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17화 (11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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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보이는 대로 번호를 적어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눈앞이 어른거려서 숫자가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서 문득문득 눈앞이 흔들릴 때가 많았다. 병인가? 현기증인가?

(익명) ㅋㅋㅋㅋ번호 보인다는 사람 어디감?

(익명) 에혀 관종색기

(익명) 금방 들킬 관종짓은 왜 하나 몰라

(익명) ㄴ그게 바로 관종이니까.

(글쓴사람임) 아 진짜이길 바랬는데ㅠ 저기 뭐하는덴지 진심 궁금하단말임

잠시 멈춘 사이 조롱이 이어졌다. 지수가 미간을 좁히며 집중했지만, 마치 물에 번진 것처럼 흔들리고 흐려져서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글자는 잘만 보이는데 숫자만 그랬다. 결국 댓글을 달지 못하고 어그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요즘 왜 이래. 안과에 가 봐야 하나….”

버릇처럼 혼잣말하며 페이지를 닫으려다가 멈칫했다.

“아, 장난하냐고. 진짜!”

방금 전만 해도 흐릿했던 스크린샷 속 숫자 열한 자리가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관종으로 몰고 있는 댓글러들한테 알려 주려다가 문득 낚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걸 나는 본다. 나는 특별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낚아서 비웃으려는 낚시인가?

아니면 다 같이 무언가를 못 본 척하는 유행 같은 건데 내가 모르고 있나?

지수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선명하게 잘 적혀 있으니까. 멀쩡하게 잘 적힌 숫자가 누군가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걸 평범하게 살아온 지수로서는 믿기 힘들었다.

결국 댓글은 남기지 않기로 했다.

“근데 이 구인글 진짜면 엄청 좋은 곳인데…. 에이, 진짜겠어.”

신경 끄려는 그때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서랍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떨어지면서 뭐가 눌렸는지 전화 키패드는 켜진 상태였다.

지수는 잠깐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나이 무관이랬으니까.”

지수의 나이는 18살이고, 지금은 평일 한낮이다. 또래 애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겠지만 지수는 반지하 방에서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다.

2년 전부터 혼자 살면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학교 선생님한테 자퇴서를 제출하고 종일 일할 곳을 찾고 있었다.

‘지수야. 무슨 사정이 있어? 선생님이 도와줄게. 자퇴는 하지 말자.’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알바 해서 버는 돈으로는 빚을 갚기가 어려웠으니까. 그리고 선생님한테 빚이 있다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알바 사이트를 뒤지며 여기저기 찾고 있는데, 청소년을 써 주는 곳은 최저 시급인 곳이 많았다. 매달 빚 갚고 나면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아야 할 판이었다. 간혹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해져도 병원에 가 볼 엄두도 못 냈다.

이 이상한 골동품점에 대한 글도 새 알바처를 찾다가 우연히 읽은 것이다.

연봉 4천이라는데, 지수는 연봉이란 개념이 어색했다.

“그럼 한 달 월급은 얼마인 거지? 4천만 원 나누기 12…. 333만 원?”

333만 원의 절반, 아니, 그냥 매달 딱 100씩만 들어와도 공부와 병행이 가능하다. 그럼 당장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자퇴 취소해 달라고 할 텐데.

“어떤 골동품점인지는 몰라도 뭐 편의점이랑 비슷하겠지.”

지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적혀 있는 핸드폰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네. 이리 만물 대여점입니다!

연결음이 두 번 울리고 아주 잘생긴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어째서인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아, 아, 안녕하세요.”

알바를 한두 번 구해 본 게 아니라 전화 면접을 봐도 잘 떨지 않았었는데, 어째서인지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네. 무슨 일이세요. 용건 빨리 말씀하세요.

와. 성격 안 좋아 보인다. 그냥 끊을까?

“아, 그게… 제가 인터넷을 하다가.”

-인터넷이요?

“대여점… 구인글을 봐서.”

-…구인글?

“네…. 그… 아르바이트.”

-아르바…!

전화 건너편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났다. ‘스승님! 와씨, 미쳤다. 알바생이에요. 알바생! 이번엔 진짜!’ 하는 목청 큰 외침이 들렸다.

지수는 어쩐지 전화를 끊고 싶어졌다.

* * *

다음 날, 지수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는 성숙하면서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면접 장소로 향했다. 면접 장소는 대여점이 아니라 카페였다. 카페에서 면접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알바 사이트의 게시판에 검색해 보니 요즘엔 카페 면접이 더러 있다고 했다.

현재 시각 오후 1시 40분,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해서 카페 앞을 서성였다. 무더운 날씨에 숨이 턱턱 막혔다. 에어컨이 있는 시원한 카페 안에서 아이스 초코나 마시며 기다릴까 했지만 참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혼자 들어가면 내가 내 돈으로 음료를 시켜야 하지만, 대여점 사장과 함께 들어가면 분명히 음료를 사 줄 테니까.

