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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무작정 복지관에 들어갈 게 아니라 내게 먼저 제안을 했어야 했어.”
“스승님은 제 얘기 들어주시지 않을 거였잖아요. 그냥 위아들이 대여점이 편해서 습관적으로 여기 오는 것이고, 복지관도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모르는 거다- 하고 좋게좋게 넘어가셨을 거잖아요.”
어떻게 혼을 내든 이들이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므로 혼을 내기는 그른 상황이었다.
이리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아무 대화도 없이 시간이 조금 흐르자 당당하고 뻔뻔했던 셋도 점차 의기소침해졌다.
도진의 콧대가 한풀 꺾였을 때쯤 이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셋 다 고마워.”
“……네?”
“날 생각해서 나서 줬는데, 정작 나는 화만 내고 고맙다는 인사를 안 했네. 덕분에 앞으로 여유 시간이 많아질 것 같아. 다들 정말 고마워.”
“…….”
신령들의 표정이 울망울망해지고, 도진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에요, 스승님! 제가 스승님 허락 없이 함부로 나서서 죄송했어요!”
도진이 울컥하며 소리쳤다.
“선인님! 저희야말로 항상 선인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혹시 이 일로 선인님이 곤란해졌다면 저희가 직접 복지관에 사과하러 가겠습니다….”
“선인니임-!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건 저희예요. 어흐윽. 허락도 안 받고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저희에게 고맙다고…….”
끼웅…. 끼우웅…….
신령들과 끼웅이도 이리의 고맙다는 인사에 태세를 전환했다. 역시 뻣뻣한 나그네에게는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쫴야 하는 법이었다.
* * *
한풀 꺾인 신령들이 훌쩍이면서 대여점을 나가고, 이리와 도진은 둘만 남아 대여점의 뒷정리를 했다. 모처럼 생긴 저녁 시간에 도진이 또 사제지간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를 찾아와서 보자고 내밀었다. 아무래도 리스트가 있는 모양이었다.
영화를 다 보자 밤 열한 시쯤 되었는데, 도진은 집에 가라고 할까 봐 걱정돼서인지 빠르게 2층의 제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정작 이리는 집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웃을 뿐이었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나흘이 지나도록 이리는 도진을 아파트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도진은 이틀째까지는 기분이 좋았으나 사흘째부터는 조금 불안해졌고, 나흘째부터는 초조한 기분마저 들었다.
“스승님, 저 씻을게요.”
“응. 제발 옷 좀 입고 나오고.”
“…….”
닷새째 밤, 씻으러 간다던 도진이 2층 계단에 우뚝 멈춰 섰다. 작업대 앞의 이리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도진은 설렘보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저한테 집에 가라고 안 하세요?”
참지 않는 성격답게 직설적이었다. 이리는 이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장갑을 벗었다. 도진이 쿵쿵 계단을 내려와 이리의 앞에 앉았다.
‘어디 한번 얘기해 보세요.’라는 것처럼 팔짱을 끼는 제자에게 이리가 말했다.
“소 장군은….”
“…….”
의외의 첫 마디에 도진의 눈썹이 올라갔다.
“장사였을 때는 한량에 가까운 성격이었는데 장군신이 되면서 화가 많아졌다고 해.”
“…….”
“그는 현재 진현계의 장군신 중에서는 저승의 시왕과 극락의 오방장군 바로 다음 서열이야. 본래 저승은 대별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천지신명인 염라대왕이 태어나면서 저승의 왕에 올랐어. 이에 시왕 중 한 자리가 비자 당연히 그 자리에 소 장군을 올리려고 했지. 하지만 소 장군의 욱하는 성질 탓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어.”
도진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시왕 중 아홉이 장군신이니까 한 명쯤은 선인을 넣자는 주장이 나왔어. 본래부터 도술친화적이었던 염라는 소 장군과 화담 선인 중 화담 선인을 마지막 자리에 앉혔고.”
“소 장군이 열받았겠네요.”
“그렇지. 그래서 소 장군은 선인과는 싸우지 않으려고 해.”
도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오히려 싸움을 걸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소 장군은 자신이 굉장히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선인의 무기는 도술이고, 육체 능력은 형편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 반면 장군신은 도술에 대한 기본적인 저항력을 갖고 있거든.”
“마경의 악신들처럼요?”
“그래. 특히 소 장군은 도술에 대한 면역이 상당히 강하다고 해. 그는 선인을 상대하다가 욱한 나머지, 선인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히거나 죽여 버릴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야.”
“설마… 스승님한테도요?”
“소 장군은 나도 자신보다 약한 선인이라고 여기고 있어.”
“미친….”
도진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소 장군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의 한심함과 오만함에 소름이 끼쳐서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리 선인을 저보다 약하게 생각하다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은 바로 소 장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터였다.
“저는 솔직히 제가 오만한 성격이라는 거 인정하거든요? 하지만 소 장군처럼 어리석음에 빠질 만큼 오만하지는 않아요. 스승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지. 너는 그래도… 현실을 인식하는 편이지.”
