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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의 응원한다는 얘기는 진심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를 짝사랑하고 있는 그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응원했다.
그러나 돕고 싶어도 도울 방법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우리 대여점에는 사랑을 이뤄 주는 이물 같은 건 없습니다. 강림도령이 정확히 뭐라고 말씀하셨죠?”
“이리 선인님이 이물로 인간들의 연애를 몇 번 도와준 적이 있으시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듣지 못했는데 도화녀 님과 비형랑 님도 이리 선인님의 도움으로 맺어졌다고….”
도화녀와 비형랑은 하늘꽃밭의 관리자들이었다. 도진은 이리가 그런 대단한 부부의 중매를 섰다는 사실에 놀랐다.
‘스승님… 로맨스를 아는 분이었군요!’
라는 뜨거운 시선이 이리에게 쏟아졌다. 이리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찻잔을 쥐었다.
“‘천연 돌다리’를 말하는 거야.”
“천연 돌다리…. 그거 물 위에 동동 띄워서 다리처럼 사용하는 이물이잖아요? 감정이랑은 상관없는데.”
“예전에는 인간들이 물을 건너려면 산으로 빙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어. 물속에 못된 하계 위아들이 많이 살아서 지나가는 배는 무조건 덮쳤거든. 그런데 산에도 못된 위아들이 없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돌아다니면서 강이 보이면 돌다리를 놓았다가 다음 날 거두고는 했어.”
인간들은 돌다리가 생기면 건넛마을로 넘어가 정인이나 가족과 만나며 해후를 풀었다. 하룻밤 만에 뚝딱 생겼다가 다음 날이면 사라지는 이런 다리를 ‘도깨비 다리’라고도 불렀다.
도화녀와 비형랑은 인간이었을 적 짧은 거리의 섬에 살았는데, 풍랑이 거센데도 서로를 보겠다고 기어코 배를 타고 나가 목숨을 걸고 만나고는 했다. 이를 보고 안타까웠던 이리가 이 이물을 아예 줘 버렸다. 둘은 이 이물을 아주 야무지게 이용했다. 바다를 건너 해외 여행도 다니며….
“나중에 두 사람이 한날한시에 명을 다한 후에 이물을 돌려받았어. 강림도령이 그 얘기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
“그거 정말 좋은 이물이군요, 선인님. 삼도천을 건너는 혼령들에게는 필히 비밀로 해야 할…. 하지만 사랑을 이뤄 주는 이물은 아니었군요….”
“응. 여기엔 너를 도와줄 이물이 없어. 미안.”
“아닙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제 탓이죠.”
22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이리는 끼웅이의 얼굴을 긁어 주며 잠시 마음을 추스릴 시간을 줬다. 온 김에 인간들의 음식을 좀 먹다가 가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도진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제가 개인적으로 돕겠습니다.”
두 사람이 도진을 쳐다봤다. 도진의 부리부리한 두 눈에 묘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대여점 일을 하면서 시간 날 때 22호 님의 연애를 도울게요. 눈앞에 기나긴 짝사랑을 끝내고 한 단계 더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현재 진행형으로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어요. 스승님,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도 될까요?”
“당연하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개인 고객을 받는 건 의미 있는 일이야.”
“감사합니다! 22호 님, 연락처 주세요.”
도진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22호가 무척 감동한 얼굴로 도진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었다.
끼우웅?
번호를 교환하는 둘을 보며 끼웅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본적으로 고객은 진상이다, 라고 생각하며 반감을 갖고 있는 도진이 직접 핸드폰을 내밀고, 연락처를 교환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리는 좋은 변화구나 싶어서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 * *
밤 9시, 프랜차이즈 카페에 22호와 도진이 마주 보고 앉았다. 외모도 그렇고 차림새도 그렇고 눈길을 끄는 이들이었으나 은신술 덕분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 이제 계획을 세워 봅시다.”
“예에.”
거사를 앞둔 도진과 22호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으나….
끼우웅. 끼웅. 끼우우웅…….
어린 잡귀는 고구마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고 신세를 한탄 중이었다. 이리랑 한창 신나게 놀고 있을 때 도진이 강제로 움켜쥐고 이곳에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잡귀는 굳이 안 필요하지 않습니까? 대여점에 놔두고 와도….”
“나 없이 스승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꼴은 절대 못 보죠.”
“…….”
“그리고 이 녀석은 울면서도 어쨌든 고구마 케이크 맛있게 처먹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에 22호가 자세히 보니 끼웅이는 정말로 끼웅끼웅 울면서 야금야금 케이크를 갉작거리고 있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집중하세요. 연애하고 싶은 거 아니었습니까?”
도진의 엄숙한 물음에 22호가 차렷 자세를 했다.
“꼭 하고 싶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상대가 연애할 생각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죠. 연애할 의사가 없는 이를 피곤하게 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어떻게 알아보죠?”
“유진 님이 변성대왕의 보좌관이라고 했죠?”
“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도진이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
-네, 복지관입니다.
“이리 만물 대여점의 김도진입니다.”
허억, 전화 건너편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기, 기, 김도진 씨가 왜.
