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리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 찰마 공주는 쓰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웃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두 어른이 어떻게 생각하든 도진은 진지했다.
스승님이 그냥 평범한 한국 청소년의 이마를 어루만지는 것도 싫었는데 저 뱀 대가리에 고운 손바닥을 비비는 걸 지켜보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도진이 소매를 걷고 쇠창살 안쪽으로 팔을 뻗었다.
“도진아. 고맙지만 안 그래도 돼….”
어째서인지 힘없이 얘기한 이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뱀의 머리에서 실타래가 솟구쳐 나왔다. 도진이 내심 안도하며 쇠창살에서 팔을 뺐다.
그러고 보니 저번 사해 목걸이 때는 이리가 유재호에게서 실타래를 뽑아낸 후에 팔찌를 뺐다. 지금은 실타래를 뽑아내기 전에 팔찌를 풀었고.
‘팔찌를 푼 스승님은 정말 세계 최강이구나.’
도진이 마치 자기가 세계 최강이라도 되는 듯 가슴을 부풀었다.
유재호의 기억과 감정 실타래가 오색 찬란했다면, 만인사의 것은 어둡고 찐득찐득했다. 까맣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어려웠으며 뿌리 부분은 썩어서 움직일 때마다 가루가 떨어졌다. 살아온 시간만큼 실도 많아서 나무 기둥만큼이나 두껍기도 했다.
도진이 보기엔 그저 까맣기만 한 실타래가 이리에게는 달리 보이는지, 까만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이리가 실 두 개를 골라냈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제자를 의식해서 직접 손가락을 대지 않은 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실들은 모두 무언가 곰팡이 같은 것이 뒤덮여 있었다.
“이리 선인. 저 많은 기억 중 단 두 개뿐이란 말입니까?”
“다른 실은 이미 썩었습니다. 나도 무척 아쉽군요.”
이리가 그중 하나를 공중에 사선으로 세우고 도술을 외우자 그들 사이에 실이 담고 있는 기억이 펼쳐졌다.
‘겁쟁이.’
그렇게 말한 이는 이석진이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찰마 공주가 한 발짝 다가왔다.
“배리모스가 빙의 중이군요.”
이석진은 푸르스름한 안광을 내뿜으면서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나’는 물론 만인사였다. 그런데 뱀의 시야가 아니라 인간의 시야인 걸 보니 만인사도 이아진에게 빙의 중인 듯했다.
‘규율에 얽매어 두 손, 두 발이 묶인 자가 그리도 두렵더냐.’
‘이리 선인은 두 손, 두 발이 묶였다 하여도 우리 따위는 식은 묵 삼키듯 죽일 수 있는 자다.’
‘그래. 가라. 지금까지처럼 도망치면서 목숨을 부지하며 사는 게 낫다면 떠나거라.’
‘자네는 어찌하여 이리 선인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아무리 전쟁 이후 태어났다 하여도 악신이라면 본능적으로 그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을.’
배리모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배리모스…. 그러고 보면 자네는 이리 선인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지…. 나는 자네와 같은 악신은 본 적이 없네.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만인사가 떠나며 마지막으로 묻는 물음에 배리모스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술 끝을 뒤틀었다.
‘곧 떠날 놈이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얼른 가기나 해라.’
그 말을 내뱉은 배리모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자 새파랗게 냉기를 내뿜던 눈은 고동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석진이 머리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으며 쓰러지고, 그를 옆에 있던 퇴마사, 한수가 얼른 부축했다.
첫 번째 실의 기억은 그렇게 끝이 났다. 도진은 처음 배리모스와 간접적으로 접촉했을 때를 떠올렸다.
지금은 끼웅이지만 그때는 거대한 그림자 잡귀였던 사역마 암인은 이리 선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사역마의 주인인 퇴마사가 이리 선인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퇴마사가 이리 선인을 몰랐던 이유는 그에게 주술을 알려 주었던 배리모스 또한 이리 선인을 몰랐기 때문이다.
‘위아는 치매를 앓아도,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어떤 세뇌를 당해도 이리 선인의 존재를 잊지 않아.’
‘그럼 대체 저건 뭔데요?’
‘사역마.’
“배리모스는… 사역마였군요….”
그렇다면 배리모스 위에 또 다른 퇴마사가 있는 걸까? 사역마는 누군가가 종으로 부리기 위해 만들어 낸 존재니까.
