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31화 (131/203)

“나도 나도!”

어느 기와집 앞에 유난히 사람이 많더라니, 드라마 주인공의 집인 모양이었다.

“새새야. 인간들이 다들 내 사진을 찍는다!”

“바보야. 네 사진이 아니라 이 집을 찍는 거야. 인간들한테 너는 보이지도 않아.”

“왜 안 보이냐? 나는 인간들이 보이는데.”

“인간들은 멍청하거든. 저기 어떤 사람이 오미자빵 들고 간다. 따라가자!”

“오미자빵!”

“오미자빵!”

기와집 지붕과 마루, 마당 등에서 뒹굴거리던 위아들이 벌떡 일어나 오미자빵을 든 관광객을 줄지어 따라갔다.

“도진아. 우리도 오미자빵….”

“여기요.”

이리가 홀린 듯이 도진이 내민 봉투에서 오미자빵을 꺼냈다. 사람이 적은 한적한 곳에서 두 사람이 은신술을 풀었다. 넓적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오미자빵을 살랑살랑 흔들자 대번에 위아들이 둘을 발견했다.

“저기에 이리 선인이다!”

“이리 선인이 오미자빵을 가지고 있다!”

“이리 선인이 오미자빵 축제를 연다고 한다!”

위아들이 모여들었다. 뀨뀨! 밤송이 같은 동글동글한 위아가 데구르르 굴러서 이리의 발등에 올라탔다. 찌르르! 나무 위에서 떫은 감인 척하고 있던 주황빛 새가 포르르 날아와 이리의 어깨에 앉았다. 삐양, 삐양. 조그맣고 통통한 토끼가 이리의 옷자락을 타고 열심히 올라왔다.

“이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인간은 누구냐?”

“김도진임이 틀림없다. 이리 선인의 제자다!”

“김도진아. 나한테도 오미자빵을 줘라.”

솜뭉치 같은 잔챙이 위아들이 도진의 무릎 위에도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참나. 맡겨 놨나. 이제 아예 무서워하지도 않네.”

도진이 기가 막히면서도 재미있어서 오미자빵을 열심히 먹고 있던 파란 새 하나를 손가락으로 툭 밀어 봤다.

삐융삐융!

파란 새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김도진의 손가락을 쪼아 댔다.

“와, 성질머리. 잔챙이들 무섭네요, 스승님.”

“정말 너무 귀엽지?”

“제 얘기 듣고 계시죠?”

“더 꺼내 봐…. 도진아. 오미자떡이랑 메밀묵 같은 거…. 초콜릿이랑….”

“진정하세요. 초콜릿은 없어요. 사 올게요.”

도진이 일어나는데 이리는 말리지 않았다. 반짝반짝한 까만 눈빛은 어서 사 와서 이 잔챙이들을 기쁘게 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야. 김끼웅. 너도 가자.”

끼웅!

끼웅이는 잔챙이들이 무서워 오들오들 떨고 있던지라 얼른 도진의 손가락에 올라탔다.

초콜릿 파는 곳이 거리가 좀 있어서 축지술을 이용해 갔다. 편의점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남자가 나타나자 관광객의 시선이 다 그에게 향했다. 심지어 그 남자는 지나치게 잘생기기까지 했다.

“촬영 온 사람인가 봐.”

“<겨울밤>에 저런 배우가 나왔었나?”

“속편에만 나오는 걸지도 모르지.”

“사인 받자!”

사인은 무슨.

도진은 생각 같아선 초콜릿 값만 카운터에 던져다 놓고 얼른 튀고 싶었다. 설마 도둑질로 구분되려나? 나비 선인의 연회에 가기 위해서는 조금도 덕을 깎아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저기…. 저기요!”

어린 학생들이 초콜릿을 들고 고민하는 도진을 둘러쌌다.

“저기. <겨울밤> 속편 나오세요?”

“나 말입니까?”

“네…. 진짜 잘생겼어요. 저희 사인 좀 해 주세요.”

“펜 갖고 있어요?”

“네!”

도진은 오랜만에 대우주진리교를 설파할까 하다가 무명 배우인 척을 선택했다. 김도진이란 이름을 대충 예스러운 필체로 휘갈겨 주자 다들 좋아했다. 사진 찍어도 되냐는 요청은 정중히 거절했다.

