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중 가장 열변을 토한 왕이 지쳤는지 옥좌에 깊숙이 기댔다.
이리는 퇴마사가 경고의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하계의 것들만 소멸시킨 점도 용납할 수 없었다. 전쟁 때 아랫것들만 죽어 나갈 게 안타까워 스스로 나선 이가 바로 이리였다.
하계의 족속들은 분명 어떤 죄를 지었기에 하계의 족속이 되었겠지만, 저승에서 재판을 치를 기회도 없이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그게 이리의 생각이었다.
이리는 면류관 그늘 속의 수심 깊은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피로에 시달리고 있는 자에게는 다른 가치관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극심할 터였다.
‘왕의 뜻이 그렇다면 나는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평소라면 이렇게 말해야 했다.
지금까지 늘 이렇게 말해 왔다.
금왕뿐만이 아니라 초대와 2대 왕에게도. 이리가 뜻한 바와 다르다고 해도 ‘왕의 뜻이라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리는 겸허히 눈만 내리깔 뿐 물러서지 않았다.
혹여 선인이 아니었다면 왕의 뜻에 따르겠다 거짓말하고 내려가서는 만월 가문과 사역마에 대해 알아보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선인은 정직하게 왕의 앞에 마주 앉아 의견을 피력했다.
“이리 선인….”
이윽고 왕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선인의 뜻이 그렇다면… 옥경으로 살핀 후 연락드리지요. 그리하면 되겠습니까?”
왕이 이리에게 백기를 들었다.
옥경.
칠계를 통틀어 유일하게 존재하는 예언 이물로, 극락의 옥황상제가 가지고 있다. 이 예언 이물이 나타난 후 어느 세력이 가질 것이냐로 논의가 많았다. 이리 선인의 손에 있다면 가장 안전하겠으나 이리 선인은 중간계에서 살아가는 자. 즉 예언 이물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칠계는 가장 탐욕적인 이가 적은 곳에 두기로 합의했다. 하늘꽃밭과 극락 중 극락이 다섯 표를 받으며 선정되었다. 극락에 오는 자들은 탐욕이 달성된 자들이니까…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옥경에 어떻게 질문하실 생각인가요?”
“세상에 근시일 내로 대재난이 일어나는지 묻도록 하지요.”
만약 옥경의 대답이 ‘그렇다’라면 녹색빛이 들어오고, ‘아니다’라면 붉은빛이 들어온다. 그들은 붉은빛을 기다려야 했다.
“사흘 후 연락하겠습니다. 이리 선인.”
“예, 기다리겠습니다.”
이리는 왕과 헤어지고 편전을 나온 후 눈을 떴다.
익숙한 하얀 천장이 아니라 도진의 얼굴이 커다랗게 시야 전체에 들어찼다. 도진은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다.
“도진아?”
“으악! 악! 으아아악!”
도진이 번쩍 눈을 뜨더니 비명을 질렀다. 천장까지 폴짝 뛰고, 벽에 몸을 묻기라도 할 것처럼 물러났다가 갑자기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고는 무릎 꿇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무슨 짓 하려고 했어?”
“…이렇게 일찍 깨실 줄은. 죄송합니다!”
“뽀뽀?”
“…죄송합니다!”
이리는 몸뚱이째로 진현계에 이동할 수도 있으나 주로 영혼만 이동하는 쪽을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몸은 비어 버린 채 무방비 상태가 되는데….
무방비 상태가 된 몸을 지켜 줘야 할 제자가….
“도진아….”
“죄송해요. 저 진짜 지금까지 잘 자제했는데 오늘따라 참을 수 없어서. 오늘따라 스승님께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새근새근하셔 가지고. 오늘따라 막 입술도 붉고 도톰하고 그러셔서.”
“됐어…. 일어나.”
도진은 일어나지 않고 배시시 웃으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침대에 걸터앉은 이리의 다리를 끌어안은 도진이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애교 부렸다.
죄송하다면서 하는 말은 ‘앞으로 자제해 보겠지만 지금처럼 못 참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스승님이 날 너무 애태운 탓이다. 짝사랑이 20년째인데 애가 얼마나 바짝바짝 타들어 가겠냐. 그래도 자제는 해 보겠다’였다.
이게 반성인지 협박인지….
이리는 어이가 없었지만 손을 들어 제자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왕과의 대화로 관자놀이에 까끌까끌하게 돋아났던 가시가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 * *
사흘 후, 진현계에서 연락이 왔다. 쪽지에는 단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
‘붉은빛.’
