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78화 (7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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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잉…. 끼웅, 낑…….

“이 새끼는 셔츠 안에서 편하게 누워있으면서 왜 헥헥거려?”

끼웅!

“뭐? 흔들려서 힘들다고? 장난해? 그럼 그냥 네가 두 발로 걷든가.”

끼우웅!

“이 자식 말버릇이 왜 이래? 누굴 닮은 거야?”

태고화가 있는 물부리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끼웅이가 칭얼대자 도진이 셔츠 앞주머니에 손가락을 넣었다. 끼웅이가 오들오들 떨며 손가락을 피해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는 그때 이리가 말했다.

“저기 사람들이 있네.”

이리의 말대로 물부리산 정상에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여럿이 보였다. 삐익삐익! 뀽뀽! 인간이 떼로 나타나자 줄지어 쫓아오던 잔챙이들이 흩어졌다.

“저 중에 한 명이 바리공주인가요?”

“저 사람들은 평범한 인간들이야. 바리공주는 바쁘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겠지. 못 봐서 아쉬워?”

“아쉽긴요. 깍듯하게 대하는 건 고역이라 없어서 다행이에요.”

도진은 성큼성큼 중년인들에게 다가갔다. 중년인들은 도진과 이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렇게 어린 사람들이 여긴 무슨 일인가?”

도진은 능청맞게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겠어요. 등산 좀 하려고 나왔죠.”

“그 차림으로 올라왔단 말인가?”

생활한복에 운동화를 신은 이리는 그렇다 쳐도, 도진은 오늘 이리와의 데이트날이라 생각하고 옷차림에 꽤 신경 썼다.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검은 구두.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네. 이 차림으로 올라왔습니다. 어르신들은 동네 분들이신가요? 아니면 산악회?”

“나는 여기 초소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이짝들은 내 친구들이지.”

도진은 초소 옆을 흘깃했다.

정상의 산불감시초소 바로 옆에 태고화가 있었다. 영안이 없는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화단이었다. 국화와 비슷하게 생긴 오색 빛깔의 아름다운 꽃인데 평범한 인간들은 보지 못한다니, 좀 안쓰러웠다.

“그런데 뭐 하는 학생들이야? 왜 이렇게 예쁘고 잘생겼어.”

“연예인들이가? 이 근처에서 무슨 촬영이라도 하나. 요즘 연예인이 많이 오네.”

도진과 이리가 눈을 마주쳤다. 도진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얼마 전에도 연예인이 왔었습니까?”

“어어. 이석진 알지? 엄청 연기 잘하고 잘생긴 탤런트 있잖아. 이석진이 여기 왔었어. 그것도 두 번이나 왔었다고.”

“……!”

여기서 이석진이라는 이름을 들을 줄 몰랐기에 도진은 적잖이 놀랐다. 곧장 스승님을 바라보자 이리는 예상이라도 한 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태고화 개화 시기가 예년보다 늦다, 라는 사실만으로 이리는 뭔가 불길함을 느껴 이곳까지 발걸음했다. 도진은 내심 ‘별문제 있겠어?’ 했는데 정말 별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리 선인의 직감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때 이리가 중년 일행에게 다가갔다.

“소장님,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이석진은 정확히 언제 여길 방문했나요? 그리고 무슨 대화를 나누셨어요?”

맑고 새카만 눈이 그들을 응시했다. 거부할 수 없는 요청에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이석진이 처음 왔던 건 4개월 전이었다. 2월 중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던 날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와 같이 왔다.

촌구석에 평생 살며 처음 보는 유명인이라 반가웠던 소장은 이석진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시민이 실제로 마주친 연예인들에게 할 법한 그런 말들.

‘진짜 이석진인가? 아이고,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네. 여긴 어쩐 일이요?’

‘…….’

‘이봐요. 이석진 씨?’

‘아, 시끄럽게 하네. 좀 닥쳐.’

이석진은 소장에게 거슬린다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다정다감한 이미지와는 달리 싸가지 없고 건방졌다. 유명 배우의 실체에 소장이 헛웃음을 짓자 매니저가 쩔쩔매며 사과했다.

“매니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더벅머리에 뿔테안경을 꼈고… 굉장히 말랐어. 아주 빼빼 말랐는데 등이랑 어깨도 한껏 움츠러들어서 사람이 볼품없어 보이더만. 그런 연예인 밑에서 일하는 게 오죽 힘들었겠어.”

이석진과 매니저는 초소 근처를 한 바퀴 빙 둘러보고 떠났다고 했다. 탁 트인 전망을 보고 감탄하지도 않았고, 산 정상에 올랐다는 기념사진을 남기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듣는 도진은 이석진이 태고화에 무슨 짓을 했구나, 알아챘다. 인간 시점에서야 그냥 초소 근처를 한 바퀴 뱅 돈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고서 잊고 있었는데 바로 그저께 밤! 이석진이 매니저와 또 방문한 거야.”

‘아니, 이런 야밤에 여긴 또 웬일이요? 귀신인 줄 알았네.’

‘아… 안녕하세요. 이석진이라고 합니다.’

‘알지 그럼 모르겠나? 여긴 또 왜 왔냐니까.’

‘…그냥, 그때 보니까 경치가 좋아서요.’

‘이 캄캄한 밤에 뭐가 보인다고?’