학생들을 시작으로 어른 관광객들도 사인 요청을 해 오는 바람에 초콜릿 하나 사는 데 20분이나 소요됐다.

끼우웅….

끼웅이가 주머니를 흔들었다. 언제 돌아갈 생각이냐는 항의 표시였다. 도진도 얼른 이리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고….

“제가 이제 가 봐야 해서요. <겨울밤> 속편 많이 봐 주십시오.”

대충 꾸벅꾸벅 인사하면서 사라지려는 그때였다.

“어? 당신은.”

한번 들어봤던 목소리가 들렸다. 도진이 뒤를 돌아보자 모자를 눌러쓴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평균치보다 컸지만 도진보다는 작았다. 남자가 모자를 슬쩍 들어 보였다. 도진은 안타깝게도 기억력이 좋아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봤다.

“방금 봤어? 샤먼이다!”

“치호? 샤먼의 치호 아니야?”

“와. 아는 사이인가 봐.”

도진보다 주변에서 더 난리였다. 그냥 은신술 풀지 말고 초콜릿 값만 던져놓고 나올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역시 연예인이었군요!”

도진은 치호를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으슥한 곳이란 [촬영 중.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표지판 안쪽이었다. 구경하고 싶어 하는 샤먼의 팬들에게서 벗어나려면 촬영지가 알맞았다.

“내가 연예인일 줄 알았어. 이렇게 생긴 남자가 우연히 으슥한 밤 중에 깊은 산 속에 나타날 리가 없지. 잠깐. 근데 그 방송 이미 방송도 됐는데. 이것은 말로만 듣던 장기 몰래카메라…?”

혼자 중얼거리던 치호가 돌연 눈을 치떴다.

“혹시 산속에서 요하 다친 것 때문에 욕먹을까 봐 몰카 아닌 척하는 겁니까? 피디님이랑 작가님들이랑 짰어요?”

“무슨 개…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나 연예인 아니야.”

“웃기지 마세요! 아까 사람들한테 사인하는 거 다 봤거든요.”

“해 달래서 했어. 날 배우로 착각하더라고. 워낙 잘생겼어야지.”

“그럼 당신 정체는 대체 뭡니까? 그냥 스태프예요?”

“스태프도 아니고. 그때 그 여우… 같은 동물… 생물들을 더불어 살게 도와주는… 그런 착한 직업이라고나 할까.”

본래라면 대충 거짓말로 넘어갔을 도진이지만, 덕을 모으느라 애써 진실만을 얘기했다.

“그 여우는 잘 있어요? 다친 곳은요?”

“뭐… 다 나았지. 잘 있겠지….”

“잘 있겠지?”

수상쩍다는 눈빛이 더욱 강해졌다. 치호는 팔짱을 낀 채 추궁했다.

“그래서. 동물 보호가가 여긴 왜 왔죠?”

“어떤 희귀한 생물…을 만나러 왔는데. 아니, 근데 너는 뭔데 날 범죄자처럼 몰고 있어? 넌 여기 왜 왔냐?”

“촬영하러 왔지 뭐 하러 왔겠습니까.”

“아, 너도 이 드라마 출연했었구나.”

“꽤 비중 있는 조연이었는데….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저 인기 투표도 여주인공, 남주인공 바로 다음 랭크였거든요?”

“바빠서 드라마 볼 시간이 있어야지.”

이번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치호가 출연했다는 걸 방금 처음 알았다.

“다른 멤버들도 왔냐?”

“아뇨, 나만…. 그런데 그쪽, 몇 살입니까?”

문득 치호가 물었다. 도진은 순순히 대답했다.

“스무 살인데.”

“뭐야! 동갑이잖아! 왜 형인 척해!”

“내가 언제 형인 척했어? 자기가 멋대로 말 높여 놓고 사람 매도하네.”

“동갑이니까 말 놓으라고 말했어야지.”

“동갑이니까 말 놔.”

으아아악! 도진의 뻔뻔한 행태에 치호가 머리를 헝클며 발을 굴렀다. 멀리 있던 스태프들이 뭐야? 치호랑 누구야?, 몰라. 회사 직원인가 보지. 하며 지나갔다

끼우웅.

호기심을 띄우고 구경하다가 치호가 돌연 소리를 지르자 무서워진 끼웅이가 얼른 돌아가자고 옷깃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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