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34화 (134/203)

“나중에 자기가 빙의할 생각이겠죠. 이석진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면 이아진에게 옮겨 가려는 겁니다.”

어째서 지금은 집어삼키지 않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아진의 육신을 차지하려 들지 않을까. 영능력이 없는 이석진보다는 이아진 쪽이 훨씬 달콤한 과실일 것이다.

사역마인 배리모스는 다른 악신들과 달리 육신이 없다. 예를 들어 만인사는 거대한 뱀이라는 육신이 있으나 배리모스는 그저 혼 상태로만 존재한다. 그나마 본체라고 해 봤자 얇은 괴항지 부적 한 장일 것. 분명 언젠가는 이아진의 몸에 들어갈 터였다.

이게 도진의 추측이었다.

“이아진은 영능력도 꽤 강해 보였어요. 제가 본 인간 무당 중에서 제일 농도 짙더군요.”

“만월 가문의 후손이니까. 작정하고 도술을 배우면 너도 금방 따라잡힐 거야.”

“네? 이아진이 만월 가문의 후손이었어요?”

도진이 깜짝 놀랐다.

“그래.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만나러 온 거였어. 사진으로는 몰랐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알겠더라고. 만월 가문의 핏줄은 고유의 기운이 아주 특이하거든.”

“그럼 한수는요? 한수는 만월 가문이 아닌 겁니까?”

“퇴마사 가문이 핏줄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어. 퇴마 실력이 출중하다면 핏줄과 상관없이 가문에 고용했거든.”

“용병 개념이군요.”

“응. 내 생각에 한수는 만월 가문에 영입된 외부 퇴마사 용병의 후손 같아. 이석진과 이아진은 만월 가문의 직계 후손이고. 그중에서도 이아진은 아주 강하게 재능을 물려받았어.”

퇴마사 가문은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 형제자매 중에서는 한쪽만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에게 가문을 물려줄지 고민할 필요도, 승계 전쟁을 치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잠깐만요, 스승님. 정리 좀 할게요. 그럼 한수는 만월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 배리모스는 만월 가문의 사역마, 모든 일의 배후에는 만월 가문이 있는데… 그렇다면….”

도진이 헉, 숨을 들이켰다.

“그럼 이아진이 모든 일의 주동자인 겁니까?”

“더 생각해 보렴.”

이리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니죠? 착한 동생이겠죠? 그러니까 스승님이 명함도 주시고, 이렇게 순순히 돌아오신 거겠죠. 저는 이아진은 안 믿어도 스승님은 믿어요. 그럼 대체 뭘까. 일이 더 복잡해지는 건지, 풀려 가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머리 굴리는 제자를 보며 이리가 흐뭇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끼우웅. 끼웅.

때마침 숟가락에 떨어뜨린 차를 핥아 마시던 끼웅이가 더 달라고 손짓 발짓을 했다.

도진이 차를 넘치기 직전까지 따라 줬다.

“야, 그러고 보니 이아진이 널 어떻게 알고 있냐?”

끼웅. 끼웅. 끼우웅.

“뭐? 만났었다고? 언제? 어디서?”

끼우우웅. 끼우우.

“…배리모스도 만났다고? 아니, 잠깐. 죽을 뻔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야. 제대로 말해!”

차를 마시던 이리도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태고의 선인조차 몰랐던 끼웅이의 가출 사건이 드디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24. 자격

따르르릉-

바쁜 오후, 대여점 전화가 울렸다. 두 번째 벨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정원에 있던 도진이 후다닥 달려왔다.

“네, 이리 만물 대여점입니다.”

-안녕하신가. 청이 하나 있어서 전화했소.

“말씀하세요.”

-나와 친구가 길을 걷다가 대추 열매를 주웠는데 이게 주먹만 한 제법 괜찮은 크기란 말이지. 내가 먼저 발견하고, 친구가 먼저 집어 들었는데 이걸 누가 갖을지 고민하다가 씨름 대결을 해서 정하기로 했소. 와서 심판을 봐주시오.

완벽하게 복지관 업무다. 하지만 도진은 분노하기는커녕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셨구나. 그럼 심판해 드려야지요. 장소랑 시간은요?”

-아직 정하지 못했소.

“…아직 아무것도 못 정하셨구나아. 그럼 대여점에서 어떠십니까? 대여점 정원이 넓으니 걱정마시고. 이왕이면 오늘 하시죠? 저녁 7시 30분에 친구분과 오시면 제가 잘 심판 봐 드리겠습니다.”

끼웅?

적극적으로 응대하는 도진을 보며 끼웅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업대 앞의 이리는 도진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있어서 귀엽다는 듯 웃었다.

도진은 이리 만물 대여점의 직원으로서 진현계에 자유롭게 출입 가능하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허가만 받으면 뭐 하겠는가. 입장료가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을.

그저께가 24절기 중 한로였고, 도진은 기도식 이후 알뜰살뜰 모은 덕을 나비 선인의 연회에 다녀오느라 모두 소진했다. 그리하여 지금 이런 복지관용 의뢰까지 전부 받고 있는 것이다. 빈곤이 도진을 아량 깊은 직원으로 만들었다.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도진이 빽빽한 스케줄 표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도진아. 너무 과로하는 거 아니야? 그냥 연회에 안 갔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스승님. 말로만 듣던 신선들의 연회에 갈 수 있어서 좋았어요. 도화주도 아주 달콤하고 얼큰한 게 맛있었구요. 스승님과 한나절이나 꼭 붙어 있던 것도 좋았고. 덕을 다 쓰긴 했지만, 후회는 안 해요.”