‘그러게요, 하하…. 그건 그렇고 어르신, 제가 요전에는 너무 건방졌죠? 죄송합니다. 당시 맡았던 역할에 빠져 있느라고…….’

“얼마나 저자세로 사과하던지 4개월 전이랑 아주 딴 사람인 줄 알았어. 내가 인터넷에 인성 폭로글이라도 쓸까 봐 찾아온 걸까.”

“또 초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갔나요?”

“이번엔 매니저 혼자 초소 주변을 돌고, 이석진은 가만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더군.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하던지….”

그때 이야기를 듣던 어르신 한 명이 끼어들었다.

“이석진이 신파 연기를 참 잘해.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절로 측은함이 싹터.”

“맞아요. 그 배우는 악역을 해도 미움은 안 살 거야. 일단 마스크 자체가 부드러워서.”

“지금까지 내 말 못 들었어? 처음 만났을 때 날 완전 개무시를 하더라니까.”

“그거 사과했다면서. 미안하다 했으면 됐지, 남자가 꽁해 가지고.”

대화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갔다. 어차피 필요한 내용은 모두 들었으므로 이리와 도진은 탁 트인 전경만 조금 감상하다가 인사하고 산에서 내려갔다.

산기슭에 세워둔 용마로 향하며 도진이 말했다.

“스승님, 저도 나름대로 추리해 봤는데요.”

“응.”

“2월 중순, 이제 막 태고화가 꽃망울을 터뜨릴 때쯤 이석진이 와서 개화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어요. 그 이유는 물론 근처에 음기를 퍼뜨려 악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겠죠.”

혼꽃이 꽃을 피우지 못하면 이 근처에 퍼지는 생명의 기운이 적어져 새로 태어나는 잔챙이들도 없어진다. 산을 정화하는 잔챙이들이 사라지면 당연히 이 산은 음기에 휩싸인 으스스한 곳이 된다. 악신은 그런 음기를 먹으며 점점 크게 자라나고….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저께 다시 와서는 제대로 꽃이 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거예요.”

“이유가 뭘까?”

“만인사와 배리모스가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배불리 음기를 섭취할 곳을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스승님한테 한쪽 팔을 뜯기고 정신 차렸을지도.”

도진은 그때 이리 선인의 살벌하고도 무시무시하고 멋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거 지금까지 우리가 저지른 짓을 얼른 수습하지 않으면 이리 선인에게 다 죽게 생겼다- 해서 지금 수습하며 돌아다니는 중인 거죠.”

“음…….”

“스승님 생각에는 어떤데요?”

“글쎄. 수습이란 점에서 보면 내 생각에도 비슷해.”

“그럼 좋은 일이네요! 뭔가 찜찜하게 구석에 계속 박혀 있었는데 이게 이렇게 해결되네요.”

대화하다 보니 용마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차에 오른 도진은 내비게이션에 대여점 주소를 입력했다. 그런데 이리가 뒷좌석에 오르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지금 퇴마사가 근처에 있는 것 같구나.”

“네…?”

도진이 얼른 차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경계 태세를 갖추고 사방을 확인했는데 잔챙이들과 산짐승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퇴마사가 수준 높은 은신술이라도 사용했나? 도진이 은신한 존재를 드러낼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하는데, 이리가 말했다.

“바로 근처에서 주술을 사용하고 있어.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네, 가요!”

이리가 도진을 힐끗 바라보고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

이리가 하늘을 훨훨 날았다.

끼웅….

끼웅이가 금세 사라지는 이리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아오, 씨.”

도진은 이리와 똑같이 땅을 박찬 후.

“야, 빨리 스승님 따라가. 빨리!”

누구보다 빠르게 용마에 올라탔다. 그는 잠깐의 부유는 가능하지만, 이리처럼 훌훌 날지는 못하는 탓이었다.

[( ̄▽ ̄)”]

“비웃지 말고 빨랑!”

[(。_ 。)]

용마는 제 주인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이리가 괜히 눈에 띄기 싫어서 날개는 수납해 뒀지만 추적 기능은 끄지 않았기 때문에 용마는 주인을 따라 빠르게 달렸다.

* * *

이리는 상공에서 잘 꾸며진 테마파크를 내려다봤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지만, 그는 목표한 이를 바로 발견했다.

더벅머리에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테마파크의 구석진 곳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주위에 이석진은 보이지 않았다. 벤치가 앞에 있음에도 울타리 앞에 쭈그려 앉은 남자를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결계를 치거나 은신술을 사용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혹은 사용하지 못했거나.’

이리는 쇠박새로 변해 퇴마사 근처로 하강했다. 퇴마사는 울타리 너머의 수풀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이상하네…. 나, 나, 나아야 하는데. 왜, 왜 안 낫지?”

손에는 빈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쇠박새는 나무 울타리 위로 포르르 날아갔다. 퇴마사가 새를 발견하고는 어설프게 웃어 줬다. 그리고 다시 수풀을 쳐다봤다.

“미, 미안해. 나, 나는 나을 줄 알고. 더, 더 좋은 약을 찾아올게.”

뀨웅. 뀽. 뀨웅!

수풀에서 화를 내고 있는 녀석은 바로 새앙토끼 잔챙이 요물이었다. 다만 한쪽 귀가 찢어져 있었고, 엉덩이 털도 심한 화상을 입은 듯 보였는데 비라도 맞은 듯 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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