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86화 (86/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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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대체….”

정말 귀신에 홀린 걸까. 분명 나무를 봤는데, 손을 흔드는 나무를 봤는데 이런 낭떠러지라니.

멤버들은 대체 어디 갔고?

그 동물 울음소리는 뭐였지?

치호는 이제 촬영이고 뭐고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애들아! 다들 어디야? 피디님! 지금 뭔가 이상하다고요. 잠시만요!”

캬우우웅.

멀지 않은 곳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보다는 가늘고, 그렇다고 새 울음소리도 아니고….

“여우…?”

캬우웅….

아까의 귀신 웃음소리와는 다르게 뭔가 구슬프고 처량했다. 어딘가 다친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구미호 같은 걸 수도 있어. 여우는 사람을 홀린댔어.’

주먹을 꽉 쥔 치호는 여우 울음소리가 들린 곳과 정반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툭.

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치호가 그 물건을 주워 들었다. 저녁 미션 때 상품으로 받은 자그마한 여우 인형이었다.

샤먼은 각자 동물 캐릭터를 하나씩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치호는 호랑이, 요하는 여우. 이 여우 인형은 바로 요하의 캐릭터 인형이었다.

“…….”

치호는 결심을 내리고 다시 뒤를 돌았다. 그는 여우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귀신 웃음소리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새카맣던 산속에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형들! 다트! 어디 있어요?”

“메이슨!”

메이슨의 목소리를 들은 치호가 급히 달려갔다. 보라색 카드를 쥔 채 울먹거리고 있던 메이슨이 치호를 발견하고 으허어어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치호는 반가운 와중에도 닭살이 돋아서 끌어안는 건 피했다.

“야, 치호!”

“메이슨!”

곧이어 다른 멤버들까지 수풀 사이에서, 나무 사이에서 나타났다. 다들 귀신이라도 본 듯 혼비백산한 얼굴들이었다.

“아, 형들. 다들 어디 있었어요. 존나 놀랐잖아요.”

“내가 할 말이야. 다들 나 두고 사라졌길래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어.”

“형들, 저 존나 무서운 일 겪었어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했어요.”

“뭐? 나돈데?”

“너도…? 나도 아까 여우 울음소리에 놀라서 멈춰 보니 절벽 앞이었는데.”

“어? 나도 여우 울음소리 듣고 멈춰서 살았는데….”

치호는 멤버들이 다 같은 경험을 했다는 걸 알고 놀라서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 몰래카메라인 거 실토하라며 억지로 웃었지만, 그마저도 금세 사라졌다.

“그런데 요하는 어디 있어?”

잠시 모여서 기다리고 있어도 요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보라색 카드를 찾았으니 미션 끝인데 스태프도, 카메라도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요하 형 미아 된 거예요?”

다트의 말에 멤버들이 얼어붙었다. 이 귀신 들린 산에서 길을 잃었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마이크를 통해 우리 목소리가 들어가고 있을 텐데 왜 제작진은 아무 말이 없을까? 멤버들이 제작진을 원망하는 그때였다.

컁….

작은 여우 울음소리가 들리자 다들 짠 듯이 소리를 죽였다. 그들은 시선으로 의견을 교환하고는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수풀 속에서 몸을 돌돌 말고 있는 작은 여우 한 마리가 보였다. 흰 털은 꾀죄죄했고, 뒷발 하나는 다쳤는지 붉게 물들여 있었다.

키잉… 킹.

여우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아파했다. 멤버들은 일단 여우를 데려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치호가 여우에게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귀에 이거….”

멤버들이 치호가 가리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점이 아니었네? 설마 피어스인가?”

귀 끝에 있는 빨간 게 점인 줄 알았는데 빨간 피어스였다.

‘요하가 찬 피어스랑 비슷하네.’

치호는 여우의 귀를 붙잡아 자세히 들여다봤다. 동그랗고 빨간 구슬 안에 별 모양까지…. 정말로 요하가 찬 것과 똑같았다.

