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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76화 (76/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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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장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용마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용마가 그제야 안심한 듯 발굽을 탁, 탁 굴렀다.

다시 갑주를 잘 여민 소 장군은 심적으로는 큰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그대의 제자는 나와 호각으로 다퉜소. 제자를 감싸지만 말고 풀어 준다면 훌륭한 장군이 될 것이오.”

“도진이는 장군이 아니라 선인이 될 거라서 말이야.”

“무척 아쉬운 일이군. 안 그래도 장군신이 부족하건만.”

“소 장군.”

“말씀하시오.”

“앞으로 복지관 관리자로서 제대로 일하는지 지켜보겠어.”

“…그동안은 미안하게 됐소. 그러나 걱정 마시오. 우리도 천년만년 덕을 축낼 생각은 없었소이다.”

소 장군이 고개를 꾸벅했다. 이리도 마주 인사했다. 소 장군은 용마에 올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소 장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리가 뒤돌아섰다.

도진은 입을 헤 벌린 채 이리를 감상하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스, 스승님.”

“도진아. 돌아가면 상처부터 치료하자.”

“네, 네…!”

사실 피도 이미 멎었고 치료할 구석도 없었지만, 도진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후다닥 걸어와 이리의 곁에 나란히 서자 이리의 어깨에서 호달달 떨고 있던 끼웅이가 도진에게 건너왔다. 그만큼 조금 전 이리 선인의 모습이 무서웠다는 뜻이었다.

도진은 발걸음이 너무 신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이리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자꾸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

그렇다. 방금 이리 선인은 화를 냈다. 분노했다!

그 분노의 이유가 바로 제 몸에 난 작은 상처 하나 때문이다!

도진은 굉장히 기분 좋았다. 자칫 웃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웃음을 참는데 이리가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다.

“아, 그.”

도진은 아무 말이나 했다.

“소 장군의 용마 말이에요. 그딴 놈한테 붙어 있기엔 너무 명마예요.”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 어떤 점을 본 거겠지.”

“그, 그런 걸까요. 참… 용마가 제 주인 구하겠다고 스승님께 막 애교를 부리는데 정말이지.”

도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손으로 가렸으나 손 틈으로 다 보였다. 이미 눈매 또한 휘어져 있었다.

이리는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도진아.”

“네……. 스승님.”

“돌아가면 오랜만에 체벌을 좀 해야겠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렴.”

“…….”

도진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는 겁먹어 떨고 있는 끼웅이보다 더 덜덜 떨면서, 작지만 누구보다 무서운 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13. 주워 담을 수 없는 것

제발 비를 내리시옵소서.

저희는 죽어 가고 있사옵니다.

아무것도 먹을 게 없습니다.

저희는 굶주려 죽어 갑니다.

제발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비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가 지상 위 모든 생명의 목숨을 좌우했던 시기. 가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이면 사람들은 신에게 찾아가 발치에 엎드려 빌었다.

제발 비를 내려 달라고.

그럼에도 비가 내리지 않자 한 인간의 왕은 죽어 가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죽어 하늘에 올라간다면 반드시 비를 내리겠노라.’

왕은 이튿날 승하했는데, 정말 그의 말대로 온종일 비가 내렸다.

그 후로도 매해 왕이 죽은 날인 음력 5월 10일에는 반드시 비가 내린다. 이 왕의 이름이 태종이라,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한다.

“저도 들어본 적 있어요. 태종우. 드라마에서 봤어요. 그런데 그게 왜요?”

도진은 탁상달력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음력 5월 10일은 바로 어제였다.

“어제 비도 제대로 왔잖아요.”

“부산 기장 인근에 죽통화인(竹筒花人)이라는 자그마한 요괴들이 있어. 이들은 작은 대나무 통 안에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받아서 몸을 담근 채 살아가는데, 그렇게 1년이 지나 태종우가 내릴 시기가 오면 새 대나무 통에 빗물을 받고 그곳으로 이사를 하거든.”

“아, 네. 위아 대사전에서 본 기억 나요. 그 헌 대나무 통에 들어 있는 물이 죽은 화초도 살린다고. 동물이나 인간한테는 효과가 없고, 오직 식물한테만 통하는 명약이라고요.”

“맞아. 잘 기억하네.”

“…설마 태종우 받는 걸 실패했대요?”

“다행히 그건 아니야. 1년간 몸을 담그고 살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잘 받았대.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까 그게 없어졌다는 거야.”

“허, 어떤 도둑 새끼가.”

도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언제 봐도 표정 변화가 다이내믹한 제자였다.

“그런데 도둑이면 포도청에 가야지 왜 우리한테 와요?”

“포도청에도 말해 놨대. 근데 포도청에서는 도둑은 잡아 줘도 새 태종우는 만들어 줄 수 없으니까.”

“아하….”

어제 내린 비를 다시 만들어 주는 것.

이건 포도청도, 복지관도 아닌 이리의 업무가 맞았다.

“이물 관련이면 해야죠. 그럼 기장에는 언제 내려갈까요?”

도진이 펜의 뒤를 딸깍 눌러 메모할 준비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리와 부산의 유명한 관광명소는 죄다 구경하고 기회가 되면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올 계획을 짜고 있었다.

