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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96화 (96/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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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 이리의 베스트 주머니에 숨은 끼웅이를 손가락으로 꺼내자 끼웅이가 양팔로 허겁지겁 얼굴을 가렸다.

끼우우웅.

“도진아. 끼웅이는 무서운 게 아니라 얼굴에 묻은 파란 염색약이 싫어서 가리고 있는 것 같아.”

“아, 그런가요? 이게 왜 그렇게 싫지. 파란 점박이 귀여운데.”

끼우웅…!

파란 점박이란 소리에 끼웅이가 눈물을 퐁퐁퐁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진이 으, 하며 이리의 주머니 안에 다시 잘 넣었다. 이리의 주머니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둘은 여기산의 산책길을 걷다가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표지판을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안쪽으로 빠졌다. 조금 더 걷자 오래전에 죽은 듯한 통나무가 길을 가로질러 막고 있었다. 도진이 통나무를 툭툭 두드리자 통나무 껍질 밑에서 알록달록한 버섯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버버버버버버버!

“음버섯이들이구나. 안녕?”

버버버!

음버섯이들이 이리에게 달라붙었다. 잔뜩 인상 쓴 도진이 안아 달라고 양손을 뻗고 있는 음버섯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의원에 가려고 왔으니까 길이나 열어.”

버어!

음버섯이가 손가락으로 오른쪽의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도진이 나무를 건드리자 나무가 뒤로 드러누웠다. 나무 뒤쪽은 본래 비탈길이었는데, 커다란 나무 덕분에 내려가는 길이 만들어졌다.

“스승님, 조금 가파른데 안아 드릴까요?”

“아니야.”

도진과 이리는 나무로 이루어진 계단을 걸어서 내려왔다. 비탈길 아래쪽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한옥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의원이었다. 직원 대부분이 혼령인 다른 기관들과 달리 이곳은 초목과 짐승에서 뻗어 나온 영물과 신령 직원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꽃과 나무 형태, 덩굴줄기 형태부터 노루, 산양, 소 머리를 한 사람 형태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들과 푸른 줄무늬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의원을 부산스레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쩐지 소란스러운데요? 무슨 일 생긴 것처럼.”

“그러게.”

마침 입구 쪽에서 서성이고 있던 의관 하나가 둘을 발견했다.

“이리 선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른 들어오세요!”

“철 의관.”

그녀는 전화를 걸어 왔던 철 의관으로, 정수리에 분홍 꽃이 달린 덩굴줄기 형태의 신령이었다. 이 의원을 만들었던 신령의 제자의 제자이자, 의원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 과일 바구니는 관조자 님께 주시는 건가요?”

“너희도 같이 먹어. 그런데 무슨 일 있어? 뭔가 분위기가 수상하네.”

“무슨 일이겠습니까. 늘 일어나는 일이죠. 지금 화마가 없어져서 다들 찾는 중입니다. 그 녀석은 항상 사고를 치고 정신을 차리면 숨고는 하잖습니까. 아침부터 계속 찾아다니고 있는데 안 보이네요. 이번엔 아주 꽁꽁 숨었어요.”

“혼낼까 봐 숨은 건가요?”

철 의관은 도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고는 대답했다.

“저희는 혼내지 않습니다. 화마가 반성하고 있으니까요. 미안함과 자괴감과 후회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숨은 겁니다. 특히 이번에는 의관 한 명을 다치게 하는 바람에…….”

철 의관이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덩굴을 스으윽 들어 올려 제 머리를 매만졌다.

“안 그래도 이파리가 세 장밖에 없던 의관이었는데 이번 화재로 이파리가 몽땅 타 버리고 말았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도진아, 내가 금척을 고칠 테니까 그동안 너랑 끼웅이는 화마를 찾아봐.”

“네, 스승님. 화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세요.”

“이만한 불덩어리에 눈과 팔과 다리가 달렸어. 딱 보면 알 거야.”

이리가 양팔로 원을 만들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크기였다.

“금방 찾아올게요. 관조자 님 만나러 갈 때는 같이 가요. 저도 한번 어떤 분인지 뵙고 싶거든요.”

“알았어.”

“잠시만요, 스승님.”

도진이 이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이리가 등을 뒤로 쭉 뺐다.

끼우웅!

도진이 이리의 베스트 주머니에서 끼웅이를 꺼냈다.

“이 녀석 데려갈게요. 이따 봐요!”

도진이 끼웅이를 납치하고 사라졌다.

철 의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선인님의 제자는 참 이상하네요. 그냥 주머니에서 꺼내 가면 되는 걸 왜 굳이 허리에 팔을 감는답니까?”

“그러게 말이야….”

이리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의원은 99칸이나 하는 넓은 곳이었다. 이 중에서 육신의 병을 앓는 이들이 입원한 병동은 10칸에 불과했고 정신병동이 70칸이나 되었다. 도진은 우선 화마가 입원해 있던 방을 둘러보기로 했다.

“화마 환자는 햇빛을 싫어하고 어둠을 좋아해서 지하실에 병실을 마련했어요. 계단이 위험하니 촛대를 들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도진을 안내한 토끼 영물 직원이 총총총 복도를 뛰어갔다. 도진은 촛대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화마처럼 빛을 싫어하는 환자들 몇몇이 방과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중엔 원혼도 있었는데, 평범한 원혼들처럼 해코지하려고 달려들기는커녕 외부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피했다. 대부분의 환자가 그러했다.

