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마 공주에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잘 먹겠습니다, 찰마 공주님.”
“…….”
찰마 공주가 부들부들 떨었다. 공주는 그 후로도 차 한 잔을 다 마시는 동안 여러 시비를 걸었다.
자기는 늪이 좋다며 땅을 늪으로 만들었는데, 이리가 꼭 구름에 떠 있는 기분이군요, 하자 몽실몽실한 구름이 아래에 깔렸다.
찰마 공주가 궁궐이 오래됐다고 말하자마자 기둥이 무너져 그들에게 쓰러졌는데, 절반 정도 내려오자 꽃잎으로 바뀌어 하늘하늘 흩날렸다.
이에 찰마 공주가 ‘하계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한 짐승도 있습니다’ 하자 뱀 아홉 마리가 탁자 위로 기어 올라왔고, 이리가 ‘그렇다면 이들의 천적 또한 존재하겠군요’ 하며 위를 올려다보자 뱀을 잡아먹는 독수리와 참매가 삐이이- 울며 활공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 시합 같았다. 물론 이리 선인이 서산대사 쪽이었다.
뱀들을 급히 피신시킨 찰마 공주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대결도 그대의 승리입니다. 이리 선인, 한 번을 져 주지 않는군요.”
“엥. 이걸 대결이라고 할 수 있나. 완전 일방적이었는데.”
“…….”
도진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는 찰마 공주의 눈치를 살폈다. 얼마나 섬뜩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는지, 면사 쓰개를 덮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나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최근 지상에 올라간 하계의 귀신들이 소멸당하고 있습니다.”
찰마 공주가 드디어 용건을 꺼냈다. 도진은 이리가 만든 송편을 우물우물 씹으며 잠자코 들었다.
찰마 공주가 말하는 ‘지상’이란 ‘인간계’였다.
하계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인간계로 올라갔으나 엄연히 하계의 족속들이므로 찰마 공주와 웅녀, 대적 같은 하계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숫자를 주기적으로 헤아려 왔다. 한데 최근 한 달 사이 연락이 되지 않는 위아들이 많아졌다.
웅녀가 수하들을 파견해 보니, 하계 위아들이 모여 살던 마을 다섯 군데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놈이 하나라도 있다면 어찌 된 연유인지 물었겠지만 단 한 녀석도 빠짐없이 사라졌다.
웅녀가 그 사실을 보고하자 찰마 공주는 곧장 저승에 연락을 취했다.
“저승에? 염라대왕에게 연락했다는 말입니까?”
도진이 묻자 찰마 공주는 대답이 없고 대신 이리가 설명했다.
“저승에 심어 놓은 첩자에게 연락했다는 거야.”
“아….”
“내 족속들이 저승의 어느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주가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나의 분신을 통해 저승의 49지옥을 모두 훑었습니다. 아귀, 한빙, 초갈, 열화, 적절, 흑승, 아수라…. 그러나 어디에도 내 아이들이 보이지 않더군요. 극락에 갔을 리는 만무하니 이건 즉 모두 소멸되었다는 뜻입니다.”
“…….”
“다섯 개의 하계 마을이 초토화되는 과정에서 지상 위아와 인간의 피해는 조금도 없었다…. 누군가 이리 선인의 눈을 피해 우리를 사냥하고 있구나. 나는 그런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도진이 힐끔 이리를 살폈는데 이리는 담담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역병 손님들이 자백해 왔습니다. 일전에 삭신이 퍼진 일이 있어 이리 선인과 한번 마주쳤다고. 삭신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알겠더군요. 전염병이 아니라 저주였다는 것을.”
‘삭신이라는 말만 듣고 어떻게 저주라는 걸 알아냈지?’
도진은 다른 의미로 으스스해졌다. 이리에게 얘기를 듣기는 했다. 찰마 공주는 그 능력이 감히 따라올 자가 없는 선인이었다. 아주 인자하고 자비로운 스승을 뒀으며, 심성이 악독하고 욕심이 많지만 않았다면 진현계의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범인을 퇴마사 혹은 무당이라고 가정하고, 그다음엔 포도청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포도청의 첩자에게 말이죠.”
도진이 중얼거렸다.
“…선인께서도 최근 방문하셨더군요. 전우치와 직접 대면하신지라 어느 무당의 정보를 가져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찰마 공주가 소매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툭 던졌다. 도진이 펼쳐 보니 악신을 받은 무당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단, 이아진은 없었다.
저번에 마주친 퇴마사 한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인사와는 아직도 함께 다녀?’
‘그, 그 뱀은 그, 그날 이후로 도, 도망쳐서….’