복지관이 요새 적극적으로 업무를 분담해 가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빼곡한 스케줄표를 보며 이리가 말했다.

“일단 토요일 오전으로 잡아 놓자.”

“네엡. 일정은 제가 전화해서 안내할게요.”

“그동안은 일단 헌 대나무 통에 있으라고 해.”

“네.”

도진이 막 수화기에 손을 뻗는 찰나 따르르릉- 벨이 울렸다.

끼웅웅!

끼웅이가 펄쩍 놀라며 도진의 셔츠 앞주머니에 숨어들었다.

“이 녀석은 갈수록 간덩이가 더 작아지나…. 네, 이리 만물 대여점입니다.”

-안녕…. 이상한 일이 생겨서 전화했어….

“말씀하세요.”

-화단에 꽃이 피지 않았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장난해? 고작 꽃이 피지 않았다고 대여점에 전화를 한다고?

순간 도진은 전화를 끊을 뻔했다. 그러나 이리가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참았다.

“화단에 꽃이 피지 않아서 꽃 피게 하는 이물을 찾으시는 건가요?”

-…이리 선인께 전달 부탁할게. 이 화단의 이름은 태고화야.

그때 이리가 전화기의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태고화에 꽃이 피지 않았다고?”

-아, 이리 선인.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응, 안녕.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해 봐.”

-말 그대로입니다. 태고화는 800년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3월, 늦어도 5월이면 꽃이 피었는데, 올해는… 지금이 6월 9일이죠?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더 기다려 볼까 하다가 전화 드리는 겁니다.

“근처에 다른 야생화들은 피었어?”

-평범하게 피었어요.

“이상한 일이네…. 내일 오후에 그곳으로 갈게.”

옆에서 도진이 깜짝 놀랐다. 바로 내일 가겠다는 건 죽통화인 건보다 더 심각하다는 의미기 때문이었다.

-역시 선인께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일이죠? 전화하길 잘했네요.

“혹시 다른 화단에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말해 줘.”

-네, 그럴게요. 아, 선인님. 이번에 기도식에 불참하는 점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가 여름에 일이 많은데 하필 여름에 하게 되어 내가 더 미안한걸.”

-그런 말씀 마세요. 기도식 선물을 사 놓았는데 내일 만나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전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리에게 도진이 바로 물었다.

“태고화가 어떤 화단인데요?”

이리는 스케줄표의 내일 날짜에 ‘물부리산 태고화’를 적어 넣으며 대답했다.

“아주 오랜 옛날, 어떤 나라에서는 기우제처럼 기화제(祈花祭)라는 걸 지냈었어. 제발 꽃이 피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비는 제사였지.”

어떤 의미에서는 기우제나 마찬가지였다. 충분한 빗물이 내리고, 충분한 햇살이 내려야 꽃이 피는 법이니까. 결국에는, 우리가 농사짓기 좋은 날씨가 되게 해 달라는 의미에서 제사를 지낸 것이다.

“왕은 죽어가면서 유언을 남겼어. 만약 내가 죽어 신이 된다면 반드시 봄마다 꽃을 피우겠다. 왕이 죽자 시신은 흙이 되고 그 자리에 꽃들이 피었어.”

“그 꽃이 바로 ‘태고화’로군요.”

“맞아. 꽃 이름이기도 하고, 꽃이 피는 화단 이름이기도 해. 후대 임금이 경북 금위군 물부리산 봉우리로 화단을 옮겼어. 태고화는 혼을 담을 수 있는 꽃이기 때문에 지금은 하늘꽃밭에서 화단을 관리하고 있지.”

“그럼 태고화가 혼꽃 중 하나였군요.”

새로운 혼이 만들어지는 혼꽃은 하늘꽃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중간계에도 곳곳에 심겨 있다. 주로 산 깊은 곳에 있는데, 꽃 관리는 하늘꽃밭에서 전담하기 때문에 이리도 위치를 전부 아는 건 아니었다.

“전화한 사람은 바리공주였어. 앞으로 종종 통화하게 될지도 모르니 목소리를 기억해둬.”

“아…… 네.”

하늘꽃밭.

도진은 설명으로만 들었는데, 너른 꽃밭이 펼쳐져 있는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라고 했다. 꽃들 하나하나가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기에 굉장히 아름답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저승, 극락, 천지천해는 한적하다기보다는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이다. 일하는 사람도 많고, 머무르는 사람도 많고, 잠시 방문하는 사람도 많고…. 조용하다기보다는 시끌벅적한 도시와 같다. 다만, 다섯 세력 중 유일하게 마고가 다스리는 하늘꽃밭만은 한가하고 고요하다.

저승에는 시왕과 49차사, 극락에는 칠성신에 오방장군, 천지천해에는 12신장 등 고위직 관리자도 많은 반면 하늘꽃밭에는 마고할미 아래 박씨부인, 바리공주, 도화녀와 비형랑, 넷뿐.

박씨부인은 하늘꽃밭을 지키고, 도화녀와 비형랑은 꽃들을 관리하며, 바리공주는 꽃들의 혼을 혼이 필요한 빈 육신에 넣어준다. 이리와 마찬가지로 중간계와 진현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바리공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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