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이 입을 삐죽 내밀자 이리가 손을 뻗었다. 도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리가 도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잘 없는 일이라 도진이 언제 삐졌냐는 듯 헤실거렸다. 앞서가던 하계의 왕이 나직하게 말했다.
“보기 좋은 사제 지간이군요….”
내용은 칭찬인지 목소리가 너무 음산하여 비난 같았다. 도진이 속삭였다.
“스승님, 찰마 공주님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봐요.”
“맞아…. 달렸어.”
“…….”
“조용히 하고 따라가자.”
“네….”
스승과 제자가 조용히 찰마 공주의 뒤를 따랐다.
찰마 공주는 이리의 제자가 이제 좀 조용해지려나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도진은 하계의 궁궐이 신기한지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찰마도 제 궁이 을씨년스럽고 음산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듯 하늘이 어두운 이유도 있었지만,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탓도 컸다.
땅속에 숨은 덩굴 요괴 말고는 무엇도 없었다. 궁을 지키는 군도, 시중을 드는 궁인도….
찰마 공주가 청사초롱을 손수 들고 지하를 내려가자 김도진이 도저히 호기심을 참지 못했는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찰마 공주님은 궁인을 두지 않나 봐요. 찻주전자도 직접 따랐는데, 청사초롱도 직접 들잖아요.”
“도진아-.”
“이리 선인의 손속이 두려워 모두 피하라 했다.”
찰마 공주가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이리의 제자는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부리부리한 붉은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왕은 뒤통수에 달린 눈을 가늘게 떴다.
“너에겐 그토록 다정하니 모르겠지만… 천 년 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자가 바로 네 스승이었지.”
찰마 공주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 * *
까마득한 옛날.
찰마는 본래 진현계를 목표로 삼았던 수많은 도사 중 하나였다.
나이가 아직 두 자리였을 적, 기도식을 치르기 위해 제자로 받아 줄 선인을 찾다가 지상을 유랑 중이던 선인과 마주쳤다.
1)‘나는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환영한다. 내가 네 스승이 되마. 다만 너는 아직 진현계에 입성할 만큼 덕을 쌓지 못했으니 좀 더 수행하도록 하라.’
찰마는 그 말을 따랐다. 스승은 어질고 인품이 뛰어난 이였다. 찰마가 보았을 때 스승의 신통력은 진현계 임금님을 능가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도라며 평범한 아낙네처럼 인간들과 어울려 지냈고, 찰마도 그 모습에 깨닫는 바가 있었다.
명상과 수련에 힘쓰고, 선행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착실하게 덕을 쌓던 어느 날, 찰마는 제 안에 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능력이 생긴 것을 감지했다. 당장 옆방의 문을 두드리고 책을 읽고 있던 스승에게 고했다.
‘스승님, 제게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능력이 생겼다는 건 알겠는데,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한번 사용해 볼까요?’
‘으음. 우선은 능력을 갈무리하고 수행에 전념하라.’
‘예…….’
찰마는 스승의 말을 이행했다. 며칠 후, 마당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나가보니 새하얀 갈기를 가진 용 대가리를 한 말이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말은 마치 주인에게 하듯 찰마의 손에 주둥이를 비비적거렸다.
‘스승님, 이 용…. 아니, 이 말은 대체 무엇입니까?’
‘으음…. 내 친우가 잠시 맡겼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예…….’
찰마는 다시 수행을 시작했다. 스승은 용 머리를 한 말을 어디론가 데려갔고 그 후로는 보지 못했다.
며칠 후.
도사는 명상을 하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그 말은 내 말이었다. 용마였다! 나는 얼마 전에 이미 선인이 된 거야!’
찰마가 방을 뛰쳐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스승의 방문이 열렸다. 스승에게 건너가니 스승은 고운 예복을 차려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찰마야. 그래…. 너는 선인이 되었다.’
‘왜 지금까지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너는 진현계에 들어갈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선인이 되면 반드시 진현계에 들어가야 합니까? 나는 중간계에서 선인으로서 살겠습니다. 제 용마는 어디 있습니까?’
‘네 용마는 용마를 잃은 다른 선인에게 주었다.’