“내가 부리부리해서 그런 거야, 아니면 본래 겁이 많은 거야.”

끼우웅.

도진의 혼잣말에 끼웅이가 둘 다라고 대답했다.

“이게 진짜.”

끼우웅!

도진이 끼웅이를 손으로 꽉 쥐어짜며 화마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는 숯과 풀, 종이, 지푸라기, 석탄 따위가 널려 있었다.

도진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방을 둘러보다가 나왔다. 때마침 옆 방의 문이 열려 있어서 쏙 들어갔다. 화마의 방과는 달리 이끼 낀 수조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흐익!”

방의 주인인 금붕어 요괴가 수조로 첨벙 뛰어들어서는 돌 틈으로 숨었다.

방을 둘러본 도진은 곧장 나와서 이번엔 복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걸었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린 방을 들락날락하며 환자들을 놀라게 했다.

끼웅, 끼웅!

끼웅이가 말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봐요. 김도진 장사!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환자들의 살려 달라는 호출에 노루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오기 전까지 도진은 병실을 제집처럼 쏘다녔다.

“다들 겁먹었잖아요. 화마를 찾으라고 부탁했지, 언제 환자들 놀라게 하랬습니까?”

“거울이 없군요.”

“예?”

“햇빛을 싫어하니까 창문이 없는 건 그렇다 쳐도 거울은 왜 없는 겁니까?”

노루 직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직원은 도진을 일단 밖으로 끌어내 항아리들을 쌓아둔 으슥한 곳에서 말했다.

“지하실 환자들은 전부 자기 모습을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는 자기혐오에 빠진 위아들이에요. 그 때문에 거울은 물론이고 물컵도 뚜껑을 닫아서 나눠 주고 있어요. 물에 비친 얼굴만 봐도 기겁을 하거든요.”

“아니, 자기혐오에 빠졌으면 극복하도록 도와줘야지. 그냥 냅다 거울만 없애는 게 치료법입니까?”

“일단 자기 얼굴과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극복하도록 돕죠! 지금은 자기 모습만 비치면 발작을 하는데 어떻게 돕겠습니까? 우리는 환자분들이 마음의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구요.”

“그렇게 기다린 지가 얼마나 됐는데요? 화마도 입원한 지 몇백 년은 되었을 거잖습니까. 앞으로 또 몇백 년이 흘러가도 또 그저 거울을 없애놓고 방치하기만 할 생각입니까?”

방치라는 표현에 직원은 억울함과 분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도진을 쏘아봤다.

“화마는 어렸을 적의 실수로 자신이 살던 숲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가 연못가에서 눈을 떴는데, 주위에는 친구들의 시체가 가득했죠. 푸른 연못에 비친 살아있는 것이라곤 오직 자신뿐이었어요. 그 이후로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

“이번 사고도 어느 의관의 단추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본 화마가 이성을 잃으면서 일어난 사고예요. 이런 환자분을 그럼 어떻게 치료하라는 말이죠? 정 답답하면 대여점으로 데려가서 신묘한 이물의 힘으로 알아서 잘 치료해 보시든가요!”

날카롭게 쏘아붙인 직원이 다그닥다그닥 발소리를 내며 떠났다. 끼웅이가 도진의 주머니에서 고개를 살며시 내밀었다.

끼웅…….

의원과 대여점의 관계가 나빠지진 않을까 걱정하는 끼웅이의 머리를 도진이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내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아. 저 의관이 스승님한테 꼰질러도 스승님은 날 이해하실 테니까 괜찮아.”

끼웅… 끼웅.

“뭐야. 지금 내가 틀렸다는 거야?”

끼웅, 끼웅. 낑.

“하긴 너도 파란 점이 싫다고 무작정 숨어 버리는 성격이었지. 그렇게 살면 안 돼. 뭔가 문제가 있다면 대면을 해야지. 도망을 선택해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어.”

도진의 생각은 그랬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로 자동차에 트라우마가 있는 아이가 있다면 무작정 자동차와 떨어뜨려 놓는 방법이 옳은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자동차를 보지 않고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이렇게 지하실에 갇혀 살지 않고서야. 언젠가는 자동차와 마주해야만 하는데 애 마음이 준비되기를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그건 치료가 아니라 방치다.

화마도 마찬가지다. 대요괴가 겪은 비극은 분명 안타까우나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고, 이제 수백 년이나 흘렀으니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만약 내가 실수로 도희를… 엄마랑 아빠를 죽… 인다면.

그리고 거울로 피 묻은 내 얼굴을 본다면. 확실히 트라우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도진은 수백 년이나 트라우마에 갇혀서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적절한 죗값까지 치른 다음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앞을 향해 발을 내딛을 것이다.

거울 속의 피범벅이 된 나 자신과 마주하고, 이 끔찍한 현실을 수없이 떠올리게 되더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게 바로 도진이었다.

장사로서가 아니라 김도진이란 사람이 가진 성격이었다.

“아무튼 화마부터 찾자. 일단 찾아서 스승님께 데려가면 어떻게든 해 주실….”

낑.

“…….”

그는 돌연 놀란 광경을 마주한 사람처럼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스승님께 데려가면 어떻게든 해 주실 거야.’

이건 틀린 말이었다.

왜냐하면 이리도 화마의 자기혐오를 방치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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