 수하라서…… 이곳에 왔다.
도진은 어젯밤 이리를 제외하고 약사, 학문가, 이해자, 관조자와의 단챗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복지관의 오만방자한 꼬라지를 더는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 내일 결판을 지으러 갈 건데 동참하고 싶은 신령이 있으면 오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이해자
오?
이해자
이날만을
이해자
기다렸다
이해자
나는 참석 ㅇㅇ
약사
아ㅡㅡ 좀 일주일전에라도 말해주지ㅠ 내일 약속있어서 못감 ㅠ
학문가
나도 참석함
학문가
그자식들 조져버려
관조자님은요?
이해자
쟤는 안 가ㅋㅋㅋ 물어봐도 소용없어
네 그럼 내일 1시에 봅시다
그렇게 이리의 신령 둘과 이리의 제자 하나가 뭉쳤다.
끼웅…….
이리의 잡귀 하나도 함께.
“아니, 근데 둘 다 차림새가 왜 이래요? 이해자 님은 그렇다고 쳐도 학문가 님까지 옷이 무슨….”
“인터넷에 ‘강해 보이는 옷’ 검색하니까 나오던데.”
“둘 다 수준이 비슷하시네요.”
“오호. 오랜만에 만나서 대뜸 욕을 한다라.”
“이게 왜 욕이야! 야, 학문가. 그게 왜 욕인데!”
이해자가 발끈했지만, 학문가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그에 이해자는 더 흥분했다.
“그만 하세요. 저도 이간질 발언은 자제할게요. 오늘만큼은 모두 동지입니다.”
“하지만 저 자식이.”
“기억하세요, 이해자 님.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스승님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
“…그렇지. 모든 것은 이리 선인님을 위하여.”
“선인님을 위하여.”
도진이 손을 뻗었다. 이해자가 그 위를 덮고, 학문가가 그 위를 덮었다.
셋은 나직하고 결연하게 파이팅을 외친 후 복지관으로 향했다.
[복지관]
깔끔한 단독주택 앞에 도착한 셋은 또 흥분했다.
“와, 이 녀석들 현판도 존나 작게 만들어 놨어! 근처에 왔다가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일부러 이런 게 틀림없어. 나쁜 놈들!”
이리 만물 대여점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가로로도 세로로도 큼지막하게 간판을 달아 놨고, 밤에는 불빛도 나온다. 그런데 이 복지관 놈들은 가로 10cm, 세로 20cm 크기의 작은 현판만 달랑 초인종 위에 걸어 놓은 게 다였다.
도진은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촬영했다. 증거 수집을 철저히 한 후, 기도식 때 진현계 임금님을 대면하면 복지관 애들이 이렇게 방만하다며 일러바칠 생각이었다.
“충분히 찍었으면 벨 누르자. 업무 이관이라고 핑계 댄다고 했지?”
“아, 그전에 잠시만요.”
도진은 셔츠 앞 포켓을 톡톡 건드렸다.
“야, 김끼웅.”
끼웅?
“너는 고객인 척 잠입을 해야겠다.”
끼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