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75화 (75/203)

75

끼웅?

1층으로 내려가는 도진을 끼웅이가 쫓아왔다. 도진은 끼웅이를 손가락으로 달랑 들어 올렸다.

“어딜 쫓아와. 너는 스승님 옆에서 잠이나 처자.”

끼웅!

“끼웅거리고 있네.”

도진이 끼웅이를 집어던졌다. 삐진 끼웅이는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도진은 기세등등하게 1층으로 내려가 주저하지 않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소 장군은 오늘이 지나가면 ‘김도진과의 결투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군’ 하고 포기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도진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스승님이 나를 걱정하는 건 좋지만 날 약하다고 여기는 건 싫어.’

이리 선인의 품 안에서 아기새처럼 보호받던 도진은 마침내 결정했다.

스승에게 자신이 어리고 약하지 않다는 걸, 그 강하다는 소 장군과 싸워서도 이길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기로.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이리 선인이 진현계에 떠났다. 지금이 아니면 강함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다.

쾅!

도진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여점의 대문을 열어젖혔다.

“…….”

소 장군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덤벼들지는 않았다.

도진은 대여점 대문을 잘 닫고 골목을 걸었다. 이른 저녁, 골목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없어졌기 때문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대여점 근처라 위아들도 많았다.

도진이 도착한 곳은 본래 공원이 될 예정이었다가 인간들의 여러 사정에 의해 높다란 바리게이트만 만들어진 채 수년간 공터로 유지 중인 곳이었다.

그는 주위에 결계를 치고 공터로 들어갔다.

해체되다 만 철근 구조물과 못이 박혀 있는 목재 기둥 등이 널려진 공터에서 몸을 풀고 있자…….

“으하하하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네놈과 싸울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 발로 나오는구나!”

퍼어엉!

오색구름과 함께 황금색 갑주를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거대한 덩치의 소 장군이 나타났다. 도진이 처음으로 본 장군신인 염라대왕은 딱히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피로한 직장인에 가까웠는데, 이 젊은 장군신은 기백이 대단하여 도진마저도 내심 감탄하게 했다.

우선 키가 2m가 훌쩍 넘고 옆으로도, 앞뒤로도 두툼했다. 도진의 커다란 체격을 작아 보이게 하는 덩치였다. 눈빛도 매우 부리부리하고 눈매도 사나웠으며, 입가에는 큰 흉도 있어서 더욱 위협적인 모양새였다.

그의 용마는 갈기는 물론이고 발굽마저 새하얀 색이었다. 이리는 소 장군의 용마가 진현계에서 가장 빠르다고 했다. 딱 봐도 늠름하고 꼿꼿한 모습이 명마임을 단번에 알려줬다.

“그래, 네놈도 나와 싸우고 싶더냐?”

“그쪽과 싸워 이기지 않으면 내 스승님이 나를 평생 어리고 약하게만 볼 거라서 말입니다.”

도진은 똑바로 시선을 맞부딪쳤다.

“미리 말해 두는데, 이 싸움의 결과는 우리 둘만 아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알릴 겁니다. 동의합니까?”

“하하하하하. 네놈이 이겼을 때만 알리거라. 너처럼 어린 장사와 대결해서 이겼다는 소문이 퍼지면 오히려 치욕이지!”

“뭐. 마음대로 하십쇼. 무슨 싸움 할까요? 씨름? 팔씨름? 닭싸움? 아니면 그냥 맨손 격투?”

“오만한 어린놈에게 본때를 보여주기에는 맨손 격투가 적당하겠군.”

“나도 원하는 바입니다.”

도진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소 장군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다음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도사와 선인이었다면 서로 자기소개도 좀 하고, 뒷짐 지고 산책도 좀 하고, 세상사에 대해 대화도 좀 나누다가 대결에 들어갔을 텐데 장사와 장군신의 싸움은 아주 화끈했다.

“흐압!”

“흐읍!”

소장군과 도진은 양손을 맞잡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둘의 발아래에서 땅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힘은 비등했으나 소 장군의 손이 도진의 손보다 두 마디 정도 많았기에 도진이 점점 꺾였다.

도진은 미끄러지는 듯하면서 발끝에 걸린 자갈에 내력을 실어 소 장군의 급소로 튕겼다. 소 장군이 허리를 숙여 갑주에 맞도록 유도하자, 그만큼 생긴 각도 차이를 이용해 도진이 무릎을 올렸다. 그러나 무릎에 턱을 맞기 직전, 소 장군이 손에서 힘을 빼고, 도진의 발목을 걷어찼다.

도진은 힘의 반작용에 의해 미끄러지다가 발목을 차이고 잠시 주춤한 듯싶었으나, 오히려 소 장군의 종아리를 한 손에 쥐고 그대로 들어 올려 뒤로 패대기쳤다.

쿵!

소 장군의 육중한 몸이 바닥에 추락하면서 굉음과 함께 모래 먼지를 만들어 냈다. 도진이 바로 빈틈을 노리며 주먹을 내질렀으나, 소 장군은 재빠르게 피하고 도진의 손목을 손날로 내리쳤다. 다른 쪽 손으로는 손바닥을 펼친 상태로 장풍을 날리듯 도진의 얼굴을 가격해 왔다. 도진은 뒤로 피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턱을 맞아주고, 대신 소 장군의 복부를 무릎으로 찍어 올렸다. 황금 갑주가 일그러졌다.

