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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113화 (113/203)

113

“그 녀석이 깨어난 뒤 내가 죽은 것을 알면 얼마나 자책할지…….”

“…….”

“우리의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오. 우리는… 우리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란 말이오. 내가 그 녀석과 화해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녀석은 영물이 되어서… 그 긴 삶을 살면서… 천 년이 넘도록 영생하면서 내내 나의 일을 가슴에 간직할 게 뻔하오.”

금서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도진의 앞주머니도 축축이 젖었다. 감성 넘치는 끼웅이가 진즉부터 울고 있었던 탓이다. 도진은 끼웅이를 꺼내지는 않고 대신 티슈만 한 장 넣어 줬다.

“영물이 되는 날에도 그 기쁨은 누리지 못하고, 혹여 후에 신령이 된다고 하더라도 오래전에 죽은 친구에게 자기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고약한 말만 되뇌겠지. 목백일홍이 피는 계절이면 슬픔과 후회에 온몸을 가누지 못할 테고, 그리도 좋아하던 배롱나무는 쳐다보지도 않게 되겠지…. 나는 그렇게 둘 수 없소.”

“…….”

“내가 죽는 건 상관없소. 그러나 둘도 없는 친한 친구의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가져가고 싶지는 않소. 긴 삶을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그 소중한 감정들을 빼앗고 싶지 않소.”

긴 삶을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소중한 감정들.

도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리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이리는 그저 늘 그렇듯 고요한 표정으로 금서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리 선인, 도와주시오. 여느 때처럼 사과하고, 사과받고, 화해한 후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해 주시오…. 나는 더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외다. 단지 친구와 화해하고 싶을 뿐이오.”

그때 네가 내게 한 고약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상처받지도 않았고, 절대로 원망하지도 않으니 너는 걱정 말고 네 삶을 살아가라.

금서는 그 말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이지 안타깝고 애절한 사연이었다.

끼이잉.

훌쩍거리는 끼웅이 말고는 다들 말이 없었다.

이리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도진이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냥 지네를 잠에서 깨우면 되잖아요. 잠이 든 거라면서요. 그러면 잠에서 깨우면 되는데 뭐가 문제예요?”

“영물 전 단계의 잠에서 강제로 깨우면 영물이 되지 못해.”

“어쩔 수 없죠. 와가 감당할 문제죠.”

“절대 안 되네! 와가 영물이 되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수련했는지 아는가? 와는 반드시 영물이 되어야 하네! 와의 평생소원이네!”

금서가 몸뚱이를 어항에 부딪치며 절대 반대를 온몸으로 외쳤다.

“젠장. 화해를 하고 싶으면 영물을 포기시키든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다가 두 마리 다 놓치는 법입니다.”

도진이 금서를 향해 엄격하게 말했다. 하지만 금서는 못 들은 체하며 등을 돌렸다.

백액호 또한 안타까운 마음에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리 선인, 금서의 수명을 조금만 늘리는 건 어떻습니까?”

“얼마 전에도 인간 한 명의 수명을 늘린 적이 있어서요. 저승과의 마찰은 더는 곤란합니다.”

이번엔 도진이 딱 잘라 거절했다.

셋은 다시 고민에 잠겼다. 금서가 자꾸 눈물을 흘려서 어항 물이 찰랑거릴 지경이 되었다. 끼웅이가 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어항에 달라붙었다.

끼웅…. 끼우웅.

“이리 선인. 나는 이 잡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소. 뭐라고 하는 것인가?”

“분명 잘 화해할 거라고 위로하고 있어.”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내가 전달하지 않아도 알아듣는단다.”

“고맙다. 잡귀야. 이리 선인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분명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끼우웅….

끼웅이가 어항에 얼굴을 비볐다. 이리는 그 모습을 보며 검은 실팔찌를 만지작거렸다.

“……?”

늘 이리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도진은 이리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다.

이리가 난감해하고 있다.

화해시켜 줄 방법을 찾지 못해서 난처해하는 게 아니었다.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 그 수단을 쓰고 싶지 않아서 난처해하는 것이다.

도진은 뭐 때문이냐고, 무슨 위험한 방법이냐고 물어보려다가 괜히 백액호와 금서에게 그 사실만 알려 주는 꼴이 될까 봐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어.”

제자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리가 곧장 입을 열었다.

“와의 꿈에 들어가서 만나면 돼.”

“오오, 그런 이물도 있습니까?”

“‘몽종(夢鐘)’이라는 이물이야. 잠깐이지만, 꿈에 들어가서 서로 만질 수도 있고, 대화도 나눌 수 있어.”

금서가 폴짝 뛰어올랐다.

“꿈! 당장 들어가게 해 주오! 당장 박물관으로 돌아가서 그 녀석과 화해하도록-.”

“며칠간 작업이 필요해. 햇빛과 달빛과 새벽이슬을 받아야 하거든. 네가 죽기 전에는 처리를 끝낼 테니까 일단 돌아가서 기다리렴.”

이리는 평소와 같이 상냥하고 친절했다.

도진이 들어 보니 꿈에 들어가서 화해하는 건 적절한 방법이었다. 마침 그런 이물도 있다면 규율이 어긋난 행위도 아닐 터다. 대체 왜 이리가 주저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월요일에 보자, 금서야.”

“알겠소. 기다리겠소!”