“소 장군 개인 번호를 몰라서 이쪽으로 연락했습니다. 소 장군한테 오늘, 지금 당장 ○○카페로 오라고 전하세요. 제 부탁을 들어주겠다면 팔씨름을 한 번 해 주겠다는 것과 승부 결과를 소문으로 퍼뜨려도 된다는 것도 함께.”
-아, 알겠습니….
도진은 상대가 대답하는 중에 툭 전화를 끊었다. 22호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소 장군이라면 변성대왕과 친우이신 복지관의 관리 소장님이신가요?”
“맞습니다.”
소 장군과 변성대왕은 밤이면 밤마다 함께 술을 마시는 사이. 당연히 변성대왕의 보좌관들과도 친분이 있을 터이기에 물어보기에는 이자가 제격이었다.
10분 정도 기다리자 카페 문을 고장 낼 듯이 벌컥 열어젖히며 중년의 남성이 등장했다.
“하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도술을 싫어하는 장군신답게 은신 부적 따위도 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죄다 쳐다봤다.
“깜짝이야! 뭐야?”
“와. 목소리 엄청 크다.”
“저 아저씨, 몸도 존나 커.”
“저렇게 수염 기른 사람 처음 봐.”
“밖에 있는 하얀색 바이크가 아저씨 건가? 갖고 싶다.”
대번에 난리가 난 사람들을 향해 소 장군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김도진은 어디 있는가!”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고함에 으윽, 으악,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끼웅이는 얼른 고구마 케이크 안으로 숨어들었고, 22호마저도 귀가 따갑다며 어깨를 움츠릴 정도였다. 도진이 한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여깁니다. 좀 조용히 좀 하세요.”
“내가 조용히 한다고 정말로 이 강렬한 존재감이 흐릿해지겠는가? 어차피 나는 조용히 있든, 시끄럽게 있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데 뭐하러 조용히 하겠는가.”
도진이 어이없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단번에 관심을 잃고 일행과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 참 재미없는 도술이로군.”
“꼭 필요한 도술이죠. 아무튼 자리에 앉으십시오.”
소 장군이 22호의 옆에 앉았다.
“저승사자?”
“아, 안녕하세요. 장군님. 저는 저승사자 22호입니다.”
“저승사자와 대여점 직원이 대체 내게 무슨 부탁이 있어서 이런 인간 소굴로 날 불렀나? 인간들은 너무 약해서 나랑 부딪치면 온몸이 부서질 거란 말이야. 얽히고 싶지 않다.”
“간단한 부탁 좀 하고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22호 님, 설명하세요.”
22호가 잔뜩 얼어붙은 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소 장군은 수염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부리부리한 눈빛에 언뜻 흥미가 돌았다.
“흠, 그러니까 결국 유진 보좌관에게 소개팅할 생각 있냐 물어봐 달라는 것이군.”
“마, 맞습니다.”
“저승사자는 연애 금지 아니었나?”
“저도 금지인 줄 알았죠. 하지만 일호 그 새끼…. 크흠. 하지만 공식으로 인정만 안 할 뿐이지 버젓이 연애하고 다니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저도 제 사랑 앞에 당당해지고 싶습니다.”
“그래, 뭐 어려울 거 없지. 겨우 이것으로 김도진과 팔씨름을 한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로다!”
도진으로서는 ‘하여튼 장사란.’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은 순간이었다.
소 장군은 시원시원한 성격의 장군신답게 바로 핸드폰을 꺼내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유진
엥 소개팅이요? 갑자기ㅋㅋㅋ
유진
장사 아니죠?
유진
수염 길고 목소리 큰 장사만 아니면 ㅇㅋㅇㅋ입니다]
“대체 어쩌다가 장사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되었는지. 쯧쯧.”
누가 봐도 소 장군 때문이었다.
“저승사자라고 답장하면 되겠나?”
“알려 주지 말고 직접 만나서 보라고 하세요. 아무튼 긍정적인 답변이라 다행이군요. 소개팅 날짜는 일단 일주일 후로 잡아 주시고요.”
“알겠다.”
소 장군이 두툼한 손가락을 토독토독 움직였다.
일주.일 ㅎ
유진
다음 주 금요일 오후 2시 서울 합정역 2번 출구에서 만나는 걸로ㅇㅋ]
답답했는지 유진이 단번에 시간과 장소까지 정했다.
연애를 정말 하고 싶으셨구나…. 22호가 헤벌레했다. 도진이 내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간 괜찮은 겁니까? 저승사자는 밤에만 다닐 수 있잖아요.”
“네? 휴가를 내면 낮에도 다닐 수 있는데요.”
“와… 저승사자 생각보다 할 만 하군요.”
하하하! 듣고 있던 소 장군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김도진. 그대는 모든 걸 아는 이리 선인의 밑에 있으면서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는군!”
“상식 부족한 대신 힘은 차고 넘칩니다만.”
“그런가. 자, 이제 팔씨름이나 하지.”
“좋습니다.”
염라대왕을 이긴 김도진을 이긴 소 장군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었겠지만, 팔씨름 대결은 도진이 승리했다. 소 장군은 딱히 상심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번에는 내가 이기겠다!’ 선포를 하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