이리가 도진을 데리고 연회에 오자 나비는 긍정적인 의미로 기절초풍했다. 양 입꼬리가 귀에 매달려서 내려오지를 않았고 코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아졌다.

‘이리 선인은 저번 달에도 나비 선인의 연회에 오셨는데. 정말 두 분이 절친한 친구 사이이긴 했나 봐요.’

‘게다가 이번엔 제자까지 데리고 오시다니. 나비 선인과 이렇게 두터운 우정을 간직한 사이인 줄 몰랐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요. 정말 다시 봤어요. 저런 인맥을 가진 나비 선인과 친우라는 게 영광스럽네요.’

선인들의 수군거림에 허세가 잔뜩 든 나비는 오백 년 묵은 도화주를 꺼냈다. 취한 듯 취한 게 아닌 취한 것 같은 느낌을 일으키는 신묘한 술로, ‘술 취해서는 안 된다’라는 임금님의 규율을 지켜야 하는 진현계 선인들에게 아주 인기 많은 술이었다.

덕이 많다고 누구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닌 도화주의 등장에 연회 분위기는 더더욱 뜨거워졌고….

“저는 솔직히 고상하신 선인들의 연회라 새롭기는 해도 재미는 없을 줄 알았거든요. 가만히 앉아서 시구 읊으며 경치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저는 좀 활동적인 걸 좋아하니까. 그런데 선인들도 그렇게 막 조용하고 얌전하지만은 않더라고요.”

“으음….”

도진은 조용한 선인들 사이에서 솔직하며 시원스러운 성격으로 나비와 함께 분위기를 주도했다. 엄청난 친화력으로 벌써 말을 놓기로 한 선인들도 생겼다. 대부분은 도진을 통해 이리 선인과 친해지려는 속셈이겠지만.

‘나비 선인님께서 이런 좋은 술을 내주셨으니 좋은 게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게임? 놀이 말인가?’

‘예! 인간계에서 유행하는 술자리 게임들을 알려 드리지요.’

사실 도진도 인간들이랑 어우러져서 술 게임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대여점에 취직했으니까. 다만 TV, 인터넷, 친구들 대화를 통해 온갖 종류의 술 게임을 배워 두었다. 언젠가 쓸모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고, 수집한 지식은 연회에서 여한 없이 풀었다.

선인들은 처음엔 술 게임에 어색해했지만, 나중에는 도진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게임을 했다. 그들은 특히 369, 공공칠빵 같은 단순한 게임을 좋아했다.

“그 뭐냐. 칠정 선인? 그분은 성격이 화통하시던데요. 게임 하다가 갑자기 술잔을 땅바닥에 내던지셔서 놀랐잖아요.”

“으음….”

“오정 선인이랑 세라링 선인도 갑자기 서로 멱살을 잡아서 놀랐는데 진짜 싸운 건 아니었겠죠, 뭐. 선인들인데 고작 게임 따위에 진심으로 싸울 리가.”

“으음….”

늘 점잖게 놀던 선인들에게 도화주와 술 게임이란 조합의 자극이 심했는지 새벽쯤에는 여기저기서 다툼이 일어났다.

‘네 제자가 왕이 되면 진현계가 어떻게 변할지 벌써 걱정이다….’

난장판 속 나비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맴돌았다.

“스승님, 왜 자꾸 ‘으음’만 하세요? 혹시 스승님은 연회 재미없으셨어요? 하긴 스승님은 게임에는 참여 안 하시고 구경만 하셔서….”

“구경만 해도 재미있더라.”

“그렇죠? 그러니까 게임 스트리밍 같은 게 인기를 끄는 거겠죠. 우리도 선인들 술자리 게임 스트리밍하면 인기 엄청 많을걸요. 나비 선인님 가발 쓰고 개다리춤 출 때 진짜….”

끼웅, 끼웅!

진현계에 올라가지 못했던 어린 잡귀가 자기는 모르는 얘기는 그만하라고 발을 탕탕 굴렀다.

“다음에는 영상 찍어 와서 끼웅이한테 보여 줘야겠어요.”

“진현계에서 촬영한 영상은 외부 반출 불가야.”

“하… 까다로워. 제가 왕 되면 허가제로 바꿀 겁니다.”

“음…….”

왕 되면 뭐 하겠다, 라고 하면 늘 웃으며 ‘그래. 네 마음대로 해’ 하던 스승이 시큰둥한 반응이자 도진이 대번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턱에 호두를 만든 채로 이리의 옆에 철푸덕 앉아 어깨를 비비적거렸다.

“왜요. 제가 무엇을 하든 응원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물론 응원하지…. 진현계 사람들한테 너무 큰 문화충격을 주지만 말아 줘.”

“그럼요. 저는 합리적인 사람이거든요.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쓰다듬어 주세요. 방금 스승님 반응 때문에 놀랐단 말이에요.”

“그래. 미안.”

이리가 도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가슴도 너무 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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