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도진은 티슈로 관자놀이에 맺힌 땀을 닦았다. 젊은 장군신은 역시 요리이기나, 염라대왕과는 비교도 안 되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도진은 가끔 화가 쌓일 때마다 소 장군을 불러서 스트레스 푸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리의 허락하에.
“이제는 어떡하죠, 도진 씨? 날짜를 너무 이르게 잡은 것 같아요. 일주일 동안 때 빼고 광내고 열심히 연애 공부를, 아, 인간계에는 픽업 아티스트라는 것도 있던데.”
“미쳤습니까? 길 가다가 사이비 전도하는 인간을 만나도 전 재산 다 빼 줄 사람이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나한테만 맡겨 두세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22호가 도진을 초롱초롱하게 바라봤다.
“도진 씨는 연애 경력 많으신가 보군요!”
“한 번도 없는데요.”
“…….”
신뢰도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하지만 도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대가 연애할 생각이 있음을 알았으니, 그 다음은 상대가 좋아하는 타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최대한 그 스타일에 맞춰야죠. 혹시 뭐 얘기 들은 바가 있습니까?”
“아, 아뇨. 저는 하나도….”
“그럼 또 다른 이에게 도움을 구해야겠군요.”
도진이 핸드폰을 꺼냈다. 22호는 도진이 누구에게 전화를 걸 것인가 궁금해했다. 슬쩍 목을 빼고 화면을 보자 그 화면에는 ‘내 스승님♥’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22호는 기대했다. 이리 선인의 도움을 받아 어떤 신묘한 이물로 유진 씨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내려는 걸까?
“아, 스승님. 헤헤. 잘 쉬고 계시죠?”
끼웅!
이리와 통화하는 것 같자 끼웅이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고 몸이고 빵과 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끼웅, 끼우웅. 끼웅!
22호는 잡귀의 언어를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아, 네. 22호 님과의 상담은 잘 되고 있어요. 스승님 말씀대로 제 첫 개인 고객이니까 만족스럽게 끝나도록 열심히 하고 있어요. 헤헤.”
22호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뭐지? 홍연한테만 말투가 묘하게 바뀌는 일호를 볼 때와 비슷한 이 느낌은…….
“네? 아, 그냥 잘 계시나 싶어서 전화했어요. 저 없이 혼자 있으니까 쓸쓸하지 않으세요? …네? 부탁드릴 거 없어요.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니까요.”
“자, 잠깐만요! 우리를 도와 달라고 선인께 전화 드린 거 아닙니까?”
도진이 어딜 끼어드냐는 듯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떴다. 22호는 조용히 웅크렸다.
“끼웅이요? 끼웅이 잘 있죠. 지금도 고구마 케이크를….”
끼웅! 끼우웅! 끼우우우우우웅!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요? 전 잘 모르겠네요. 왜 자꾸 끼웅이를 찾으세요, 스승님? 저는 밖에 두고 끼웅이를 예뻐해 주고 싶으셨어요? 둘만 있을 때만 기다리셨어요? …놀랐잖아요. 물론 그러실 분 아니란 걸 알아요.”
22호는 어쩐지 섬뜩함을 느끼면서 전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아, 네. 책 읽으세요. 그럼 저는 이만 끊을게요. …한 열한 시쯤 도착할 거예요. 네. 쉬세요, 스승님.”
도진이 정말 그렇게 용건 없이 전화를 끊었다.
끼우우웅…….
끼웅이가 절망하며 다시 고구마 케이크에 몸을 파묻었다.
“도진 씨, 유진 씨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리 선인님께 전화했던 게 아닙니까?”
“뭔 소리예요? 내 스승님이 그 사람의 이상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참나.”
“…….”
진짜로 그냥 이리 선인이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거였다.
그 흐름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22호는 억울했지만 김도진이 팔씨름으로 소 장군을 이기는 모습을 본 참이므로, 참았다.
그 또한 살아생전 운동도 하고 몸도 잘 썼지만 그래 봤자 인간 기준이지, 장사에게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진짜로 도와줄 사람한테 전화하죠. 핸드폰 꺼내세요.”
“저, 저요?”
“네. 저는 그 사람 번호 모르거든요.”
설마 유진 씨에게 직접 전화하려는 건 아니겠지? 의심하면서 핸드폰을 꺼내자 도진이 낚아채 갔다. 전화번호부에 ‘월직차사’, ‘이덕춘’을 쳐도 나오지 않자 도진이 의아하게 물었다.
“상사 전화번호도 저장 안 해 놓습니까?”
“아, 월직차사님을 말씀하시는 거였구나….”
핸드폰을 돌려받은 22호가 저장 명을 입력했다.
‘단순무식 장사놈’
“…….”
“…….”
사이가 점점 껄끄러워지는 둘이었다.
* * *
며칠 후 저녁, 이리와 도진은 오랜만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후 대여점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도희의 생일 기념 가족 식사에 이리도 참석했는데, 도희는 이리가 올 줄 몰랐기에 망아지처럼 기뻐 날뛰었다. 이리의 참석은 한달 전부터 얘기된 것인데, 부모님이 딸 놀라게 해 주겠다고 숨긴 보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도진의 가족과 식사하고, 은신술을 펼칠 필요도 없는 한적한 공원을 산책하니 이리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끼우웅.
끼웅이 또한 이리의 어깨에 걸터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가끔은 바람에 뒤로 넘어가려고 해서 이리가 붙잡아 줘야 했다.
“스승님, 저기 잠깐 앉을까요?”
“그래.”