순간 찰마는 배신감과 분노가 솟구쳤다. 살기를 뿜는 제자에게 스승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찰마야. 선인은 누구나 고유의 분야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문하 선인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고, 이리 선인은 만물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 것처럼.’
‘내 능력은 예지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찰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네가 진현계를 어지럽히는 모습을 보았다. 평화를 깨뜨리고 반역을 꾀했다가 끝내 왕에게 처형당했지…. 그 끔찍한 저승의 불지옥 염화 속에서 독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던 너를 보고 나는 너를 구제하기로 결단했다.’
스승의 목소리는 어두운 밤만큼이나 가라앉아 있었고, 눈빛에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스승으로서 어떻게든 다른 길로 인도할 생각이었으나 너는 예지에서 본 능력을 눈떠 버렸구나….’
철마는 몸 안의 능력을 감지했다. 처음에는 어떠한 종류인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섭취 후 흡수.
상대를 섭취하면 덕을 흡수할 수 있다.
임금의 까다로운 규율을 지킬 필요도 없다. 손실분만큼 아무 위아나 잡아먹으면 바로 회복할 수 있으니까.
무한의 덕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철마가 주먹을 힘껏 쥐었다.
마침 눈앞에는 수천 년의 덕을 지닌 선인이 앉아 있었다.
스승이 마치 기름진 고깃덩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자는 절대로 스승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을 먹어 치워 오직 스승 한 명만 남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스승을 해할 마음은 없었다.
‘찰마야….’
‘…….’
‘나를 먹어라.’
찰마는 스승이 이 말을 하리라 예상했기에 길게 침음했다.
‘스승. 나는 절대 당신을 흡수하지 않을 것이오.’
‘나를 먹고 하계의 왕이 되어라.’
‘…….’
‘네 들끓는 야욕과 탐욕은 왕이 되어야만 가라앉는다. 네가 왕이 될 곳은 하계여야만 하느니라….’
‘진현계는 어째서 아니 되오?’
‘네가 죽을 것이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소.’
‘지옥에서는 야욕을 부린다 한들 가마솥 한구석만 지배할 뿐이다. 살아서 야욕을 펼치면 한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알겠느냐? 죽으면 네 탐욕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승이 손을 휘젓자 허공에 먹색의 검이 생겨났다. 스승과 찰마는 만난 지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마치 평생을 함께한 듯 서로를 꿰뚫어 보았다. 만약 스승과 제자로 처음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둘도 없는 친우로, 더 나아가 연인으로 발전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찰마는 스승이 그 검으로 무엇을 할지 알았다.
그러나… 만류하지 않았다.
먹색 검 끝이 스승의 복부를 찔렀다. 스승은 손잡이를 쥐고 더욱 깊숙이 찔러넣었다.
‘찰마야…. 하계로 만족하거라….’
‘스승, 고맙소. 그대는 사라지는 게 아니외다. 평생 내 안에서 함께 살아갈 것이오.’
‘찰마야.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어렵다. 그러므로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강한 것이다….’
‘…….’
‘너는 영원히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거라. 세상엔 너보다 강한 이가 존재한다. 네가 아무리 영원히 성장하더라도… 세상에는 영원보다 더 까마득한 것이 존재한단다….’
‘…….’
‘나의 제자야. 찰마야…. 너는 지옥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피 흐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신음을 참던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니… 가끔은 나를 떠올려 주려무나…. 가끔은….’
스승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찰마는 시신과 혼을 먹어 치운 후 삼 년간 애도했다.
그리고 스승의 유언대로 하계로 향했다.
당시 하계는 만들어지고 7천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그 어떤 단일 왕이 생긴 적이 없었다. 자기 자신을 왕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수백 명인 곳. 언제나 살육과 전쟁이 이어지는 곳. 아비규환, 그게 바로 하계를 일컫는 표현이었다.
무의미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하계에서 찰마는 힘을 키워 가고, 세력을 만들었다. 어느새 찰마라는 이름 뒤에 공주라는 호칭이 생겼다. 마치 하계라는 세계 자체가 탄생시킨 딸이 아닌가 하여 공주였다.
웅녀, 백룡, 흑룡, 대적, 감악산 신령.
각자 세력을 만들어 통치하고 있던 다섯을 제 수하로 삼은 찰마 공주는 하계를 하나로 통일하고, 최초의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