배리모스가 이 사건의 주도자가 아니라 하수인일 수도 있었다.
이리와 찰마 공주는 말이 없었고, 도진은 슬슬 머리가 아파지려고 했다. 일을 해결하기 위해 하계까지 찾아와 만인사 대가리를 심문하게 된 건데, 오히려 일이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리가 두 번째 실을 허공에 세웠다.
‘으음, 내가 이 일을 반대하기는 했지만 정작 도깨비들이 골탕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좋군.’
이번 기억의 배경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만인사와 배리모스는 어느 주택 옥상에서 멀찍이 있는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인사의 시야이기 때문에 그 아파트의 풍경은 도진에게도 보였다.
난장판이 된 거실에 곤란한 표정으로 모인 통영 미륵산 도깨비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도깨비방망이에 의해 입이 찢어진 인간 시체였다.
도깨비들은 죽을상을 하고 있는데 만인사는 퍽 신나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제 다음번엔 어떻게 할 셈인가?’
‘‘그곳’에 가야지.’
‘그곳이라면… 그대가 전에 얘기했던 ‘이상하리만치 음기가 가득한 곳’ 말이로군.’
‘그래. 지금까지 아무도 음기를 확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워. 날 위해 남겨 뒀나?’
‘아무도 그곳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그대가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봐도 당연히 대답해 주지 않겠지?’
만인사는 기대 없이 물은 듯했으나 의외로 배리모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어떤 인간이 내게 알려 주었지.’
‘어떤 인간? 이석진이나 한수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오래전에 죽은 이다.’
배리모스의 음성에 그리움이 깃들었다. 도진은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는 악신에 괴리감을 느꼈다. 보통 악신에게는 그리움 같은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역마에서 악신이 된 자니 여러모로 특이한 모양이었다.
‘배리모스, 한 가지 더 묻겠다. 그대는 이렇게 음기를 모아서 무엇을 어쩔 셈인가.’
‘…….’
‘새로운 세상이라도 만들 생각인가?’
배리모스가 통영 도깨비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이석진의 모습을 한 사역마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내뿜은 빛이 촘촘하게 박힌 검은 하늘. 그리고 휘영청 뜬 커다란 보름달을.
‘내가 원하는 건 새로운 세상이 아니다. 잃어버렸던 과거의 세상을 되찾는 것이지….’
마치 저 별과의 거리 만큼이나 먼 과거를 더듬는 듯 아득한 음성이었다.
만인사의 기억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펼쳐졌던 환영이 사라지고 먼저 입을 연 이는 찰마 공주였다.
“‘이상하리만치 음기가 가득한 곳’은 어디입니까?”
이리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투였다. 이리는 도진에게 실 팔찌를 돌려 달라고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확실히는 알 수 없으니 태고의 선인의 무덤인 듯합니다.”
“태고의 선인에게 무덤이 있었습니까? 어딘지 알려 주시지요. 배리모스보다는 내가 섭취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도진이 이리의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이리는 지금 가 보는 게 낫겠다며 그 자리에서 통로를 만들었다. 한 걸음 내디딘 이리의 신형이 사라지자 도진도 냉큼 따라갔다.
새롭게 당도한 장소는 거대한 구덩이 앞이었다. 한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아 도진이 주술을 펼쳐 빛을 띄웠다.
구덩이의 모습은 마치 운석이 떨어져 만들어 낸 크레이터 같았다.
“스승님, 여긴 어디인가요?”
“태평양에 있는 무인도야.”
순식간에 하계를 벗어나 태평양까지 온 것이다. 이리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제자도 스승의 옆에서 기감을 펼쳤다.
이곳이 태고의 선인의… 이리의 친우였을 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니 도진은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태고의 선인들이 모두 관조자의 은인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혼자 죽은 게 아니구나. 이렇게 무덤을 만들어 죽은 이도 있었어….
스승님은 이곳에 몇 번이나 와 보셨을까?
슬쩍 이리의 표정을 살피니 도진이 걱정했던 것만큼 쓸쓸해하거나 그리움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단지 언제나보다 조금 굳은 표정으로 음기의 농도를 관찰할 뿐이었다.
“음기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네요. 그냥… 이런 황무지에 쌓일 법한 딱 그 정도의 음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