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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84화 (8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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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요괴는 노부부를 지키기 위해 저승사자와 싸웠다. 그러나 아무리 신수가 될 수 있는 영물이라고 해도 너무 어렸던 탓에 저승사자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저승사자는 노부부의 혼을 거뒀다. 컁, 캬우우웅, 구슬프게 우는 새끼 여우 요괴가 안쓰러웠는지 저승사자가 말했다.

‘어린 여우 요괴야, 이들은 덕을 많이 쌓은 혼들이다. 아무 일 없이 이 땅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테니, 언젠가 연이 닿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면 덕을 쌓으며 건강하게 지내도록 해라.’

저승사자가 떠나고 요하는 밤새도록 노부부의 곁을 지켰다.

한날한시에 자는 듯이 고요하게 떠난 이들의 빈 육신을.

한참을 우는 동안 동이 트고 TV가 켜졌다. 노부부는 아침마다 이 시간이면 TV가 자동으로 켜지게끔 설정했다. 요하는 요란한 음악 소리에 귀를 세웠다.

TV에 유명 가수가 나와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다.

노부부가 손뼉을 치며 노래를 따라부르거나 함께 손을 잡고 춤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여우 요괴는 그렇게 앞으로의 삶을 정했다.

“그때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장르는 트로트지만, 환생하고 나이가 어려지면 그 나이에 맞는 장르를 좋아하게 될 거잖아. 그래서 아이돌이 제격이라고 생각했어. 뭐, 일단 아이돌이든 뭐든 유명해져서 이름과 얼굴을 알리는 게 중요하기도 했고.”

“어차피 그들은 널 기억하지 못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야.”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나도 몰랐는데 그래도 상관없더라고….”

사람은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게 있는 법이다. 그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 그게 요하에겐 아이돌이었다.

여우가 몸을 일으켰다. 은빛 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덧붙였다.

“사실 이제는 아이돌 생활 자체가 좋아졌어. 꽤 즐겁더라고. 멤버들도 재미있고, 팬들도 귀엽고. 보람도 있고….”

“…….”

“지금 매일 밤마다 구슬 파괴하고 토하는 과정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연습생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서 편하게 대여점 일이나 하는 인간은 잘 모르겠지만.”

“뭐야?”

나름 마음을 열면서 이야기를 잘 듣고 있던 도진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여기서 편하게 대여점 일이나 하는 인간? 하루만 대여점에서 생활해 볼래? 자영업이 얼마나 신경 쓸 일이 많은지 알아? 너 같은 진상 고객 애프터 케어는 물론이고 휴가도 없이 새벽부터 새벽까지 일해야 되거든?”

“뭔 소리야. 나 애프터케어 따위 필요 없거든? 그리고 우리도 새벽부터 새벽까지 일해! 당장 내일모레 촬영도 새벽부터 새벽까지란 말이야.”

“우리는 그게 365일이라고, 새끼야!”

어린 여우 요괴와 어린 장사가 또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끼웅….

끼웅이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요하가 비척비척 화장실을 나오다가 깜짝 놀랐다. 캄캄했던 거실 불이 켜져 있었고, 거실 한가운데에는 치호가 팔짱을 껴고 서 있었다.

“요하. 너 뭐야?”

요하는 자기가 물은 줄 알았다.

“뭐가 뭐야야. 화장실 다녀오잖아. 너는 왜 그러고 서 있어? 개놀랐네.”

“왜 이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

“…너, 너, 그걸 어떻게.”

요하는 이번엔 정말 무지막지 놀랐다. 치호가 이렇게 눈치가 빠른 애였나? 눈을 크게 뜨는 그때 주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요하 형, 우리 다 눈치챘어요.”

“우리도 더 이상 봐줄 수는 없어. 여기 앉아서 솔직하기 대화해.”

다트와 이승헌까지 테이블에 앉아 빈자리를 가리켰다. 일찍 자는 메이슨만 빼고 전부가 모이다니…. 요하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뭘 어디까지 눈치챈 거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빈자리에 앉자 치호가 얼른 옆을 꿰찼다. 마치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 같았다. 메인보컬이자 리더인 이승헌이 대여점 직원처럼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말했다.

“너 요새 특정 시간이 되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10분에서 20분 지나서 나오고 있어. 그리고 그때마다 안 그래도 하얀 애가 더 창백해져서는 비틀거리기도 하고. 며칠 사이에 몸무게도 5kg 빠졌지.”

“메, 메이슨도 살 빠졌는데.”

“걔는 다이어트 중이고 너는 아니잖아.”

요하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렀다. 여우 요괴는 예로부터 능청맞아 잘 당황하는 일이 없는데 요하는 당황하면 티가 많이 났다.

“네가 요즘 이상한 이유를 우리끼리 얘기해봤어.”

“그, 그래서?”

“우리 결론은 이래. 너 연애하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화장실 들어가서 상대랑 통화하는 거지?”

“…….”

“그런데 그 연애 상대가 힘들게 만드는 거고?”

“…….”

아이돌의 연애. 어찌 보면 여우 요괴라는 정체보다 더 심각한… 아니, 이게 아니라.

요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들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데, 차라리 이 오해가 사실인 듯 구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너네 말대로 연애 중인데 여자친구랑 싸워서 힘들다고 하고… 촬영이 끝나면 헤어졌다고 하면 된다.

