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05화 (105/203)

105

이리와 둘만의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던 도진이 툴툴거렸지만 이리는 불안한 마음에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아, 그러게. 잘 자고 있구나…. 괜히 백호한테 미안하게 됐네.”

들어오자마자 작업대 위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끼웅이를 발견한 이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승님의 직감이 틀릴 때가 다 있네요.”

“틀려서 다행이야.”

“네. 근데 이건 뭐예요?”

도진이 끼웅이 아래에 깔린 종이를 끄집어냈다.

ㅂ ㄱ ㅅ ㅣ ㅇ ㅓ

ㅗ ㅗ ㅍ

그 절박한 글자를 읽고 도진이 풋, 웃었다.

“다잉 메시지인 줄.”

“도진아….”

“아, 농담이에요, 농담. 이 녀석, 얼마나 신나게 놀았길래 이렇게 기절한 듯 잠들었지. 얘 침대에 올려 놓을게요.”

“그래.”

도진이 끼웅이를 손에 홀랑 얹고는 2층을 빠르게 올라갔다. 이리는 가볍게 웃으며 작업대 위를 정리했다.

그렇게 끼웅이의 가출은 이리와 도진만 모르는 외출로 끝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18. 짝사랑 쟁취기

“스승님, 저 다 씻었어요!”

도진이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작업대 앞의 이리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네가 다 씻었는지 아닌지 알려 줄 필요 없단다. 그리고 제발 옷 좀 입어.”

“스승님은 보지도 않으시구. 제가 옷 입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안 봐도 뻔해…. 요즘 맨날 벗고 다니잖아.”

“스승님.”

도진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이리는 등줄기가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부터 팔이 뻗어 와 이리가 들고 있던 이물을 가져갔다. 굵고 단단한 팔을 따라가자 이리의 예상대로 도진은 상체를 벗고 있었다.

“틈새를 고정하고 있었군요. 스승님이 이 도구로 제 사랑도 고정해 주셨으면 좋겠다….”

밤이 늦어 집에 가라고 하자 못 들은 척 씻고 나와서는 수작질을 하고 있다.

이리가 한숨을 내쉬고 도진 쪽으로 돌아섰다. 상반신 탈의 상태의 도진이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고는 근육이 돋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제가 오늘 씻으면서 거울을 봤는데 오늘따라 근육이 불끈불끈하더라고요. 얼굴도 잘생긴 것 같고. 본래도 잘생겼지만 날이 갈수록 더 성숙해지면서 완숙미가 돋보이는 얼굴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스승님한테 꼭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어때요? 제 말이 맞죠?”

“도진아. 지금 안 잘 거면 옷 입고 옆에 앉아서 스티커나 붙여.”

“스승님도 제가 옆에 앉았으면 하는군요. 좋아요! 원하신다면 이렇게 옆에 달라붙어서 신들린 보조를 해 드릴게요.”

“옷은 입고.”

“제 완벽한 몸을 보면서 눈요기 좀 하시라고 벗고 있는 거예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세요. 제 몸, 보기 좋잖아요. 찔러 보실래요?”

“가슴 움직이면서 얘기하지 마…….”

이리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옆에 앉은 도진이 작업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로 이리를 구경했다. 이리는 다시 이음새를 고정하려고 도구를 잡았지만 어째서인지 자꾸 헛손질하게 되었다. 왼쪽 뺨이 난로를 갖다 댄 듯 뜨거웠다.

이럴 때는 끼웅이가 있어야….

끼웅이가 어디 있는지 찾았는데, 용마랑 노는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 진짜 부담스러워하시네요. 그냥 즐기면 되는데.”

중얼거리던 도진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아! 하더니 작업대에 걸린 앞치마를 꺼내 걸쳤다.

“어때요? 덜 부담스럽죠?”

“…….”

더 부담스러워진 이리가 도진을 흘기지도 못하고 이물만 꼭 쥐었다.

따르르르-

때마침 걸려온 전화에 도진이 와락 인상을 썼다. 이리는 다행이다 싶어 얼른 손을 뻗었다. 그러나 도진이 더욱 빨랐다.

“이리 만물 대여점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밤늦게 미안합니다. 내가 밤에 일하는 사람이라서.

“무슨 일로 전화 주셨는지?”

-부탁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전화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제가 절박해서요.

“말씀하세요.”

-제 짝사랑을 이뤄 주시길 바랍니다.

“…….”

도진이 어처구니없어서 전화를 그대로 끊으려다가 이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꾹 참고 얘기했다.

“그딴 건 복지관에다 전화 걸어 보세요. 번호는-.”

-아, 아뇨. 이리 만물 대여점의 업무가 맞습니다. 분명 짝사랑을 이뤄 주는 이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짝사랑을 이뤄 주는 이물? 도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만약 그런 이물이 있었다면 그가 가장 먼저 사용했을 터였다.

“어디서 헛소문을 들으셨네요. 여긴 감정을 건드리는 이물은 없습니다. 감정과 기억을 건드리는 건 규율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강림도령이 분명 있다고 하셨는데….

“강림도령이…?”

-예.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저승사자 22호입니다.

“잠시만요.”

도진은 그런 이물 따위 없는 걸 알지만 강림도령이라는 언급에 혹시나 해서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물었다.

