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09화 (109/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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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소개팅 당일, 22호는 도진이 도희의 조언을 받아 미리 코디해 준 의상을 입었다. 소매가 긴 하얀 셔츠에 연하늘색 청바지. 평생 입을 일 없다고 생각했던 옷이었다.

변성대왕의 보좌관이 아닌 소개팅하러 나온 혼령 유진은 연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22호는 색상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에 꽃이 피는 기분이었다.

“어? 22호? 네가 여기 웬일이야?”

“아, 나는 소 장군이 소개팅해 준다고 해서….”

“뭐야! 상대가 너였어?”

유진은 소개팅 상대가 22호라는 걸 알고 처음엔 김이 빠진 듯했으나 곧 박장대소를 했다.

“소 장군이 좋은 사람이라고 엄청나게 칭찬했는데 설마 너일 줄이야. 소 장군은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걸 몰랐나 봐.”

“그, 그러게. 크흠. 일단 들어갈까?”

22호는 시치미를 뚝 떼고 카페로 들어갔다. 앞서가는 22호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유진의 시선이 22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빠르게 훑었다. 분명 22호가 맞는데 분위기와 이미지가 너무 달라져서 신기했다. 22호는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척했다.

“뭐 마실래?”

“네가 쏘는 거야?”

“당연하지.”

“좋아. 그럼 난 민트 프라푸치노. 디저트는 체리 초코케이크.”

“갖고 올게.”

음료와 디저트를 시키러 22호가 일어났다. 옆 테이블을 지나치면서 앉아 있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 남자는 물론 김도진이었다. 억지로 끼웅이를 데리고 나와 초코케이크를 먹이며, 제 고객이 시킨 대로 잘하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22호와 유진은 음료와 디저트를 먹으며 대화를 해 나갔다.

“그런데 너 살 빠졌나…? 사람이 좀 해쓱해 보이네.”

“응. 요 근래 저승의 미래를 생각하며 고민하다 보니 살이 좀 빠졌어. 본래부터 몸이 좀 안 좋았기도 하고….”

“몸이 안 좋았구나. 몰랐네. 근데 저승의 미래를 네가 왜 생각해?”

“우리가 살아갈 터전이자 직장이니까. 내가 주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책임감을 갖고 있어.”

22호는 도진의 조언대로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어린 나이에 시왕의 보좌관이 되었으니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으리라는 추측이었다. 그 추측이 들어맞았는지 유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 우리는 삶의 터전과 직장이 같은 곳이니까 항상 책임감을 가져야지. 잘하고 있어.”

“응.”

22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너 머리카락도 본래 이렇게 묶을 정도로 길었나? 되게 짧은 스포츠머리 아니었어?”

“살아생전엔 그러고 다녔는데 원래는 늘 장발을 하고 싶었어.”

“그랬구나…. 잘 어울려.”

22호가 두 번째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너 옷차림은 또 왜 그래?”

“옷차림이 왜?”

“하얀 셔츠에 연하늘색 청바지라니. 본래는 트레이닝복이나 새카만 옷만 입고 다녔잖아.”

“나도 가끔은 이런 옷을 입어. 기본적으로 패션에는 신경 쓰면서 살고 있거든.”

“되게 의외네. 잘 어울리니까 됐다만….”

세 번째 쾌재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도진 씨, 느낌이 좋아요. 이 소개팅은 성공 같아요! 그런 기쁜 눈으로 슬쩍 옆 테이블의 남자를 쳐다봤는데, 김도진은 어째서인지 낭패감 가득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22호는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데 도진의 얼굴이 왜 저 모양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유진아. 너도… 잘 어울려. 지금 그 옷…. 예쁘다.”

“그래? 고마워. 난 존나 후회 중이야. 이렇게 더울 줄 몰랐어. 지금 좀 겨땀 났어.”

유진이 오른팔을 들어서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였다. 22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그렇구나. 에어컨 더 낮춰 달라고 할까?”

“아니야. 인간들 추워서 뒤지면 괜히 저승 일만 많아지니까 내가 견뎌 볼게.”

그 대화를 듣던 옆 테이블 남자 김도진의 얼굴은 점점 더 죽상이 되어 갔다.

22호는 긴장한 티가 역력한데 유진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 대하듯 편했다. 말투도 편하고, 자세도 편하고. 땀에 젖은 겨드랑이까지 보여 주다니, 이게 웬 말인가.

도진은 만약 이리 앞에서 제 겨드랑이에 땀이 난다면 가진 덕을 모두 소진해서라도 증발시켜 버릴 것이다. 진현계에 출입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땀 찬 겨드랑이는 보일 수 없다.

“안 되는데…. 썸을 타는 사이라면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스승님과 나처럼.”