“근데 그래서요? 그거랑 저를 집에 가서 자라고 하지 않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소 장군은 분명히 너를 노릴 거야.”
이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희가 복지관에 행패를 부렸는데도 그 행패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지 않잖아. 아마 자기 죄는 인정하지만 오만한 장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생각이 있을 거야. 신령들은 너무 약하니 건드리지 못하고, 대여점에는 선인인 내가 있으니 접근하지 못하고…. 반면 도진이, 너는.”
현재 위아 세계에는 김도진의 소문이 자자하다. 산도깨비와 씨름을 해서 이기고, 염라대왕과의 팔씨름도 꺾어 낸, 기도식을 앞둔 대여점의 어린 장사.
안 그래도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소 장군에게 싸워도 되는 적절한 이유까지 만들어줬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도진이 씨익 미소 지었다.
“소 장군이 제가 혼자 있을 때를 노릴 거라는 말씀이시죠.”
“맞아.”
소 장군은 ‘약한 선인’과의 싸움을 피하려다 보니 오히려 야비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세상의 통념에 따르기 위해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규칙을 포기하는 선인과는 달리, 장군신은 자신만의 확고한 규칙을 위해 세상의 통념과 윤리쯤은 가뿐히 무시하고는 했다.
“한 이틀 정도만 더 기다리면 소 장군도 아직은 싸울 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널 포기할 거야. 장군신이 아무리 화가 나도 일주일이나 일을 끌고 가지는 않거든.”
“이틀이라……. 그럼 이틀 후에는 절 대여점에서 내쫓으시겠네요.”
“자기 집에서 자라고 보내는 게 왜 내쫓는 거야….”
“그거나 그거나죠. 아무튼 어리고, 여리고, 약한 저는 이틀의 시한부 인생을 마음 놓고 즐길게요. 그 김에 스승님의 걱정도 좀 받으면서.”
도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이리에게 다가왔다. 이리가 앉은 의자를 빙글 돌린 도진은 의자 등받이 쪽으로 팔을 뻗고 상체를 숙였다.
“도진아.”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이리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또 왜 이러는데?”
“뭘요. 어리고 여리고 약한 제가 가까이 가는 게 두려우세요?”
“두렵냐니…….”
“어리고 여리고 약한 저한테 뽀뽀 한번 해 주시면 안 돼요?”
“…….”
“왜 못 하는데요? 저는 어리고 여리고 약하잖아요? 완전 품 안에서 우쭈쭈 보호해 줘야 하는 아기 취급을 하면서, 왜 뽀뽀는 못 해 주는데요? 선인이 왜 이렇게 일관적이지 못해요? 저를 아기 취급할 거면 뽀뽀까지 제대로 하시란 말이에요!”
이리는 도진이 약한 취급을 받아서 삐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상한 바였다.
이리는 도진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내고 의자 밑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도진의 다른 쪽 손이 바로 이리의 허리께로 뻗어왔다. 도진도 이리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한 것이다. 이리가 도진의 팔목을 찰싹, 때리려고 하자 도진은 당하는 척하면서 다시 허리를 붙잡으려 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 잠깐의 공방 후…….
“스승님 진짜 치사해요!”
“씻는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가서 씻으렴.”
어린 제자에게 스킨십의 기회를 주지 않은 무정한 스승이 유유자적하게 정원으로 나갔다.
“아오, 씨!”
열받은 도진의 눈에 작업대에서 하품하고 있는 끼웅이가 보였다.
“야, 너도 좀 씻어라!”
끼웅…!
도진이 끼웅이를 쥐고 쿵쿵 2층으로 올라갔다. 고래 싸움에 끼웅이만 터지는 나날이었다.
* * *
“도진아. 잠깐 진현계에 다녀올게.”
요 근래 이리는 기도식을 위해 진현계에 방문하는 날이 많았다. 아직도 일정을 조율해야 할 선인들이 백 명이 넘었다. 이렇게 조율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기도식을 한 번 열려면 적어도 1년 전부터 준비해야 했다. 다만 이리는 진현계와 중간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한 명이므로 1년이란 기간을 2, 3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다.
“네, 다녀오세요. 선인님의 몸은 제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끼웅!
“야, 넌 옆에서 처잘 거잖아. 꺼져.”
도진이 끼웅이를 손가락으로 튕기는 모습을 보고 이리는 웃으며 방에 들어갔다.
도진은 방문 틈으로 침대에 눕는 이리를 지켜봤다. 잠시 후 이리가 윗배에 두 손을 포갠 채 잠들었다. 아니, 사실은 잠든 게 아니다. 마치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혼만 진현계로 떠난 것이다. 도진이 홀린 듯이 다가갔다.
“스승님.”
“…….”
“스승님… 얼굴 말랑말랑해요.”
도진이 이리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긴 속눈썹과 어여쁜 입술 같은 걸 눈으로 잠시 훑다가 일어났다.
‘좋았어.’
이때를 기다린 도진이 얼른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대신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었다. 무릎과 손목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가죽 장갑을 낀 뒤 까만 마스크까지 착용하자 영락없는 깡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