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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호 기절하겠다.”
“내가 왜? 기절을 해도 요하 저 녀석이 하지. 하느님이 날 지켜 주시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무섭지 않아.”
“저번에 보니까 너도 겁 많던데. 요하가 하도 비명을 질러서 가려져서 그렇지.”
“겁 없거든? 솔직히 혼자서도 갔다 올 수 있거든? 어이없네.”
“형, 들었죠? 이번에 치호 녀석 지령 혼자 수행한대요.”
“어어, 들었어. 기획팀에 잘 전달해 놓을게.”
매니저와 승헌의 쿵짝에 치호가 부들부들 떨었다. 해맑은 그들을 보면서 요하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날 앵콜 무대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무당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퇴마사, 승려, 무당….
요즘 시대에 누가 이들을 무서워하겠는가? 잔챙이 위아들이 아니고서야 영물 정도 되는 존재가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진 호랑이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몇몇 위아들은 다르다.
옛날부터 인간으로 둔갑해 인간을 속이고, 급기야 인간을 위아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하는 위아들. 대표적으로 여우 요괴, 흡혈귀. 이들은 꽤 오랜 세월을 퇴마사 부류와 적대 관계로 지냈기 때문에 지금도 이들 부류를 아주 무서워했다. 지금 시대에 퇴마사가 아무리 힘을 잃었다고 해도, 퇴마사에 대한 공포는 이들의 혼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여러분 사랑해요! 우리 수호령 여러분 모두 사랑해!”
얼굴은 방긋방긋 웃고, 입으로는 팬의 환심을 살 말을 내뱉으면서 요하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무당이라, 어떡하지?
아니야…. 괜찮을 거야. 무당은 대개 사기꾼이고, 진짜 영력이 있는 무당이라도 잡신과 샤바샤바하면 돼.
…무당이 접신한 신들이 고지식한 녀석들이라면? 설득이 안 먹히면?
만약 한 명한테라도 인간이 아니라는 걸 들키면…?
‘샤먼의 요하가 인간이 아니래! 여우 요괴래!’
‘여우 요괴? 그러면 구미호잖아!’
‘설마 팬들의 간을 빼먹으려고 아이돌 짓을 하는 거야? 미쳤어. 당장 쫓아내!’
‘퇴치해야 돼. 죽여 버려!’
요하의 상상이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앵콜 무대가 끝날 때쯤에는 상상 속에서 매니저 형에게 목이 잘려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멤버들이 기도하고 있었고….
무대 뒤로 돌아온 요하는 결심했다.
그분을 만나러 가야겠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위아를 도와줄 전능한 존재는 오직 그분뿐이었다.
* * *
“그렇구나. 잘 찾아왔어…. 그런데 상담 시작하기 전에 이것 좀 다시 써 줄래?”
요하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이리가 웃으며 의뢰서를 내밀었다. 요하가 직접 작성한 의뢰서였다.
이름: 요하
종족: 샤먼에서 귀여움을 맡고 있는 서브댄서
서식지: 서울시 강남구
연락처: 010-0000-0000
내용: 무당이 제 실체를 알지 못하게 해주세요
“이게 왜요?”
“종족에 여우 요괴라고 써야지.”
“아, 맞다. 깜빡했어요.”
요하가 두 줄을 긋고 여우 요괴로 정정했다.
아이돌 활동에 매우 과몰입 중인 영물을 도진이 노려봤다.
도진은 요하를 진상 고객으로 분류한 상태였다.
보통 대여점 고객들은 찾아오기 전 전화를 해서 상담 예약을 잡는데, 요하는 예약도 없이 무작정 대여점 초인종을 눌렀다. 누가 알아볼까 무서우면 적당히 다른 얼굴로 둔갑하면 될 텐데 굳이 굳이 아이돌 요하의 모습으로 스냅백을 눌러쓰고,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채 말이다.
스승님은 진상 고객을 쫓아내기는커녕 얼른 들어오라며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사실 이 점이 요하가 싫은 이유의 99%를 차지했다.
일부러 차도 덜 정성 들여서 탔는데 안타깝게도 원체 좋은 차라서 요하는 차향을 음미하며 점점 안정을 찾았다.
“선인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선인님이 아니었다면 패닉에 빠져서 그냥 요하는 죽었다- 하고 잠적해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안 되지. 신령들이 너희 그룹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 선인님도 아시네요? 희한하게 산신령들이 그렇게 우리를 좋아해 주더라고요. 그거 아세요? 산신령 중에 우리 따라다니는 그룹이 있어요. 보호 차원에서 어느 산신령들인지는 말씀드리진 않겠지만, 아무튼 녹방이고 팬미팅이고 지방 행사까지 다 따라온다니까요. 일은 언제 하나 모르겠어요.”
이미 어떤 신령들인지 알고 있는 이리는 그저 가만히 웃었다.
“참, 선인님의 제자가 곧 기도식이란 걸 한다면서요? 엄청 큰 행사라던데. 제가 진현계에 갈 수만 있으면 어떻게 축하 무대라도 해 드렸을 텐데. 영상편지는 어때요? 저희 멤버들 다 같이 찍을게요. 제 친척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고 말하면 다들 축하한다고 영상편지를 남겨 줄 거예요.”
“어이없네. 그딴 거 필요 없거든.”
안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도진이 콧방귀를 뀌었으나 이리는 달랐다.
“찍어 주면 고맙지. 샤먼은 선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으니까 다들 좋아할 거야.”
