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25화 (125/203)

진현계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축하 사절단을 보내 왔다. 동시에 경계의 눈초리도 쏟아졌다.

찰마 공주의 탐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치광이 악마들이 모인 마경을 지배하는 것도 좋겠지만 찰마 공주의 시선은 저 멀리에 있었다.

진현계. 왕에게 허가받지 않으면 발조차 들일 수 없는 그곳.

도사 시절부터 꿈꿔 온 그 미지의 세상을 손에 넣고 싶었다.

찰마 공주는 진현계에 속한 존재들을 교묘하게 괴롭혔다. 그런데 진현계에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중간계에서 사건을 벌였다. 위아와 인간이 더불어 살던 당시에는 진현계 선인들 상당수가 중간계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선인을 죽이려다가 인간만 해치우고 끝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한번 크게 사건이 일어났다.

웅녀가 진현계의 영물을 죽이다가 인간의 왕까지 죽이고, 백룡과 흑룡은 진현계의 선인을 붙잡다가 인간 마을에 홍수와 산사태를 일으켰다.

대적은 진현계의 물건을 훔치려다 인간의 궁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감악산 신령은 진현계에 속한 산신령들을 열이나 붙잡아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이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진현계 왕은 크게 화를 낸 후 전쟁을 선포했다.

‘계획대로 되었군.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때 찰마 공주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진현계는 태고의 선인이 만든 후 영겁의 시간을 존재해 온 곳…. 그 어떤 세력도 감히 진현계와 대적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찰마는 그 점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천지천해야 그렇다 쳐도, 하늘꽃밭과 저승, 극락은 왜 진현계 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찰마는 저 비겁한 겁쟁이들과 같은 우두머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계의 왕이 되고 2천 년이 흘렀다. 그녀는 이제 이곳이 비좁게 느껴졌다.

하늘은 저리도 넓은데.

찰마 공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감악산이 신령들과 영물을 맡고, 웅녀는 인간을 인질로 잡는다. 흑룡과 백룡은 신수를 상대하면 되겠고, 대적은 도술에 면역이 있는 장군신이니 선인들을 죽이게 하자.

‘그리고 나는 이리 선인을 상대해야겠지.’

이리 선인. 지나가다 몇 번 그자와 마주쳤으나 그리 강한 존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딱 한 번, 웅녀가 경고를 한 바 있었다.

‘찰마 공주. 이리 선인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그자는 마지막 태고의 선인. 쉬운 자가 아닙니다.’

찰마는 그 경고를 가볍게 넘겼다.

윗대가리들의 싸움은 아랫것들이 모두 죽은 후에 이뤄질 것이다. 하계의 족속은 진현계 족속보다 약하지만 수는 열 배가 더 많으니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시체들이 나오는 족족 흡수하는 거야….’

이쪽 편이든 저쪽 편이든 시체가 많이 나올수록 찰마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아아, 상대의 동의 없이 덕을 흡수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능력이야….

찰마 공주는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웅녀와 대적은 마침 하계에 있었으므로 바로 도착했으나 두 용과 감악산은 해가 지도록 오지 않았다.

세 수하가 찰마 공주의 궁궐에 당도한 건 저녁이 되어서였다.

이리 선인은 피를 뚝뚝 흘리는 수급(首級) 세 개를 편전에 내려놓았다. 감악산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 찰마의 발치에서 멈췄다.

‘찰마 공주…. 이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리 선인의 새카만 눈에는 차가운 분노가 들어차 있었다.

‘가련하고 어리석은 아랫것들끼리 죽고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

‘지금 그대의 수하 셋을 흡수하세요. 그리고 나와 대결하고… 이기면 나를 먹으세요.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게 진다면 진현계 왕에게 패배를 선언하세요….’

찰마는 탐욕적이다. 호승심이 강하고 욕심이 많다.

이리 선인의 무한한 덕에 관해서 들었을 때 그를 먹고 싶다고 입맛을 다신 바 있었다.

그러나….

‘명심하거라. 세상엔 너보다 강한 이가 존재한다. 네가 아무리 영원히 성장하더라도… 세상에는 영원보다 더 까마득한 것이 존재한단다.’

영원보다 더 까마득한 것.

진현계 왕을 두고 얘기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리의 검은 눈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도저히 싸움에 대한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패배한 기분이었다. 아니, 패배한 게 맞았다. 쌍룡과 감악산, 셋을 상대하는 건 찰마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으니….

태고의 선인의 깊고 맑은 시선 앞에서 마치 거목 앞의 들꽃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깊게 뿌리내리고 높게 치솟는다고 해도 들꽃일 뿐 어찌 수천 년을 꼿꼿이 버틴 거목보다 깊고 높겠는가.

저 거목조차 하늘을 탐내지 않는데 한낱 들꽃 따위가 분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렸다.