장사와 장군은 아무런 대화 없이 공방을 이어갔다. 도진은 방어보다는 공격에 더 적극적이었다. 자신이 먼저 턱을 맞았으나 소 장군의 턱에도 주먹을 꽂아 넣는 데에 성공했다. 대신 소 장군의 무릎에 복부를 맞아야 했다.

도진은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크게 도약해서 소 장군의 등 뒤에 올라타 목을 졸랐다. 소 장군은 제 허리를 조르는 도진의 발목을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은 채 뒤로 쿵! 하고 드러누웠다.

그러나 소 장군과 땅바닥 사이에 낑겨 괴로워하고 있어야 할 도진은 어느샌가 앞으로 다가와 비웃음을 날리며 주먹질하고 있었다. 소 장군은 이 어린 장사가 도술을 할 줄 아는 장사라는 걸 새삼 깨달으며 얼른 땅을 굴렀다.

땅바닥에 주먹을 꽂아 넣은 도진이 자세를 바로 하고 손등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며 다가왔다. 소 장군은 입꼬리를 올리며 공방을 이어 나갈 준비를 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싸움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도진이 흠칫 놀라며 소 장군의 뒤쪽을 쳐다봤다. 소 장군도 뒤를 돌았다.

암인을 어깨에 태운 이리 선인이 한심하단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진아. 싸움을 어떻게든 피하게 하려고 했던 내 노력을 이렇게 무색하게 만들어야 했어?”

“죄송해요, 스승님. 하지만 저는 스승님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는 걸-”

“소 장군도 그래. 불만이 있으면 우두머리 대 우두머리로 대화하면 될 걸 왜 어린 장사랑 힘겨루기를 하는 거야?”

소 장군이 갑주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삐뚜름히 말했다.

“그쪽 제자가 불만이 있으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직접 이야기했소. 그리고 나는 그대 같은 자와는 싸우고 싶지 않소. 내가 툭 치면 전신이 부러지게 생겼구려.”

두껍고 육중한 소 장군이 보기에 이리는 민들레 홀씨마냥 연약해 보이는 듯했다.

이리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아무튼 이제 싸움은 그만둬. 서로 한 대씩 주고받은 것 같은데….”

“이리 선인. 장사와 장군의 결투에 무승부란 없소이다.”

“그럼 소 장군, 네가 이긴 걸로 해.”

“왜요! 제가 이기고 있었거든요? 저 아직 힘 팔팔하거든요? 제가 더 타격 입혔거든요?”

“도진아. 이제 그만하고…….”

날뛰는 하룻강아지를 말리기 위해 어깨를 토닥이려던 이리가 문득 손을 멈췄다.

“…….”

“스승님?”

이리가 도진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선인은 팔을 뻗어 도진의 턱을 붙잡아 내렸다.

도진의 턱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붉은 피가 맺힌 생채기를 빤히 보던 이리가 돌연 뒤돌아섰다.

“소 장군. 내 제자의 얼굴에 상처를 냈구나.”

“이리 선인, 그것이 바로 장사 간의 싸움이오. 내 얼굴에 난 상처는 보이지 않는가? 이제 방해하지 말고 물러서시오. 약한 자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소.”

소 장군이 얼굴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리자 이리는 고요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더냐….”

“선인은 도술을 제외하면 내세울 게 없는 형편없는 것들이고, 나는 도술에는 면역이 있는데 어찌 그대가 약하게 보이지 않겠소?”

“그래. 네가 타고난 도술 면역이 어느 정도인지 나도 궁금하구나.”

뭐라고 말하려던 소 장군이 멈칫했다. 온몸에 느껴지는 위화감 탓이었다. 소 장군은 흔들리는 눈으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두툼한 손바닥의 살집이 사라지며 주름살이 생기고 있었다. 꼿꼿했던 등줄기가 갈대처럼 구부러졌다.

그의 자랑이던 수염은 희게 물들더니 듬성듬성 빠져나가 못난 모습이 되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무릎이 시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거운 갑주에 뼈가 짓눌려 갑주를 힘겹게 벗다가 손등과 팔목에 검버섯을 발견했다.

그는 나이 들고 있었다.

급속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소 장군이 덜덜 떨며 무릎을 꿇자 근처에 세워 놓았던 용마가 히히힝,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진현계의 으뜸가는 명마가 소 장군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을 주둥이로 가볍게 부딪치다가 이리에게 타박타박 걸어왔다.

히이잉.

백마는 애교를 부리듯 이리의 늘어뜨린 팔에 제 갈기를 스치고, 손등을 핥았다. 이리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알았어.”

그 말과 동시에 소 장군의 육체가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소 장군은 무릎 꿇은 채 제 육신의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태산 같은 덩치에 두툼한 손,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

모든 것이 제대로 있었다. 백마가 히잉, 울며 얼른 그에게로 가 얼굴을 핥았다.

“하하하…….”

소 장군이 허탈하게 웃었다.

“믿을 수 없군……. 이런 게 도술이었나?”

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