요즘 음료가 오천 원이 넘는다. 이렇게 야금야금 나가는 오천 원이 모이다 보면 금방 오만 원이 되기에 밖에서는 물 한 방울 마시지 않는 지수였다.

‘20분만 견디자.’

쨍쨍한 햇빛 아래에서 땀을 닦는 그때 지잉- 진동이 왔다. 이리 만물 대여점 사장님의 번호였다.

“여,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최지수 씨, 우리는 지금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어제 통화했던 사나운 음성이 아니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 벌써요?”

-네. 혹시 왔다면 안으로 들어오세요.

“사실 지금 바로 앞이거든요. 바로 들어갈게요!”

신기하게도 지수가 일찍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전화가 왔다.

지수가 얼른 문을 밀었다. 짤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알바생이 어서 오세요!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페 알바 유경험자로서 빠뜨리지 않고 인사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저 지금 들어왔어요. 어디 앉아 계시는….”

두리번거리던 지수는 소파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 둘을 보고 입을 벌렸다. 살면서 직, 간접적으로 보아 온 사람 중 가장 잘생긴 얼굴들이었다. 하얀 사람은 뭔가 청아하게 예쁘고, 키 큰 사람은 이목구비 뚜렷하고 부리부리한 게 왠지 위압감이 들었다. 시선을 피하려는데 키 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 뭐. 왜….”

“알바 면접 보러 왔어? 요?”

“아…. 네. 대여점 사장님…?”

“사장님은 저쪽에 앉아 계신 분이고, 나는 직원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 네….”

지수는 남자의 박력에 완전히 눌린 채 뒤를 따랐다. 부리부리하고 잘생긴 남자는 하얗고 예쁜 사람의 옆에 앉았다.

뭐야. 두 명이나 오다니! 그것도 이렇게 잘생기고 예쁘다니. 저 사장이란 사람은 성인이긴 해?

지수는 심한 압박감으로 주먹을 덜덜 떨었다.

이게 바로 압박 면접인가? 미모로 압박하다니. 정말 치사하다. 그러나 333만 원이라는데 이 정도 압박은 받아들여야겠지.

지수는 그 맞은편에 앉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최지수입니다.”

하얗고 예쁜 사람이 생긋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전화는 이만 끊어도 돼요.”

“아.”

지수는 그제야 아직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는 걸 알고 얼른 끊었다. 몹시 부끄러웠다.

“음료는 뭐 마실래요?”

“아이스 초코…. 아, 아니.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사 올게요.”

부리부리한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최지수 씨.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열여덟 살인데, 아르바이트 경력도 많고 오래 일할 수 있어요. 남자만큼 힘도 세서 무거운 짐도 잘 들어요. 여기 제 이력서요.”

대여점 측에서 이력서 가져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일단 준비했다. 가방에는 이력서 말고도 청소년증과 통장 앞면 사본, 등본 사본도 준비되어 있었다.

하얗고 예쁘고 어려 보이는 사장님은 이력서를 천천히 훑다가 지수가 열일곱 살에 찍은 증명사진에서 멈췄다.

‘꼴뚜기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사장도, 직원도 워낙 외모가 출중하니 알바생의 외모도 볼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수는 평소에 자신이 못생겼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둘 앞에서는 자격지심이 저절로 들었다. 불안하게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와중에 부리부리한 남자가 아이스 초코를 가지고 돌아왔다. 휘핑크림이 가득 올라가 있었다.

성숙해 보이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말했는데 실수인지 아이스 초코를 들고 왔다. 이때 지적하지 않는 게 성숙한 거겠지?

“감사합니다.”

지수는 달콤한 아이스 초코를 마시면서 앞으로도 계속 카페에서 면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 이력서도 가지고 왔어요? 애가 빠릿빠릿하네. 근데 생각보다 어리네요. 열여덟 살이면 되게 까마득하다.”

“너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잖아.”

“2년이면 강산이 변하죠.”

“그럼 2만 년이나 20만 년은?”

“2만 년은… 나이 차이 안 나는 거나 다름없죠. 눈 감았다 뜨면 2만 년인데 무슨 말이에요.”

지수가 저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건 작은 쪽이 연상이라는 것, 부리부리한 남자는 스무 살이라는 것 정도였다. 왜 갑자기 2만 년이 나오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사장님과 직원은 이력서 가지고 오라는 말도 안 했으면서 굉장히 꼼꼼하게 읽었다. 지수는 자소서도 써 왔어야 했나 잠깐 후회했다. 잠시 후 사장님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지수를 바라봤다. 엄청 까만데 어째서인지 맑은 느낌이 드는 눈을 보고 있자니 지수는 어째서인지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지수 씨, 나는 이리라고 해요. 이쪽은 김도진으로 우리 직원이고. 내 나이가 지수 씨보다 많은데, 말을 놓아도 될까요?”

“네. 그럼요. 놓으세요.”

대여점 이름이 사장 이름에서 따온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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