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11화 (1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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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님, 저도 이런 팔찌 갖고 싶어요.”

“선인님, 앞으로 자주 봬요. 네? 연회 자주 오세요.”

“이리 선인, 저랑 같이 뱃놀이하러 갑시다.”

이 두통의 원인 중에 제 주위를 빙 둘러싼 이들의 영향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계속 얘기 나누고 있으렴.”

“어디 가세요? 벌써 나가시는 건 아니죠?”

“벌써 빠지면 나비한테 혼나는데 어떻게 나가겠어.”

“그럼 어디에 다녀오시려구요? 같이 가요!”

이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진현계 주민들을 훑었다. 여간해서는 연회에 오지 않는 이리를 봐서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 있었다. 순수한 감정으로 저를 좋아해 주는 이들에게 ‘너희 때문에 너무 시끄럽고 머리가 아파서 좀 쉬려고.’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난감하던 차에 조금 떨어져 있던 나비가 이리를 불렀다.

“이리!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할 말 있는데 잠깐 시간 좀 내줘.”

“응?”

“빨리 와. 다들 얘기 나누고 있어요. 이리랑 나는 잠깐 토론할 게 있어서.”

나비가 이리의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이리는 눈을 깜빡이며 나비를 따랐다.

짤랑, 짤랑. 화려한 장신구가 흔들리든 말든 빠르게 걸어서 도착한 곳은 그나마 이 궁궐에서 가장 한적한 후원이었다. 나비의 권속들이 진현계 주민들을 피해 모여 있다가 둘을 보고는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무슨 할 말?”

“할 말은 뭐가 있겠어. 네가 머리 아파 보여서 잠깐 피하라고 데리고 온 거지. 고맙지?”

“고마워. 티가 많이 났나?”

“티 별로 안 났어. 사람들은 모를 거야. 나는 네 친구니까 알았지.”

나비가 오색 실을 화려하게 수놓은 우의(羽衣)를 펼쳐 훌쩍 날아올라 연못 중앙에 떠 있는 나룻배에 올라탔다. 너도 얼른 와, 라는 시선에 이리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는 연못으로 향했다. 마치 평탄한 땅 위를 걷듯 느긋하게 수면을 걸어서 나룻배에 올랐다.

“뱃놀이는 역시 낮보다는 밤이 좋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나비가 손을 허공에 휘젓자 푸른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노란 해 대신 하얀 달이 떠올랐다. 사방이 캄캄해지자 풀벌레들이 기다렸다는 듯 울기 시작했다. 반딧불이들 또한 연둣빛을 발하며 날았다. 이리는 연못에 비친 까만 하늘과 하얀 달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겠는데.”

“안 당황해. 나는 낮과 밤을 틈만 나면 바꿔서 다들 익숙하거든. 이리 너는 내 연회에 처음 와서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비의 말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사실 나비가 선인이 된 지 2천 년도 넘었는데, 그동안 단 한 번도 연회에 오라는 초대를 수락하지 않았으니 이리가 생각해도 너무 매정하기는 했다.

“여기서 좀 머리 식히다가 한 시간 후에 나가자. 너는 대여점에 돌아가고 싶겠지만 아직은 돌려보낼 수 없어. 이따가 활쏘기 시합도 할 거거든.”

“난 그냥 구경만 하면 안 될까?”

“그럴 순 없지. 네가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아주 그냥 단물을 쫙쫙 뽑아낼 거야. 아니면 앞으로 자주 오겠다고 약속하든가. 그럼 오늘 활 안 쏘게 해 줄게.”

“…….”

“이것 봐. 말 못 하지. 너 오늘 활 다섯 발 쏴. 한 번만 쏴도 봐주려고 했는데 괘씸해서 안 되겠어.”

나비는 말하다 보니 서운한지 볼멘소리가 되었다. 이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거 알아? 내가 너랑 친구라고 말하면 다들 비웃음부터 흘려.”

“…왜?”

이유가 짐작 갔지만 분위기상 왜냐고 물었다.

“왜긴 왜겠어! 너는 씨, 태고의 선인이고 나는 이제 이천 살 좀 넘은 어린 선인이니까 그렇지.”

나비는 턱을 괸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들 똑같이 얘기해. 태고의 선인이 어떻게 너와 친구겠냐고. 살아온 시간이 그렇게 많이 차이 나는데 얼마나 뻔뻔하면 친구라고 주장하냐고. 실제로 너는 내 연회에 한 번도 오지 않았으니 다들 내 착각이라고 말한다구…. 이게 얼마나 X같은 일인지 넌 모르겠지.”

“조심해. 덕 날아가겠어.”

“이 정돈 괜찮아. 난 권속이 매우매우 많으니까. X같다고 수백 번도 말할 수 있어.”

권속이 1021명인 나비는 새침하게 말하며 이리를 쏘아보았다.

“우리 친구잖아. 그렇지?”

“당연히 우리는 친구지.”

거짓말 못하는 이리에게서 확답을 받아도 뚱하게 부푼 볼을 보며 이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 얘기는 듣지 마. 이간질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곧 진현계에서 쫓겨날 거야.”

“죄다 이미 쫓겨나긴 했어. 그리고 오늘의 참석으로 다들 우리가 친구라는 걸 인정하겠지. 속이 시원해.”