자고로 스승님과 나처럼 묘한 긴장감이 흘려야 썸타는 사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이다.

끼웅?

끼웅이가 ‘스승님’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초코 크림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스승님 안 계셔. 더 처먹어.”

도진이 끼웅이의 뒤통수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끼우우….

잡귀에게 2차 가출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다시 22호와 유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가 어색하게 멈춘다거나 화제가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절친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이라고는 없었다. 유진이 22호를 그런 쪽으로는 전혀 보고 있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미련하게 쾌재만 부르던 22호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점점 말투에 자신감이 없어졌다. 유진은 민트 프라푸치노를 마시면서 가벼운 투로 말했다.

“소개팅이 아니게 된 건 좀 아쉽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인간 음식 먹으니까 좋지 않냐. 저승에도 민트 프라푸치노 도입하고 싶다.”

“어, 어. 맞아. 그러게.”

“나 체리 이빨에 낀 것 같아.”

급기야 유진은 핸드폰 카메라에 대고 이를 비쳐 보면서 휴지로 이 사이에 낀 이물질을 제거했다. 22호는 울지 않기 위해 주먹을 꾹 쥐었다. 숨어서 지켜보는 도진 또한 안쓰러운 마음에 눈썹을 팔자로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나는 저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도 양치질을 해야 할 줄은 몰랐는….”

유진이 문득 말을 멈추고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봤다. 22호와 도진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옅은 갈색 머리를 낮게 묶어서 한쪽으로 늘어뜨린 헤어스타일에 하늘하늘한 흰 셔츠, 연하늘 청바지를 입은 172cm, 50kg의 인간 남자가 머그컵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아슬아슬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음료는 생크림이 올라간 핫초코였다.

병약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인간 남자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아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는 여기까지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심력을 쏟았다는 듯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무테안경을 착용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사는 12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꺼냈다. 책등을 바친 손가락은 무척 길고 가늘었다.

“…….”

유진의 입이 벌어졌다.

“와…….”

“…….”

“저 사람 좀 봐. 완전 내 스타일이야…. 하아. 단명할 것 같은데 꼭 재판에 참관하고 싶어….”

이 자리가 나름대로 소개팅 자리라는 걸 완전히 잊은 듯했다.

‘끝났네.’

‘끝났어.’

도진과 22호가 시선을 마주쳤다. 22호는 슬픈 얼굴로 끄덕였다.

‘노력했지만 무리였군요.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떠나갈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다운 법이죠….’

무언을 주고받은 22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디저트 좀 더 시킬게.”

“그래. 많이 먹어.”

유진은 병약남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 22호는 짝사랑도 끝났고, 다이어트도 끝났으니 있는 디저트를 다 쓸어 오자는 심정으로 일어났다. 기운이 없어서 걸음걸이가 비틀거렸다.

“여기 있는 디저트 전부 다 하나씩 주세요.”

“네?”

“전부 하나씩 주십시오.”

“아, 네….”

모든 종류의 디저트를 하나씩 담자 쟁반이 가득 찼고, 무게도 상당했다. 본래 22호는 이 정도 무게쯤이야 손가락 두 개로도 들 수 있으나 지금은 몸도 마음도 지쳐서 더 무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아, 배고파. 빨리 배 속에 처넣어야지. 사랑을 잃은 영혼을 달달한 디저트로 달래야겠어….

조바심까지 들어서 걸음을 재촉하는데 한순간 눈앞이 노래지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야, 조심해!”

크게 휘청이며 넘어지려는 22호를 유진이 얼른 다가와 부축했다. 한쪽 손으로는 22호의 허리를 안고, 한쪽 손으로는 쟁반을 들었다. 디저트는 다행히 모두 살아남았다.

“야, 괜찮냐?”

“어… 잠깐 현기증이….”

“대체 얼마나 몸이 안 좋길래 이렇게 쓰러지는 거야?”

“으…. 미안. 좀 쉬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22호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두통과 현기증을 호소했다. 단기간의 급격한 체중 감량의 부작용을 겪는 22호를 유진이 빤히 응시했다.

“…….”

그때 도진은 유진이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입매 양 끝을 끌어 올리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유진은 묘한 시선으로 혼잣말했다.

“덩치 큰 남자가 쓰러지는 것도… 꽤나….”

그녀는 멸종 위기종을 발견한 생물학자처럼 짜릿짜릿해하고 있었다. 22호를 부축해서 몸을 일으키고 자리에 앉히는 내내 희열과 전율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끼우웅….

섬뜩해진 끼웅이가 도진의 손안에 숨었다. 도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이렇게 해결된다고…?

아니, 근데 괜찮은 걸까?

저런 취향으로 괜찮은 거야?

22호는 짝사랑이 안 이루어지는 쪽이 더 행복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남의 일이니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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