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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퇴마사와 이석진, 이아진은 보육원에서 함께 자라 오순도순 평화롭게 잘 지내왔는데, 퇴마사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악신들과 얽히게 되면서 이석진이 고통받고 있고, 배리모스에게 뭔가 약점도 잡혀 있고.”
정보를 정리하던 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리도 아니네요. 그런데 스승님, 이렇게 되면 이석진은 피해자이지 않아요?”
“내가 이석진의 팔을 뽑았을 때, 만약 억울한 이에게 벌을 내린 것이었다면 덕이 손실되는 방식으로 규율에 따른 처벌이 있었을 거야.”
“아, 손실이 없었으니 죄인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린 게 맞네요. 그럼 퇴마사 새끼가 거짓말을…. 아닌데? 스승님을 쳐다보면서 말했는데.”
도진이 으아아, 머리 아파, 하며 머리를 헝클였다. 부스스해져도 잘생긴 제자에게 이리가 이만 일어나자고 눈짓했다. 도진이 이리를 따라 일어났다.
“저 퇴마사 놈은 대여점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어요. 배리모스가 알려 주지 않은 거겠죠?”
“글쎄.”
“글쎄라니요?”
“배리모스도 모르는 건지도….”
“네? 그게 무슨….”
막 식당을 나서려는 자세 그대로 멈칫한 도진이 눈을 크게 떴다.
“스승님, 잠깐만요…!”
이리는 도진이 제대로 된 추리를 했으려나 싶어 기대했다. 도진은 이어서 말했다.
“저기 좀 봐요! 열차가 다녀요. 와, 씨. 여기 뱅글뱅글 도는 열차인가 봐요. 재밌겠다. 우리도 타요! 네? 저 완전 어렸을 때 한 번 타 본 게 끝이란 말이에요. 스승님, 우리도 타고 여기 한 바퀴 돌아요. 온 김에 여기저기 구경도 좀 하고요. 제발요. 스승니임.”
“…….”
이리가 낮게 탄식했다. 도진이 이리의 팔을 잡아끌고 척척척 열차 타는 곳으로 향했다. 끼웅이는 어느새 도진의 어깨에서 열차를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물론 눈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도진이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해 보는 이리였다.
* * *
퇴마사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본래 그의 다음 행선지는 나주였다. 4개월 전, 배리모스는 나주의 작고 약한 요괴들의 음기를 강제로 흡수했다.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러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리 선인을 만나고 계획이 바뀌었다. 요괴들에겐 미안하지만, 그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아진을 지키는 게 급선무였다. 맑고 고운 기운을 가진 어여쁜 선인과….
‘그 무서운 남자가 바로 제자겠지?’
만인사는 이리 선인에게 부리부리한 제자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이가 더 무시무시해졌다고.
아무튼 이리 선인과 제자인듯한 청년이 준 부적으로 이아진에게 또 다른 악신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했다.
“…….”
퇴마사는 음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 하늘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석진이 찾아다니던 ‘퇴마 영상’의 주인공들이 정말로 이능을 지닌 자들일 줄은 몰랐다. 만약 이석진에게 오늘 그들과 만났다고 말하면 정말 좋아할 것이다. 연락처까지 받았다고 하면 당장 만나러 가겠지.
‘금제를 풀어 주길 원해?’
‘풀어 줄게. 네가 원한다면.’
이리 선인의 말은 정말 달콤했다. 하마터면 유혹에 빠질 뻔했다.
예전에도 같은 얘기를 한 자가 있었다. 그자는 외국에서 활동하는 퇴마사였는데 금제를 풀어 주고, 배리모스도 처치해 주겠다고 했다. 한수는 당시 이석진과 함께 모은 전재산을 털어서 그에게 의뢰를 넣었다. 결과는….
그자는 영능력을 잃고 지금은 폐인이 되어 살고 있다.
과연 이리 선인은 배리모스를 이길 수 있을까?
‘이리 선인은 천지신명이다. 나는 천 년 전, 그가 얼마나 강한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규율 때문에 우리를 더는 건드리지 않겠지만, 나는 그와 적대하게 된 것만으로도 심히 부담스럽구나. 배리모스여, 나는 이제 이 일에서 빠지겠다. 홀로 잘해 보도록.’
만인사는 그 말을 남기고 도망쳤다.
그 끔찍한 뱀이 두려워할 정도라면… 이리 선인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겉보기에는 어리게만 보였지만. 맑고 어여쁘고 순수한 사람으로만 보였지만…….
그가 정말로 그렇게 강할까?
배리모스보다 더?
그 사악한 악신보다…….
퇴마사가 문득 치미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누구도 배리모스를 이길 수 없어.’
아주 어렸을 적부터 뼛속까지 박힌 공포감을 그는 이겨내지 못했다. 그 거대한 뱀조차도 배리모스에게 짓눌리지 않았던가.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내가 그 녀석의 팔을 뜯어내 주지.’
배리모스가 이석진의 얼굴로 서늘하게 내뱉은 선포가 떠올랐다.
아아… 그 착한 선인에게 경고라도 해 주고 싶었으나 금제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다정한 선인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퇴마사는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손으로 꾸욱 누르다가 손에 쥔 종이가 구겨지는 걸 보고 얼른 힘을 풀었다.