태초부터 수만 년, 수십만 년, 어쩌면 수억 년을 살아왔을 태고의 선인 앞에서 찰마 공주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전쟁 하루 만에 항복을 선언했다.

웅녀와 대적은 그 후로 이리 선인의 이름만 나와도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바로 오늘 이리 선인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집 안에 꽁꽁 숨어 버린 것처럼.

찰마 또한 수하를 더 잃고 싶지는 않아 굳이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사실 선인도 더는 수하를 빼앗아 갈 생각은 없겠지만.

이리 선인은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자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백룡과 흑룡, 감악산 신령이 죽인 위아와 인간 중에 이리와 친밀하게 지내던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 정 때문에 더욱 분노했던 것이다.

가끔은 궁금하기도 했다.

만약 이리와 친한 이들을 제외하고 일을 벌였다면 이리 선인이 개입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찰마 공주는 그 궁금증을 해결할 마음이 없었다. 앞으로는 조용히 하계의 왕으로서 지낼 생각이었다. 야욕과 탐욕은 격이 다른 힘 앞에서 사그라들었으며 지금은 스승처럼 자신만의 도를 닦고 있었다.

길고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스승의 유언을 지키게 된 찰마였다.

* * *

만인사를 가둔 감옥 앞에 다다랐다. 쇠사슬로 칭칭 감긴 문 앞에서 찰마 공주가 직접 문을 열라는 듯 비켜섰다.

“제가 할게요, 스승님.”

도진이 쇠사슬에 손가락 두 개를 대고 일직선으로 움직이자 쇠사슬이 끼기긱 소리를 냈다. 봉인해제술은 꽤 막대한 덕이 드는 데다가 어려운 술법이라 도진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는 성공했다.

이리가 눈으로 칭찬을 해 주고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쇠창살로 둘러싸인 감옥에 만인사가 갇혀 있었다. 도진이 보기에는 ‘죽어 있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대가리만 벽에 박혀 있고 대가리 아래로 몸뚱이는 없었으니까.

눈을 감고 있었는데, 도진이 쇠창살 아랫부분을 발로 툭툭 차도 뜨지 않았다. 정신을 완전히 잃은 듯했다.

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살려만 놨군요.”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지 못해서 살려 놓았습니다. 선인의 심문이 끝난 후에는 저승으로 보내 줄 생각입니다. 만인사는 중간계에서 크고 작은 혼란을 일으켰으니 이제 포도청이 아니라 저승에서 죗값을 치러야지요.”

“만인사의 처분은 왕께서 원하는 대로 하세요.”

이리가 소매를 걷자 도진이 얼른 소매를 팔꿈치 부분에서 접어 줬다.

“스승님, 정신 잃은 놈을 어떻게 심문하시게요?”

“찰마 공주가 말하는 심문은 이 녀석의 기억을 읽으라는 뜻이야.”

“아, 실타래 말이군요!”

기억과 감정 실타래라면 ‘사해 목걸이’ 탈환 작전 때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 유재호라는 인간 소년이 이물을 가져가는 바람에 잠들게 한 뒤 이물을 되찾고 기억 실타래를 꺼내 이물과 관련된 기억을 꺼냈다.

“긴장되고 경직된 상태에서의 실타래는 마시멜로처럼 끈끈하게 뭉쳐져 실 구분이 안 되잖아요. 만인사가 이런 상태니 그때보다 훨씬 힘들 것 같은데.”

“그렇겠지.”

이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왼손의 검은색 실 팔찌를 풀었다.

“아… 저 주세요.”

도진이 실 팔찌를 얼른 받아 주머니 안에 넣었다.

“김끼웅, 잘 가지고 있어라. 잃어버리면 안 돼.”

끼웅!

찰마 공주가 그 모습에 흥미를 보였다.

“그 팔찌는 무엇이길래 벗는 겁니까? 이물입니까?”

이리가 아니라 도진이 대답했다.

“스승님의 능력구속구입니다. 스승님은 평소에 양손과 두 발목에 200kg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고 있는 거나 다름없죠.”

“…능력구속구.”

찰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리 선인…. 그대는 그 팔찌를 천 년 전의 전쟁 때도 차고 있지 않았습니까? 내 수하들의 목을 가지고 왔을 때도….”

“그랬지요.”

“하하….”

찰마 공주가 허탈하게 웃음 짓는데 돌연 도진이 소리쳤다.

“잠깐만요!”

두 어른이 도진을 쳐다봤다. 도진은 지금까지 중 가장 격정적인 얼굴이었다.

“그럼 스승님의 그 곱고 예쁜 손을 저 징그러운 뱀 대가리에 가져다 대야 한다는 거예요? 그 꼴을 제 눈으로 보라고요? 결사반대합니다! 저번처럼 제가 대신 댈게요. 스승님은 제 이마를 어루만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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