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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아픔도 잊고서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아…. 입도 작게 벌리며 감탄했다. 그사이 약사가 소년의 무릎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을 떼었을 때 상처는 이미 아물어 있었다.
“하, 하나도 안 아파요!”
소년이 깜짝 놀랐다. 현무의 품을 벗어나 주변을 뾱뾱뾱뾱 돌아다니다가 다시 현무의 품에 뛰어들었다.
“현무 님, 저 다 나았어요. 이분이 고쳐 주셨어요.”
“그래.”
현무가 소년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고는 약사에게 말했다.
“고맙다.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괜찮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우리 선인님의 행사에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년은 다시 떡을 제대로 받아오기 위해 뾱뾱뾱 길을 떠났다. 이번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들고 왔다. 약사와 학문가가 떡을 먹고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타이밍을 노리던 영영과 지온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던 영영과 지온은 다른 구역으로 넘어오자마자 후, 하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저 소년이 소문의 왕 후보로구만!”
“세 명이 어찌 이리 다를꼬.”
이리 선인의 제자 김도진.
제1차사의 혼령 홍연.
현무 현은의 하늘다람쥐 현서윤.
내년이면 이 셋 중 하나는 진현계의 왕이 된다. 현재 진현계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셋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다니. 아무리 기도식이어도 다른 선인이었다면 이렇게 다 불러 모으지는 못했을 터였다.
영영과 지온은 돌고 돌아 처음에 왔던 곳으로 돌아왔다.
가장 커다란 궁 앞의 외전. 차마 들어가지 못했던 곳을 기웃거리다가 외전 앞에서 하객들을 맞이하는 이리 선인과 도진을 발견했다. 등에 날개가 달린 거대한 장사가 이리 선인에게 허리를 꾸벅했다.
“기도식 축하하오, 이리 선인.”
“고마워. 운문.”
“김도진이라고 했나? 장사면서 선인이 되려 한다고 들었네. 어려운 길이지만 부디 잘 해내길 바라겠네.”
“감사합니다. 구운문 장군.”
장군이 안으로 들어가자 다음으로는 도깨비들이 총총총 다가가 인사했다.
“이리 선인, 제자를 들이신 걸 축하합니다용!”
“고마워. 비형, 길달. 둘은 후원 장식에 도움을 줬다면서.”
“이리 선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용.”
“이쪽이 이리 선인의 제자군용.”
“안녕하세요. 김도진입니다.”
“부디 잘 성장해서 이리 선인의 명망을 더욱 드높여주길 바란다용.”
“알겠습니… 다. 감사합니다.”
도깨비들이 총총총 안으로 향했다. 다음 하객이 오기 전 이리가 도진의 팔을 툭 쳤다.
“너 방금 ‘알겠습니다용’ 하려고 했지?”
“네. 근데 참았잖아요. 저도 이런 날에는 좀 참는다구요.”
도진이 씨익 웃었다. 이리는 그 얼굴을 마주 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이리 선인님, 정말 감축드리옵니다.”
그러다가 둘은 또 축하 인사를 하는 하객을 접객하기 시작했다. 다음 하객은 바로 그 유명한 연경 서생이었다.
그 외에도 율도국의 남사당패, 나림국의 죽엽군이 와서 국왕의 선물을 전달했다. 청경 노수와 조 신선, 김생원, 검선 부자(父子) 등 명성이 자자한 자들도 찾아와 축하 인사를 해 왔다.
멀찍이서 보던 영영과 지온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우리도 가서 축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은가?”
“그렇지. 아까는 제대로 말을 못 했으니…. 하지만…….”
도저히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렇게 이름을 날리는 하객들 사이에 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둘은 마음이 불안했으나 그래도 여기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축제를 즐겼으니, 축하 인사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큰 용기를 냈다.
“이, 이리 선인.”
“너희구나. 맛있는 음식은 많이 먹었어?”
이리 선인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더, 덕분에 많이 먹었소….”
“다행이네.”
“저, 정말 축하드리오. 앞으로 제자와 평생을…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길 바라오.”
“고마워.”
“이, 이리 선인의 제자도 평생 옆에서 선인을 모심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시고…….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영영이 인사를 끝내고 지온의 팔을 흔들었다. 지온은 어딜 쳐다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동공으로 영영과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인사를 했다.
“그, 그럼 이만 가보겠소.”
“네. 둘 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감사하겠소.”
인사를 끝낸 영영과 지온이 같은 방향의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떠났다. 얼굴은 붉게 상기돼서 곧 불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둘에게 무사히 축하 인사를 했다는 생각인지 삐걱거리던 발걸음을 새 신을 신은 아이처럼 신난 발걸음으로 바뀌었다.
“도진아, 어때?”
잔뜩 신이 난 잡신과 신령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도진에게 이리가 물었다.
“네? 뭐가 어때요?”
“기분이 어떠냐고.”
“꼭, …식 같아요.”
“뭐?”
“스승님과 저의 결혼식 같아요.”
이리는 전혀 예상 못한 답변에 꽁꽁 얼어붙었다. 반면 도진은 가장 예쁜 봄날에 결혼하는 새신랑처럼 배시시 웃었다.
“다들 우리 보고 축하한다고 말하고 인사하고 가고, 평생 옆에서 함께 행복하라고 해 주고……. 이게 혼인이 아니면 뭐란 말이에요?”
듣고 보니 비슷한 것 같긴 한데….