부적과 명함.
배리모스는 당분간 쉬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이석진의 몸 안에 잠들어 있었다. 혹여 그 악마에게 들킬 위험이 있으니 이 자리에서 외우고 흔적을 없애야 했다.
눈앞이 흐려졌다. 퇴마사는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그래도 계속 앞이 흐려졌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부적의 그림과 글자, 친절한 경고문을 모두 외우는 동안 가슴에 울음과 울분이 쌓였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이석진은 옛날부터 귀신 이야기를 좋아했다. 보육원 선생님들이 귀신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울면서 자지러졌지만, 이석진만은 초롱초롱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들은 이석진이 동생과 친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아진과 한수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것을 보거나 기이한 현상을 겪고는 했으니까.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아진과 한수를 위해서 오히려 귀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구는 거라고 생각했다.
셋이 함께 초등학교에 올라가고… 매일 매일 산을 두 번씩 오르락내리락했던 나날.
어느 비 오던 날, 셋은 비를 피해 커다란 나무 아래로 숨었다가 묘한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다.
그 항아리.
그 항아리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
‘열어서는 안 되었는데.’
할 수 있어서 했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저 열 수 있길래 열었을 뿐이었는데.
까득, 퇴마사가 이를 갈자 옆자리의 승객이 힐끔거렸다. 퇴마사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고 부적을 외우는 데에 집중했다.
이미 일은 저질러졌다.
주워 담을 방법은 없다.
이석진은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지만, 퇴마사는 오래전에 희망을 버렸다.
그저 배리모스가 시키는 대로 따르다가 기회를 엿봐 먼 곳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너희,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그는 자꾸 새어 나오려 하는 한 줄기 빛을 애써 어둠 속에 묻었다. 자기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할 만큼 아주 깊숙한 어둠 속으로.
14. 납량 특집
“네? 뭐라고요?”
안 그래도 올라간 눈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흰 피부에 유달리 붉은 입술을 한 소년이 흐르는 땀을 닦다 말고 매니저를 쳐다봤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요하야. 저번 납량 특집이 조회수도 좋고 반응이 뜨거웠거든. 그래서 이번에 좀 더 스케일 크게 또 찍기로 했어.”
“…….”
아니, 이 매니저 인간아. 그 얘기를 왜 앵콜 무대 전에 해? 나 무대 어떻게 하라고?
요하가 붉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옆에서 멤버 치호가 요하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왜. 무섭냐? 짜식, 은근히 겁이 많다니까.”
“요하는 대놓고 겁이 많지. 저번 특집 때도 가장 데시벨 높았잖아.”
“맞아. 팬분들이 앞으로 고음 파트 요하 보고 맡으라고 놀리고 막.”
멤버들이 크크크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요하도 하하, 하, 어색하게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난감하다….
현재 가장 인기 많은 남자 아이돌 그룹 중 하나인 ‘샤먼’의 귀여움 담당을 맡은 요하는 아주 곤란했다.
왜냐하면 그는 납량 특집에 놀라는 역할이 아니라 놀라게 하는 역할로 출연해야 하는 존재였으므로.
저번 납량 특집 촬영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어두컴컴한 밤에 폐교에 들어가서 지령 세 개를 수행하고 나와야 했는데, 요하는 졸면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서는 조금도 무섭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환한 낮에 여기 있는 돌멩이 세 개를 저쪽으로 옮기는 정도의 힘듦이랄까?
오히려 음기에 이끌려 폐교에 머물던 잡귀와 요괴들에게 납량 특집이었을 것이다. 놀라고 무서워해야 마땅한 인간이 저들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면서 하품을 하니까.
산신령들과 선인들에게는 샤먼의 요하가 여우 요괴인 게 밝혀졌지만, 대부분의 위아들은 모르고 있다. 그의 인간 둔갑이 아주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이 마주치자 영안이 트인 인간인 줄 알고 골리러 왔던 녀석들이 한 대씩 얻어맞고는 울면서 도망치고는 했다.
‘하아……. 내가 연기를 잘해서 망정이지. 아니, 잠깐. 이러다 매년 납량 특집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이번엔 확 기절해 버릴까?’
혼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여우 요괴에게 기절은 숨 쉬는 것만큼 쉽다. 그냥 유체 이탈하면 이 육신은 뒤로 쓰러져 버릴 것이다.
그래. 이 방법이 낫겠어.
머릿속으로 계책을 세운 여우 요괴가 앵콜 의상인 편한 셔츠의 목 부분에 얼굴을 집어넣을 때였다.
“이번에는 엄청 유명한 무당들도 같이 촬영한단다. 촬영 장소가 전북 폐가거든. 전북 폐가, 하면 어딘지 딱 알겠지?”
“아, 설마 ‘퇴마 영상’에 나온 그곳이요?”
“그래. 퇴마 영상 올라온 날짜 되면 무당들이 거기서 뭔 모임을 한다는데, 우리가 거기 낑기기로 했지. 납량 특집에서 심화된 진짜 오컬트 특집! 재미있겠지? 이번엔 진짜로 귀신 볼 수 있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