도진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요하는 눈을 초롱초롱 떴다.
“정말 선인들도 저희 좋아해요? 신령들한테서 얘기 듣긴 했는데 한 번도 본 적은 없어서요. 저 이리 선인님 말고는 선인 본 적 없어요.”
“나비 선인이라고 알아? 나비가 특히 너희 그룹을 좋아해. 걔네 궁에서 매일 너희 노래 틀어놓고 잔치를 연댔어.”
“나비 선인, 사실 들어본 적은 없지만 영광이에요. 우리 콘서트 할 때 와 주시면 VIP 자리 드릴 텐데. 물론 선인님께도 티켓 드리고요.”
“콘서트 관람은 무리일 거야.”
진현계 주민이 중간계에 내려오려면 임금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영물 사망 사건’이라면 모를까, 아이돌 콘서트 참석이라는 사유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대신 얘기 전해 줄게. 나비도 좋아하겠다.”
이리가 다정하게 웃었다.
“가, 감사합니다….”
요하의 얼굴이 발개졌다.
“선인님……. 그런데 이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정말 예쁘시네요. 선인님은 아이돌 하실 생각 없으세요? 이 정도면 춤이랑 노래 못해도 그냥 사람들 다 홀릴 것 같은데.”
“아, 씨발.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새끼가 선을 넘네?”
도진이 쾅!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진상 고객 주제에 스승님 얼굴 평가에다가 아이돌 따위를 들이밀어? 아오, 씨. 이딴 건 고객으로 받아 주면 안 되는데.”
도진의 기세에 움츠러들었던 요하가 ‘아이돌 따위’에 발끈했다.
쾅! 요하는 도진처럼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일어났다. 오백 년 된 나무로 만든 튼튼한 원목 테이블이라 다행히 이 정도 주먹에 무너지지 않았다.
“뭐? 너 지금 말 다 했냐? 아이돌이 왜, 아이돌이 뭐! 너 몇 살이야?”
“스무 살이다. 어쩔래. 한 대 치게? 칠 테면 치든가!”
“하, 어이없네. 너는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놈이 왜 직업 비하를 하냐?”
“직업 비하는 네가 했지. 전화도 없이 대뜸 찾아와도 당연히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대여점에 대한 비하 아니고 뭔데?”
“선인님은 아무 말씀 안 하셨는데 왜 네가 난리야!”
“스승님이 착하셔서 아무 말씀 안 하시니까 직원인 내가 말하는 거다. 꼽냐?”
두 사람이 유치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이리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차를 호로록 마시며 구경했다.
끼웅….
끼웅이가 이리의 무릎 위로 올라와 존재하지도 않는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했지만, 이리는 끼웅이를 쓰다듬으며 잠자코 있었다.
요하는 20살인 여우 요괴이다.
도진은 지금은 싸우느라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대여점에서 일하며 제 나이 또래의 위아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진은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스스로 영면에 들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은 영원히 삶을 지속할 것이다.
물론 그 옆에는 이리도 있겠지만, 스승으로서 도진에게 기나긴 삶을 함께할 친구를 만들어 주고픈 마음이 있었다.
이 어린 여우 요괴는 산신령과 선인들이 다 같이 푹 빠져 있을 정도이니 나쁜 성정을 지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리는 요하와 도진이 좋은 친구 사이가 되기를 바랐다.
* * *
납량 특집 2편 녹화는 6월 22일 수요일 전북의 ‘퇴마 영상’ 폐가에서 진행한다.
대망의 그날까지 남은 날짜는 7일. 요하는 이 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리 만물 대여점에서 자정을 보내야만 했다.
퇴마사 부류에게 위아임을 들키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선인과 신령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둔갑하는 것이지만, 이건 신수 정도가 되고 나서야 가능하다.
이리 선인은 어린 여우 요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이야기해 줬다. 요하는 그중에서 절대로 들키지 않은 가장 안전한 방법을 골랐다.
‘가장 안전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방법이야. 고통스러울 거고……. 괜찮겠어?’
‘네. 이게 나아요. 몸은 좀 아프겠지만 마음은 편할 테니까요.’
이리 선인이 걱정했지만, 요하는 몸은 좀 고생해도 마음이 편한 게 좋았다.
첫째 날, 밤 11시 55분.
요하는 거실에서 TV를 보며 깔깔거리는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야, 나 안방 쪽 화장실 간다. 나 찾지 마라.”
“미친놈아. 똥 싸는 걸 왜 광고해?”
“나 찾지 말라고. 그리고 화장실 근처에도 오지 말고.”
“아, 누가 가. 절대 안 가.”
“요하 형, 미쳤어요? 왜 저래. 벌써 냄새나요.”
요하는 멤버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안방에 붙은 화장실에 들어갔다. 문을 잠근 요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둔갑술이 풀리고 은빛 털을 지닌 자그마한 여우가 되었다.
요하는 털 속에서 몽당연필을 꺼냈다.
샤먼은 숙소 생활을 하고 있고, 멤버들은 바른 생활을 하는 메이슨만 빼고는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는다. 자정마다 몰래 대여점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리 선인이 딱 필요한 이물을 하나 빌려줬다.
‘은색 연필’
긴 시간 동안 많이들 사용해서 이제는 몽당연필이 된 이 이물은 공간이동 이능을 지니고 있다. 요하는 몽당연필을 발톱 사이에 끼우고 욕실 벽면에 딱 여우 한 마리가 통과할 만한 사이즈의 작은 구멍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