“듣고 보니 비슷한 것 같긴 하죠?”
“…….”
거짓말을 못 하는 선인은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때마침 하객이 다가왔다. 도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했다. 이리 또한 웃으며 대화하면서 속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어째서인지 요즘 들어 제자에게 넘어가는 횟수가 잦아진 것 같아 큰일이었다.
* * *
기도식 본식은 예정대로 정시에 열렸다. 염라대왕, 옥황상제, 마고할미, 사신방…. 모든 천지신명이 참석했는데 그리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피로연처럼 가볍게 진행되다가 본식 중반 임금님이 자리에 납시면서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면류관을 쓴 진현계의 임금님이 가장 상석에 앉아 좌중을 내려다봤다.
도진 또한 왕의 얼굴을 관찰했다.
임금은 상당히 수려한 외모였으나, 상당히 수심이 깊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윽한 얼굴에 진득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번아웃와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는 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눈빛이 죽어 있었다. 피곤과 피로에 찌들어 있다고 해야 할까…. 고통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왕은 오래 일했어. 걔가 쉬면 나도 한동안 쉬려고. 인간계 관광이나 시켜줘야지. 내가 옆에 있지 않으면 걔는 분명 영면에 들려고 할 테니까.’
보부상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생을 사는 이들은 스스로 깊은 잠에 빠지는 방식으로 영원한 죽음을 선택하고는 한다. 왕의 유일한 권속이자 친우인 보부상은 왕이 죽음을 선택할까 봐 걱정된다고, 대여점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했다.
하긴 저런 깊은 허무함이 담긴 눈으로 옥좌에 앉아 있으면… 누가 걱정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윽하게 좌중을 둘러보던 왕이 가장 앞자리의 천지신명에게 말했다.
“내가 즉위하고 5천 년간 그대들이 모두 모인 것은 처음 보는구려.”
“…….”
“하긴 그럴만한 일이긴 하지. …이리 선인.”
왕의 부름에 이리가 앞으로 나섰다.
“더 가까이 오세요….”
왕은 이리에게 존대를 사용했다. 이리가 성큼성큼 걸어 왕의 바로 앞에 섰다. 따뜻한 미소를 띤 이리와 어둡고 침울한 왕, 마치 햇빛과 달빛처럼 대조적이었다.
“이리 선인께서 제자를 들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도 거부하시더니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으셨습니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가 내 품으로 굴러왔으니 마땅히 길을 닦아 주는 것뿐입니다.”
“내가 아는 이리 선인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를 발견하면 다른 좋은 스승을 붙여 줄 사람입니다. 본인이 직접 스승이 되겠다 하니 이건 큰 변화가 맞지요. 이토록 오래 살았는데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군요.”
“더 오래 살면 더 신기한 일을 겪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가요…. 기대되는군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투였다. 만사가 지치고 피곤해서 ‘기대’라는 단어조차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선인의 제자가 될 이는 왕 후보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왜 선인께서 직접 왕이 되지 않으시고 제자에게 넘기십니까?”
“나는 대여점을 운영하기에도 바쁩니다.”
“대여점이라…….”
임금이 고개를 기울이자 면류관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선인께서는 내가 어릴 때에도 똑같이 말하며 왕의 자리를 거절했었지요. 중간계에 만물상점을 연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제 일만 년이 넘었습니다.”
임금이 나직이 탄식했다. 듣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위력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경력도 수 천 년이었으나… 일만 년이라고 하면 그들에게도 아득히 긴 세월이었다.
“나는 고작 5천 년을 다스리고도 이렇게 지쳤는데 선인께서는 일만 년을 일하고도 더 일하겠다고 하시는군요….”
“왕께서 진현계가 아니라 중간계에서 5천 년을 보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야하신 후에는 친우와 함께 중간계에서 시간을 보내 보세요. 필요한 이물이 있다면 특별히 대여 기간을 길게 잡고 빌려드리겠습니다.”
“그거 참 감사한 말이군요….”
이리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임금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아른거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왕이 팔을 뻗자 옆에 있던 붉은 옷을 입은 동자가 낮은 탁상을 들고 다가왔다. 탁상 위에는 돌돌 말려 매듭지어진 족자봉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이제 도술, 육체 능력, 정신력 중 한 가지 주제로 시험을 치를 차례였다.
“선인께서는 심사숙고하여 하나를 선택하시지요.”
왕은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는 의미에서 옥좌에 깊이 기댔다. 선인을 모시는 푸른 옷의 청의동자와는 달리, 왕을 모시는 붉은 옷의 홍의동자들이 커다란 부채로 양옆에서 살랑살랑 부채질했다.
이리는 홍의동자의 팔이 힘들까 걱정되었는지, 아니면 본래 생각한 바가 있었는지 금방 골랐다.
“가운데 것으로 하겠습니다.”
“좀 더 고민하지 않으십니까? 신묘한 이물을 사용해서 원하는 바를 쟁취해도 좋습니다.”
“내 제자가 세 가지 중 무엇이든 자신 있으니 안심하고 고르라고 하더군요.”
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웃음이 아니라 호탕함에 감탄하는 의미였다. 무료해 보이기만 하던 임금의 표정에도 언뜻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손을 들어 홍의동자의 부채질을 멈추게 하고, 족자봉을 가지고 오라 일렀다.
임금이 이리가 고른 가운데 족자봉을 펼쳤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족자봉의 글자를 읽은 임금이 족자를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