찰마 공주는 만인사가 도망친 후에 정보를 얻었으니 이아진이라는 이름이 빠진 게 당연했다.
“현재 이 명단의 인간들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감시를 이어 갈 예정입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이들 중에 다섯 마을을 소멸시킬 강한 힘을 가진 인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하여 좀 더 알아봤지요….”
찰마 공주가 다시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탁! 이번에는 돌멩이처럼 무게감 있는 소리가 났다. 원뿔 형태의 물건이었다. 뭔가, 하고 보던 도진이 기겁했다.
“뿔? 이거 뿔입니까?”
“만인사의 뿔이로구나.”
“윽.”
도진이 근처의 화분에 있던 마른 나뭇가지를 끌어와 뿔을 찰마 공주 쪽으로 스윽 밀었다.
찰마 공주는 이아진에게 들어갔다가 이리와 마주하고 도망쳐 나온 만인사를 붙잡은 것이다.
“이 어리석은 뱀이 최근 몇 년간 어느 악신과 친밀하게 지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신의 이름이 나조차도 처음 듣는 이름이더군요. 배리모스…. 서양의 악신인가 하여 루시퍼에게 물었으나 그 녀석도 모른다 하였습니다.”
“미친…. 루시퍼라니.”
“…배리모스가 어디 숨어 있는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내 생각엔 선인께서 그 악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을 것 같군요. 선인께서는 내가 이아진이라는 무당을 건드리지 않기를 바란다면 나를 성실하게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선은 만인사의 심문부터-.”
“와…. 협박을.”
도진이 계속해서 추임새를 넣자 찰마 공주가 고개를 틀었다. 쓰개를 뚫고 진득한 시선이 얼굴을 핥아 오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을 돌리고 싶은데 사로잡힌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시선이 얼마나 어둡고 강렬한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끼웅이도 오들오들 떠는 게 느껴졌다.
피할 수 없다면….
도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어두운 시선과 마주 봤다.
피하려고 했지만 피하지 못하게 한다면 상대하는 수밖에!
도진이 지지 않고 쏘아 보자 찰마 공주가 호오, 하며 묘한 탄성을 냈다. 그때 이리가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찰마…. 만인사를 심문해 달라는 겁니까?”
“…….”
“찰마 공주.”
두 번 부른 후에야 하계의 왕이 도진에게서 시선을 뗐다. 도진이 후, 하.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정확합니다, 이리 선인. 만인사를 옥에 가두었으니 함께 가시지요.”
“서두가 길었군요. 이런 청이라면 바로 들어주었을 텐데.”
“이리 선인이 요새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대화를 좀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대의 제자는 장사 중의 장사로군요. 조금만 더 무르익은 후에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찰마 공주가 입맛을 다셨다. 도진은 소름이 돋아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끼웅이가 허겁지겁 주머니를 빠져나왔다. 더 안전한 이리의 품으로 들어가려는 듯했는데 너무 경황이 없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끼웅!
“야!”
끼웅이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쿠구구구- 진동과 함께 덩굴이 솟아올랐다.
“아, 씨발.”
끼웅이를 데려가려는 덩굴을 도진이 맨손으로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뿌리째 뽑아내 그에게 뻗어 오는 다른 덩굴한테 던졌다. 신발에 올라탄 끼웅이를 얼른 주워 주머니에 넣고 경계 태세를 취하는데 다른 덩굴들이 스르르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끝났나? 상황이 끝난 건가?
“도진아, 앉아.”
“아, 네. 스승님.”
도진이 냉큼 옆에 앉았다. 순간적으로 심하게 긴장했던 탓인지 씩씩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후후, 찰마 공주가 만난 후 처음으로 웃음 지었는데 아주 음산하고 어두운… 마치 심연이 이쪽을 들여다보며 짓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이리 선인, 그대의 제자는 중간계보다는 하계에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찰마….”
이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에 눈에 거슬리는 수하가 생겼습니까?”
“…….”
찰마가 입을 꾹 다물더니 처음으로 도진에게 말을 걸었다.
“선인의 제자야. 보거라. 협박이란 저런 걸 뜻하는 것이다.”
“협박이라뇨. 눈에 거슬리는 수하를 없애 준다면 고마운 일 아닙니까?”
“나는 더 이상 이리 선인에게 수하를 잃고 싶지 않구나.”
찰마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걸음을 옮겼다. 이리와 도진이 뒤를 따랐다. 원목 식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리가 부지런히 걸으며 한숨을 쉬었다.
“도진아. 자꾸… 공주를 유혹하지 마.”
“유혹이요? 제가 언제요…?”
“…그냥 웬만하면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