화르륵. 도진이 쪽지를 불태워 없애고는 옆에 어깨를 붙이고 앉았다.
“배리모스가 태고의 힘으로 뭔가 엄청 큰 재난을 일으키진 않을 건가 봐요. 그럼 대체 배리모스랑 만월 가문의 퇴마사가 노리는 게 뭐지.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걱정 안 해도 될까요?”
“글쎄….”
“어…. 스승님, 이 반응은.”
도진이 눈썹을 모으고 이리의 어여쁜 얼굴을 이리저리 훑었다.
“뭔가 예상하는 바가 있군요! 저는 스승님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이리의 습관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도진이다. 그는 이리가 배리모스와 만월 가문의 ‘계획’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리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응. 아직은 내 추측일 뿐이지만… 옥경의 빛이 붉은빛이라면 맞을 것 같구나. 확실히 대재난은 아니긴 하지….”
“말씀 안 해 주실 거예요? 저 스스로 추측하라고요? 힌트 좀 주세요.”
“이아진을 만나러 가야겠어.”
“……!”
놀라서 눈도 입도 커진 도진의 어깨 위에서 끼웅이가 폴짝 뛰었다.
끼웅! 낑-
이아진이란 이름을 듣고 나서야 저번에 만났던 게 생각나서 막 말하려는데 도진이 끼웅이를 움켜쥐었다.
“아, 좀. 시끄럽게 굴지 말아 봐. 어른들 대화하잖아.”
도진은 삐진 끼웅이를 작업대 구석에 있는 미니어쳐 집안에 집어넣고는 다시 즐거운 얼굴로 돌아왔다.
“스승님, 약간 저랑 성격 비슷해지고 계신가 봐요.”
“뭐…?”
“사실 저도 이렇게는 찜찜하니까 그냥 만나러 가자고 조를 생각이었거든요. 스승님이 못 간다면 저 혼자라도 가려고 했어요. 저는 성격상 막연하게 기다리는 건 못 해서. 제가 기다릴 수 있는 건 짝사랑 상대의 마음뿐이거든요.”
“…….”
“그런데 퇴마사나 이석진이 아니라 이아진을 만난다는 건 좀 의외네요. 아무튼 대찬성합니다! 언제 갈까요? 지금 당장 갈까요? 집 주소야 찾아보면 금방 나오는데.”
도진이 당장 일어날 기세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상황의 심각성을 아는지는 의문이었다. 이리는 데이트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안타깝지만 바로 가지는 않을 거야. 들를 곳이 있거든.”
“어딘데요?”
“본래 10월마다 하던 일이 있어서… 우선 거기부터 가야 해. 겸사겸사 알아볼 것도 있고.”
10월마다 하던 일? 알아볼 것이란 뭘까.
도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다음 날, 둘은 늦은 밤이 되어서 대여점을 나섰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분당에 있는 성당이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중년과 청년 하나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가 멈추자마자 다가왔다. 이리는 차에서 내리기 전 설명했다.
“베드로 신부님이라고 부르면 돼. 옆에 있는 아이는 보조 사제 같은데, 누구인지 모르겠네. 교육받고 있나 봐.”
“네. 위아 세계에 대해 잘은 모른다고 했죠?”
“혼령이 어느 단계를 거쳐 악신이 된다는 것 정도. 그리고 극락과 저승에 대해서는 알지만 진현계나 그 밖의 세계는 몰라.”
“끼웅이는 보이고요?”
“어렴풋하게. 아마 끼웅이를 보고 도깨비라고 말할 거야. 뭔가 신기한 존재들은 전부 도깨비라고 알고 있어.”
둘은 차에서 내렸다. 베드로 신부가 선생님, 하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옆에 있는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그도 방금 전 도진처럼 스승에게서 지금 만날 사람에 대해서 대충 설명을 들었을 터였다.
“선생님, 올해에는 일찍 오셨군요.”
“그렇게 됐어. 옆에 있는 아이는 제자인가?”
“보조 사제입니다. 인사하거라.”
“안녕…하세요….”
청년의 표정이 멍했다. 이리와 눈을 마주하면 누구나 이런 반응이었다. 이름도 품계도 소개하지 않는 보조 사제를 보고 베드로 신부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쪽은 누구신지요?”
“내 제자야. 김도진. 도진아, 인사해.”
“안녕하세요. 이리 서… 언생님의 제자인 김도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