“스승님, 그런 이물이 있어요?”

“없어. 하지만 강림도령이 뭘 착각했는지는 알 것 같아. 상담 날짜를 잡아 줄래?”

“…복지관이 아니라 우리 일 맞는 거죠?”

“처음부터 이물을 찾았으니까 복지관으로 넘길 순 없지.”

“네…….”

도진은 떨떠름하게 22호와 날짜를 잡았다. 이리는 다시 작업에 몰두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일까. 도진이 수작질을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처음에는 가슴을 움직여도 난처하게나마 쳐다볼 수는 있었는데 갈수록 쳐다보기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이리는 까만 실팔찌를 만지며 자꾸만 소란스러워지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 * *

며칠 후, 저승사자 22호가 대여점을 방문했다. 저승사자답게 피부색은 창백했지만 운동선수처럼 짧은 머리에 덩치도 제법 있어서 건강미가 느껴졌다. 22호는 어지간히 절박한지 주전부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사연을 이야기했다.

“저는 그동안 연애는 뒷전으로,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덕을 모은 다음 제가 원하는 축구 선수의 삶을 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런 저도 마음에 품은 사람은 있습니다. 저승에 올라온 지 고작 100년 되었음에도 변성대왕의 보좌관을 맡을 정도로 유능한 분이죠.”

도진이 하품하다가 이리의 찌릿한 시선을 받고 입을 어정쩡하게 다물었다.

“나름대로 연락도 자주 나누고, 둘이서만 식사한 적도 있습니다만. 제게는 마음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더 접근할까 고민했으나 그냥 이런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죠. 썸 수준에도 못 미치지만, 제가 이 이상 진전시키지 않는 이유는 그분이 제게 관심이 없기도 하거니와 제게는-”

“환생하겠다는 꿈이 있어서?”

도진이 물었다.

“네? 아뇨. 여기서 환생이 왜 나오는지. 저승사자는 연애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기 때문인데요.”

장난해? 그럼 앞에 축구 선수 꿈 얘기한 건 뭔데? 도진이 눈썹을 구겼다.

“저희 49명의 저승사자는 지금까지 그 규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한 명이 그만두고 또 한 명이 들어오고 그렇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져도 규칙만은 지켰죠. 그녀를 향한 제 마음속의 열렬한 불꽃은 더욱 뜨거워졌지만 마음 깊은 곳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계속 못 본 척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홍연이 나타난 겁니다.”

“뭐? 홍연?”

“예. 아실 텐데…. 도진 씨처럼 임금님 후보 중 하나입니다.”

도진은 뜻밖의 이름에 조금 놀랐지만, 이리는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알아. 계속 얘기해.”

“예. 홍연은 아시다시피 일호 님을 후견인으로 뒀습니다. 후견인과 피후견인 사이니 두 분이 같이 다니는 건 당연합니다. 저도 압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뭘 못 참겠는데?”

“그 둘의 연애질에!”

쾅! 22호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처음에는 너무 싸워서 저러다가 큰일이라도 나는 게 아닌가 걱정될 지경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군요. 그들은 싸움을 가장한 연애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쾅! 도진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역시 사귀고 있었군요! 어쩐지 내용은 까칠한데 목소리와 표정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했습니다!”

“도진 씨도 느끼셨군요!”

이리도 느꼈다. 태고의 선인은 연애를 한 적은 없지만, 연애를 하는 이들은 아주 많이 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금세 연인 관계로 발전하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테이블을 내리치는 대신 귀… 가 있을 법한 곳을 막으며 시끄럽다고 땡깡을 피우는 끼웅이를 쓰다듬었다.

“그 두 사람은 지금도 절대 안 사귄다고, 내가 왜 이런 사람이랑 사귀겠냐고 아주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행동은 서로에게 얼마나 닭살스러운지 방금 송제대왕의 재판을 치른 혼령도 곧 혼인할 사이냐고 물을 지경이라구요!”

22호는 일호와 홍연이 연애한다는 증거를 읊었다.

일호가 키우는 반려견, 사납기로 유명한 체리베로스가 홍연만 보면 꼬리를 흔들었음.

서로 대판 싸우고 퇴근한 다음 날, 두 사람이 서로 외투를 바꿔 입고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출근했음.

회식 날, 홍연이 깻잎을 떼지 못하길래 4호가 젓가락으로 깻잎을 잡아 줬더니 갑자기 일호가 성질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홍연은 안절부절못하다가 따라감.

연애 사실을 숨기려고 노력은 하는 건지 싶은 일화들이 줄줄이 나왔다. 이리조차도 “심하구나.” 거들 정도였다.

“그래서 저도 결심한 겁니다. 일호가 대놓고 연애 금지라는 규칙을 깨도 위에서 아무 말도 안 하니 저도 그분에게 더 들이대야겠다고요!”

“잘 생각했습니다. 연애 금지라니 그런 규칙은 그 둘이 연애하면서 이미 깨진 거나 다름없죠. 오히려 그런 작자들 앞에서는 우리 커플이 더 꼴값이다! 하면서 애정 행각을 떨어 줘야 합니다. 저승사자님의 연애를 응원합니다.”

“도진 씨, 정말 말이 잘 통하는 분이군요.”

22호가 감명받은 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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