키웅.

손길이 싫은지 귀를 파닥거리던 여우가 눈을 떴다. 여우와 치호의 눈이 마주쳤다. 여우가 귀 끝을 파르르 떨며 멤버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마주쳤다.

캬웅!

여우는 천적이라도 만난 듯 놀라며 일어나려 했지만, 다친 뒷발 때문에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야, 조심해. 형 조심히 안아 들어요.”

“어, 그래…. 근데 우리가 데리고 가도 되나? 누가 키우는 여우인가 본데.”

“반려여우가 아니라 밀렵꾼이 뭔가 표시해 놓은 걸지도.”

“뭐가 됐든 동물 귀를 뚫다니. 분명 쓰레기 새끼야.”

키잉….

여우가 작게 울었다.

물론 이 여우는 요하고, 이 피어스도 요하가 멋져 보이려고 찬 피어스였다. 졸지에 스스로에게 쓰레기 짓한 게 되어 버린 요하가 버둥거렸지만, 결국에는 치호의 손에 들리고 말았다.

원혼과 사투를 해서 겨우겨우 쫓아내고 잠깐 기절하고 나니까 이 상황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멤버들이 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스럽긴 하지만… 아직 원혼들이 근처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데다가 이대로면 ‘요하’는 산에서 영영 실종되어 버린다.

“요하는 대체 어디 있지….”

“먼저 산에서 내려갔을지도 몰라요. 제작진이랑 같이 있을지도.”

“그러면 다행인데. 걔가 겁이 많아서 어디서 기절해 있을까 봐 걱정이야.”

“차라리 일단 스태프들 만나고 나서 그때 다 같이 찾는 게 나아. 조명도 있고 마이크도 있으니까.”

“어디 안 가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 여기 낭떠러지가 많은 것 같아서….”

그들이 걱정하는 요하는 치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치호가 앞발 두 개를 손에 쥐고 꼬리까지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끼히히히….

원혼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큰일났다.

어떡하지.

그렇다고 치호 놈의 손등을 물어뜯을 수도 없고.

곤란에 처한 여우가 눈만 데룩데룩 굴리는 그때였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눈앞의 수풀이 움직여서 멤버들이 발을 멈췄다.

“…너넨 뭐냐?”

나타난 것은 사람이었다.

아이돌의 시선으로도 상당히 잘생긴 남자가 삐딱하게 서서는 앞길을 가로막았다. 나이는 그들 또래로 보였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체격도 커다래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기운을 내뿜는 남자였다.

“여기는 사유지야. 네놈들은 뭔데 멋대로 들어왔지?”

“아, 우리는 촬영을 하다가….”

“그거. 내가 키우는 여운데.”

“뭐?”

“내 여우를 왜 안고 있냐?”

요하가 눈을 깜빡였다. 나타난 이는 바로 대여점의 부리부리한 직원이었다. 왜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반가웠다.

캬웅. 캬웅.

요하가 주인에게 돌아가려는 듯 바둥거리며 울었다. 치호는 주기 싫었지만, 어쨌든 주인이라니까 남자에게 다가갔다.

“혼자 저쪽에서 쓰러져 있었어요. 뒷발을 다친 것 같은데 잘 치료해 주세요.”

“내놔.”

남자가 여우의 뒷덜미를 붙잡아 들었다. 치호가 발끈했다.

“방금 다쳤다고 했는데…! 좀 조심히 들어요!”

도진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른 멤버들은 기세와 분위기에 쫄아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반면 이 녀석은 제법 간덩이가 부은 녀석이었다. 칭찬해 줄 만했다.

그는 여우를 대롱대롱 들고 다 들으라는 듯 말했다.

“개똥아. 생각을 좀 하고 움직여. 뇌가 있으면 생각을 해야지.”

“…이름이 개똥이에요?”

“그래. 내가 키우는 여우, 개똥이.”

캬우웅.

개똥이가 부들부들 떨었다.