요하가 머리를 굴리느라 말이 없자 승헌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연애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다, 연애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에 악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제일 중요한 건 건강인데 너는 요즘 살이 너무 빠졌다, 사람이 건강하게 연애를 해야지 건강을 해쳐 가며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

요하가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 화내는 것도 아니고 결국 건강 걱정이었다.

“알았어. 내일 한 번 더 통화하고 담판을 지을게. 다들 걱정하지 마.”

“정말이지?”

“응.”

“그런데 상대는 누구예요, 형? 아이돌? 어느 그룹이지. 혹시 일반인?”

“자, 내일 아침부터 촬영 있으니까 다들 이만 자러 가자.”

“요하 형, 궁금한데 누구인지 말해 주면 안 돼요? 저희 못 믿어요?”

“다트야. 사생활을 지켜 주자.”

승헌이 다트의 사생활 침해성 질문을 차단하며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요하도 치호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우려는 요하를 치호가 빤히 바라봤다. 찔리는 게 많은 요하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

“뭐. 할 말 있으면 해.”

“야.”

“뭐. 왜.”

“…….”

치호는 또 빤히 바라보다가 요하가 못 참고 뭐라 하려는 찰나에 말했다.

“너 힘들게 하는 사람이랑은 사귀지 마.”

“어?”

“잠이나 처자라고.”

치호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요하는 이상한 녀석이라고 구시렁거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내일 대여점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가고, 본 촬영 때 평범한 아이돌로서 무당들을 맞이하면 된다. 당당하게!

* * *

케엑, 켁, 켁!

여우가 힘겹게 구슬을 뱉어냈다. 첫날 뱉은 것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으나 고통은 더욱 커진 듯했다. 도진이 지름 1cm 정도의 자그마한 구슬을 수거했다.

“이 짓도 드디어 끝이네. 힘들었다. 잘 가라. 내일 절대 들키지 말고.”

“어…….”

여우는 기운이 없는지 비척비척 일어나 허공에 만들어진 문을 넘어갔다.

도진이 사라지는 문 너머의 여우를 쳐다봤다.

평소 같았으면 ‘장난하냐. 네가 뭐가 힘들었냐. 힘들긴 내가 힘들었지. 너는 그냥 내가 뱉은 구슬 주워다 버리는 게 끝 아니냐.’ 시비를 털었어야 했는데… 정말 힘들긴 한 모양이었다.

“스승님, 이거 마지막 여우 구슬이요.”

대여점에 들어간 도진이 멀리 나비를 쓰고 있던 이리에게 구슬을 건넸다. 이리가 구슬을 손에 쥐었다가 펴자 안 그래도 작았던 구슬이 더욱 작아져서 쌀알만 한 크기가 되었다.

도진은 ‘지금까지는 구슬을 아예 소멸시키시더니 왜?’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았다.

“요하가 지금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일 거야. 내일, 아니, 오늘이구나. 촬영에서 쓰러지지나 않아야 할 텐데.”

“체력 떨어져 봤자 영물인데 뭐가 걱정이에요. 스승님 걱정이나 하세요.”

이리는 선인인 내 걱정이 가장 쓸모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제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말을 삼켰다.

도진은 이리의 옆에 앉아 늘 그렇듯 팔과 어깨를 비비적거렸다.

“그런데 인간 둔갑이 그렇게 완벽한데 왜 아파하면서까지 요력을 빼내려 한 걸까요? 웬만한 무당은 못 알아챌 텐데 말이에요. 대한민국에 사이비 무당이 많다는 걸 모르나.”

“상대가 사기꾼이라고 대놓고 알려 줘도 여우 요괴는 무당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어. 그 두려움은 여우 요괴의 혼에 깊이 박혔기 때문에 극복하기 쉽지 않지.”

“한마디로 그렇게 시스템 되어 있다는 말이군요. 보통 사람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비슷해. 요하랑은 많이 친해졌어?”

도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친해졌겠냐고요. 하루만 더 있었으면 주먹질할 뻔했어요.”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라지만 너는 주먹질은 하지 마.”

“안 친해진다니까요! 그럴 일 없다니까요. 어차피 오늘로 마지막이었고.”

도진이 발악하며 요하와의 교류를 거부했다.

“스승님이 어떤 마음인지는 아는데요. 저는 친구고 뭐고 짝사랑 쟁취하기에도 바쁜 사람입니다. 혹시 모르죠. 짝사랑이 이뤄지고 나면 그때는 좀 친구 만들 생각이 들지.”

“…….”

이제는 이리가 말을 돌려야 할 때였다.

마침 편지를 모두 적은 참이라 이리는 멀리 나비를 접어 도진에게 건넸다. 멀리 나비를 날려 보내는 건 도진의 몫이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는 편지예요?”

“천지천해의 백호.”

“요즘 그쪽이랑 편지가 많이 오가네요.”

“이거 날려 보내고 와…. 은색 연필은 어디 있어?”

“네? 은색 연필이요?”

“…….”

“아…!”

도진은 그제야 요하한테서 이물, 은색 연필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아아악! 다 썼으면 좀 알아서 돌려주지 좀!”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서 찾아오렴. 주먹질은 하지 말고.”

“으어어어어어어.”

도진은 이리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한참을 꿍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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