“선인님, 나는 그날 일이 있어 함께 있지 못합니다.”

“샤먼이 뭐 한대?”

“…….”

백액호가 희고 긴 눈썹을 움찔했다.

“그래. 우리가 거울못으로 금서를 데려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취미 생활을 즐겨.”

“감사합니다.”

산신령이 어항을 들고 훨훨 날아오르고, 대여점 대문을 닫자마자 도진이 이리에게 물었다.

“스승님, 꿈속에 들어가는 게 혹시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인가요?”

“아니. 왜?”

“아까 망설이셨잖아요. 꿈에 들어가는 이물이 있다는 걸 말할까, 말까 하고. 그 까만 실팔찌를 만지작거리셨잖아요.”

“…그걸 그새 봤어?”

“그럼요. 저는 항상 스승님을 지켜보고 있거든요. 스승님이 난감할 때마다 그 팔찌 만지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죠.”

이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끼웅이가 까만 실팔찌를 툭 건드렸다. 그림자인 끼웅이도 검은색이지만, 이리의 실팔찌는 그보다도 더욱 새카맸다. 빛조차 흡수해 버리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이리는 팔찌를 톡톡 건드리는 끼웅이를 손으로 감싸 어깨로 옮기고 과자 조각을 건넸다.

“사실 예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어. 그때는 인간이었는데…. 어떤 농사꾼이 둘도 없는 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잠시 헤어졌는데 그 친구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내게 찾아와 어떻게든 화해를 한 뒤에 친구를 보내게 해 달라고 빌었어.”

“그래서 뭉종을 빌려주셨고요?”

“그때는 대여가 아니라 판매였어. 그런데 크게 다친 쪽이 퇴마사였거든. 퇴마사가 꿈에서 농사꾼 친구를 만나고, 자기가 곧 죽는다는 걸 알자 친구에게 혼을 바꾸는 주술을 사용해 버렸어.”

“미친 새끼, 인간도 아니네요.”

끼웅끼웅!

“나는 그 일을 모르고 있다가 한참 후에 저승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 줘서 알았어. 그때야 부랴부랴 뭉종을 수거했고…. 꿈은 내 시야를 벗어나기 때문에 꿈에서의 일은 나조차도 알지 못한단 말이야. 대화도 듣지 못하고. 당연히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리지 못해.”

“그런 부작용이 있었다면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도진이 말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와는 앞으로 천년을 살지만, 금서는 이제 곧 죽잖아요. 수명을 바꾸진 않을 텐데….”

“…….”

“아…! 덕을 빼앗아 갈까 걱정했던 거군요!”

금서는 도진이 보기에도 덕이 풍요로웠다. 200년 살면서 덕을 성실하게 모아 온 듯 보였다. 다음 생을 위해 아껴 쓴 것이리라. 그 정도 덕이면 저승에서 일을 하거나 수련할 필요 없이 바로 좋은 환경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다.

반면 와는 영물이 되기 위해 힘들게 수련했고, 영물이 되는 게 평생소원이라고 했다.

친구가 곧 죽는다는 걸 알고, 달콤한 말로 구슬려서 덕을 가져간다면?

꿈에서의 일은 이리도 막을 수 없다. 금서가 스스로 준 것이니 와는 처벌받지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던 도진은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와가 부탁하지 않아도 금서가 나서서 주겠는데요.”

“맞아. 금서는 지금은 일단 화해가 너무 하고 싶어서 그 생각까지는 못 하고 있지만, 얼굴을 마주하면 생각이 나겠지.”

“하지만 스승님, 저는 뭐 어떤가 싶어요. 본인이 원해서 주겠다는데 뭐…. 스승님이 걱정하실 일이 아니에요.”

심각한 사안으로 여기지 않는 도진을 보고 이리가 눈을 깜빡였다.

“너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심각하게 여길까?”

“스승님 관련이 아니라면 딱히. 만약 꿈에서 덕을 주고받은 일로 스승님이 곤란해진다면 저도 심각해지겠죠.”

그렇다고 이리는 그 일로 자기가 곤란해진다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도진은 제 어깨로 이리의 어깨를 슬며시 건드렸다.

“놔두세요, 스승님. 안 그래도 규율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데 괜히 다른 일로 사서 걱정하지 말자구요. 친한 친구라잖아요. 상대에게 해가 될 짓은 안 할 거예요. 그게 바로 친구라는 거니까요.”

“도진아. 너 친구 있어?”

“이, 있거든요?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

“연락 자주 해?”

“…스승님은요!”

도진이 울컥하며 외쳤다.

“스승님도 나비 선인이랑 보부상 형이 끝이잖아요. 오히려 제가 더 많은데요? 저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열 명도 넘어요. 스승님은 두 명뿐이구요.”

“내 친구들은 거의 다 죽어서…….”

“…….”

“…….”

끼우웅.

끼웅이가 이리의 뺨을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도진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죄송해요, 스승님. 제가 잘못했어요. 저는 정말 철이 없어요.”

“아니야, 괜찮아. 아무튼 네 말대로 서로 해가 될 일은 안 할 거라고 믿어야겠구나. 이제 작업하자. 곧 다음 고객이 올 거야.”

“…….”

도진은 이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죄책감으로 인해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을 보며 이리는 ‘그래도 이럴 때는 심각해지긴 하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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