정말 속이 시원하다면 이렇게 시큰둥한 표정이 아닐 것이다. 이리는 나비의 복잡한 마음을 이해했다.

사실 나비가 이리에게 말을 놓고, 친구로 대하는 건 이상한 일이긴 했다.

왜냐하면 나비의 스승이었던 문하 선인도 이리에게 극존칭을 사용하며 정중히 대했으니까.

환생을 결심한 문하가 진현계에서 보낸 마지막 날, 문하, 이리, 나비 셋이 모여 차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날도 딱 이런 고요한 연못에 배를 띄우고 담소를 나눴다.

‘선인님, 제 제자를 잘 부탁합니다. 아주 발랑 까진 것이라 선인님처럼 잔잔하고 고요한 분께서 옆에 있어 줘야 합니다.’

‘알았어. 나비는 걱정하지 마.’

‘저기요. 저도 이제 선인이거든요? 제 권속이 무려 400마리도 넘거든요? 두 분보다 많거든요?’

‘…선인님, 보세요. 이런 녀석입니다. 300살이 넘었는데도 이토록 점잖지 못해서 걱정이 많습니다.’

제 스승의 발언에 나비가 또 투덜거렸는데, 그 투덜거림의 내용은 ‘나는 점잖다’가 아니라 ‘왜 점잖아야 하느냐’였다. 그 당시 진현계 분위기는 점잖고, 조용하고, 고상하며 서로 공손히 예의를 갖추며 대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나비는 격식 차리는 것을 싫어하고 가볍고, 즐겁게 살아가는 길을 추구했다.

이리는 문하와 나비의 중간에 있었다. 그때도 이미 ‘대선배’였기 때문에. 그가 격식을 차릴 만한 존재는 임금님 하나뿐이고, 반면 이리에게 격식을 차려야 하는 존재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나를 너무 어렵게 대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문하야. 진현계에는 나비 같은 아이도 있어야 해. 나는 나비가 진현계에 좋은 바람을 몰고 올 거라고 생각해. 너무 조용하고 고요하기만 해서는 곧잘 썩어 버리곤 하니까.’

이리의 말에 나비가 감동한 듯 ‘선인님….’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조용하고 고요하다라….’

문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사실 선인님도 걱정입니다.’

‘나? 나는 왜?’

‘예. 선인님의 감정은…….’

‘…….’

‘아닙니다. 그저 죽을 때가 되어서 쓸모없는 걱정을 하는 게지요.’

문하는 그때 걱정하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지만, 이리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선인님의 감정은 너무 조용하고 고요하다’라고 말하려던 게 아닐까 싶었다.

‘모쪼록 나비를 잘 부탁드립니다. 선인님도, 나비도 상대를 중화시키면 좋겠군요. 아니면 이건 어떻습니까?’

뭐? 하고 묻자 문하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둘이 친구가 되는 겁니다.’

‘친구? …누구랑 누가?’

‘선인님과 제 제자 말입니다.’

‘제가 이리 선인님이랑 친구요?’

나비가 생선처럼 펄쩍 뛰고는, 지레 찔려 이리에게 손사래를 쳤다.

‘선인님. 싫어서 놀란 게 아니라, 놀라서 놀란 거예요. 아시죠?’

‘알아.’

‘친구라니. 어떻게 태고의 선인님이랑 이제 막 선인이 된 제가 격 없이 지내겠어요…? 호랑나비랑 애벌레가 친구하자는 거랑 똑같다구요. 스승님도 참 이제 곧 죽는다고 아무 말이나 하시고. 술이나 마셔요. 차가 아니라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아.’

나비는 횡설수설하며 찻물을 술로 바꾼 후 얼렁뚱땅 건배했다.

결국 이리와 나비는 문하 선인의 유언으로 친구가 된 것이다.

태고의 선인과 어떻게 격 없이 지내겠냐며 기겁하던 것도 처음 몇 년뿐이고, 이제는 “야, 이리!”하고 뒤에서 달려와 어깨동무를 시전하게 되었다.

“이리, 다음 달이 한로(寒露)야.”

이리는 나비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응.”

“이슬은 우리 진현계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잖아.”

“그렇지.”

‘아주 오랜 옛날, 어느 태고의 선인이 문득 앞뜰로 나가 보니 풀잎마다 거미줄이 생겨 있었다. 치우려고 다가가자 거미줄에 이슬 한두 방울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태로운 모습이 사랑스러워 가만히 구경하다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니 잔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선인은 그 후로도 또 이슬이 맺힐까 거미줄을 치우지 못했다…….’

거미줄의 이슬. 태고의 선인에 대한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진현계의 존재들은 찰나의 이슬을 그리워해서 보기 싫은 거미줄을 치우지 못한다는 이 전설에 많이들 공감했다. ‘이슬’은 진현계에서는 필멸자에 대한 불멸자의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24절기 중 이슬이 포함된 절기는 진현계에선 나름대로 기념일이었다.

“연회까지는 아니고. 그냥 잔치를 좀 크게 열 생각인데 너도 올래? 그때는 활 안 쏴도 돼.”

매번 거절당하면서도 꿋꿋이 부탁한다. 이것도 친구 사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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