운동 시설 앞에 놓인 벤치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잔챙이들이 기웃거렸다. 이제 잔챙이들은 이리 옆의 부리부리 김도진에도 익숙해져서 도진을 전처럼 겁내지 않았다.
뀨우뀨, 이리가 무릎 위로 올라온 다람쥐 잔챙이를 쓰다듬었다. 스스슷, 실뱀 잔챙이가 벤치를 타고 올라와 이리의 손목을 감았고, 뺘악뺙, 쇠박새 잔챙이가 포르르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끼웅이가 화들짝 놀라며 굴러떨어져 얼른 도진에게 넘어왔다. 도진이 주머니를 열어 주며 투덜거렸다.
“이 녀석은 아직도 잔챙이를 무서워하네. 너 언제 다 커서 독립할래?”
끼웅…….
끼웅이가 주머니에 쏙 들어가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겁은 나도 바람은 쐬고 싶냐.”
낑.
“네 맘대로 해라.”
도진이 피식 웃고는 읏쌰, 하며 앉은 채로 스트레칭했다. 허리를 오른쪽으로 한번, 왼쪽으로 한번 뒤틀다가 은근슬쩍 옆에 앉은 이리의 등받이 쪽으로 팔을 걸쳤다. 사실은 어깨에 걸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리가 바로 일어날 것 같았다.
“스승님, 오늘 날씨가 정말 좋아요. 우리 앞으로 저녁마다 산책해요. 이제 예전보다 시간도 많잖아요.”
“그래. 여유가 될 때마다 집 앞 산책하자.”
“사실 전화를 다 제가 받으면 더 여유 넘칠 텐데. 스승님은 일정을 빽빽하게 잡으니까요.”
“네가 일정을 너무 느슨하게 잡는 거야. 위아들은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데 일주일이나 걸리면 얼마나 초조하겠어.”
“왜 마음을 여유롭게 갖지 못하는 걸까요? 절 보세요. 저는 짝사랑한 지 20년이 되어 가지만 결코 초조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스승님이 제게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이리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느긋해서 그렇게 매일 벗고 다녀?”
“스승님, 큰 오해가 있나 본데 제가 벗고 다니는 건, 그래요, 물론 스승님을 자극하려는 마음도 있지만 반절 정도는 스승님이 제 몸을 좋아하셔서 즐거운 눈요깃감이 되어 주려는 마음도 있거든요? 옷 벗을 때마다 스승님이 은근히 제 복근을 눈으로 훑는 걸 제가 모를 줄 알아요?”
이리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정말 제자의 몸을 훑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금방 정신 차렸다.
“나는 그러지 않았어. 자꾸 내 의식을 네 마음대로 세뇌하지 마.”
“쳇.”
“22호에게는 그렇게 막… 상대를 세뇌하라고 하면 안 돼. 너한테 맡겨서 걱정이구나. 지금이라도 다른 좋은 상담자를 구해 줘야 할지.”
“상담자 누구요?”
“이해자라든가….”
“이해자 님은 연애를 오래 했지 짝사랑을 오래 한 게 아니잖아요.”
“바로 그런 부분에서 이해자가 적절할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완전 제가 적절해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저희 잘하고 있으니까. 내일모레 유진 님과 소개팅도 하기로 했어요. 주선자는 소 장군이고요.”
“그래?”
도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리의 어깨에 닿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느라 힘들었다.
“유진 님이 확고한 이상형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헤어스타일이랑 패션을 미리 다 짜 놨어요. 이제 내일 만나면 스타일 완벽하게 교정해서 내보내야 해요.”
도진과 22호는 이덕춘을 통해 유진의 이상형을 알아냈다. 다행히 22호의 짝사랑 상대는 도진의 짝사랑 상대와는 달리 이상형이 없어서 그들을 막연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소에 ‘나는 이런 사람이 좋더라’ 떠들고 다니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샤먼의 요하 같은 타입을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요하…?”
“예. 요하 같은 묘한 색기가 흐르면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가냘픈 병약미 타입이 좋다, 라고 말하고 다닌다던데 전 사실 그 여우 요괴 따위한테 대체 어떤 색기가 흐른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오히려 스승님의 무방비한 하얀 목덜미나 긴 속눈썹 그림자가 더….”
“22호랑 요하는 스타일이 정반대 아니야?”
민망해서 화제 전환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이리는 정말로 당황해서 물었다.
이리가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22호는 도진과 비슷한 건장한 체격에 각진 턱선, 짧은 스포츠 머리를 지녔다.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기보다는 보호해 달라고 외치고 싶게 생겼다. 창백한 피부만 제외하면 병약미라고 할 구석이 없었다.
“맞아요. 잘 기억하시네요.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으세요? 스승님은 제 얼굴만 기억하시면 되는데.”
“도진아….”
“저도 얘기 듣고 머리 한 대 처맞은 기분이긴 했죠. 유진이라는 사람이 남성미 넘치는 스타일을 좋아했다면 좋았을 텐데. 스승님은 몸 좋고 남성미 넘치는 스타일 좋아하시죠.”
“은근히 세뇌하지 말고. 진짜 어떡하려고? 오히려 주선자와도 사이가 틀어질 판이잖아.”“뭐, 저희도 나름대로 열심히-”
그때 도진이 갑자기 이리의 얼굴 정면 쪽으로 팔을 뻗었다.
퍼억! 둔탁한 소음이 이어졌다. 뺘악! 뀨우! 잔챙이들이 깜짝 놀라서 이리의 품에 파고들었다. 끼웅이도 도진이의 주머니 안에서 깡충 뛰었다.
“아, 씨발. 존나 놀랐네.”
이리의 얼굴 정면으로 날아오던 야구공을 낚아챈 도진이 욕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