“저기, 그, 혹시 근처에서 우리 말고 다른 사람 못 보셨습니까? 그, 우리랑 같은 그룹인데. 얼굴 하얗고 예쁘게 생겼고.”

“봤어. 저 길을 따라서 내려가던데.”

도진이 오른쪽을 가리켰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법한 길이 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좀 조심히 들어요. 개똥이 다쳤다니까요. 주인이면 잘 돌봐주세요.”

“…….”

“개똥아, 안녕. 잘 있어.”

치호가 손을 흔들고 도진이 가리킨 쪽을 향해 서둘러 뛰었다.

“아, 감사합니다. 치호야, 넘어져. 뛰지 마.”

“요하 녀석 무서워하고 있을 텐데 얼른 데리러 가야죠.”

멤버들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뒤 도진은 뒷덜미만 붙들고 있던 여우를 쓰레기 던지듯 툭 던… 지려다가 다쳤다는 점을 고려해서 얌전히 잘 내려놨다.

캬웅.

여우가 일어나려다가 뒷발 때문에 고꾸라졌다. 여우는 절뚝이면서 도진을 올려다봤다.

“야, 너… 여긴 무슨 일이냐?”

도진이 나타나자마자 근처의 원혼들이 싹 사라졌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솔직하게 나오지 않았다. 도진 또한 감사 인사는 기대하지도 않았는지 시큰둥하게 말했다.

“은색 연필 내놔.”

“뭐?”

“이물, 내놓으라고.”

“이물? 내가 무슨 이물을, 아…!”

요하는 완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는 더러워진 은색 털 속을 앞발로 뒤져 은색 연필을 꺼냈다. 잃어버리면 큰일이라 늘 몸이 지니고 있었다.

요하가 은색 연필을 데구르르 굴리자 도진이 주워 들었다. 그는 이물을 간단히 검수하고는 가지고 온 케이스에 넣었다.

“너 이거 가져가라. 스승님이 너 보면 주라고 하셨어.”

도진이 ‘이거’를 던졌는데 잘 보이지 않아서 낚아채기도 힘들었다. 요하는 겨우 받아들고 나서야 이 쌀알만 한 물건의 정체를 알았다. 바로… 자신의 마지막 여우 구슬이었다. 요하가 기뻐하면서도 의문이 담긴 눈으로 도진을 올려다봤다. 도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한테 요력이 필요하다는 걸 아셨나 봐.”

“어떻게…?”

“나야 모르지. 가끔 이렇게 느낌만으로 신묘한 일을 해내시더라고. 정말 대단한 분이야. 빨리 스승님한테 돌아가야겠어. 너는 일단 여우 모습으로 산을 내려가는 게 좋을 거다. 네 멤버들이 간 길보다 이쪽으로 내려가는 게 더 빨라. 그럼 나 간다.”

“어, 어….”

도진이 손을 대충 흔들고는 나왔던 수풀로 다시 들어갔다.

요하는 쌀알만 한 구슬을 삼켰다. 요력이 아주 조금 돌아왔다. 딱 인간 둔갑을 할 수 있을 만큼이었다. 발목 치유는 못 하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직원 놈이 이물 돌려받으러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요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멤버들을 앞지르기 위해 도진이 말해 준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 지금 애프터 케어 서비스를 받은 거구나.’

‘너 같은 진상 고객 애프터 케어는 물론이고 휴가도 없이 새벽부터 새벽까지 일해야 되거든?’

멤버들이 원혼에 홀리는 바람에 벌써 새벽 두 시가 지나고 있었다. 게다가 촬영을 시작했던 지역보다 훨씬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도진은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며 들어와서 멤버들과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

요하는 뭔가 얼떨떨했다.

스승님 보고 신묘하다고 하더니 자기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으면서 에프터 케어 운운한 게 아닌가?

괜히 이리 선인의 제자가 아니다.

요하는 도진의 평가에 매긴 점수를 상향 조정했다.

10점 만점에 3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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