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35화 (135/203)

가을에 접어들었음에도 반팔 셔츠를 고수하고 있는 도진이 목 부분을 손가락으로 잡고 벌렸다.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심장이 얼마나 뛰는지 한번 만져 보실래요?”

“…….”

평소 같았으면 제발 단정하게 입으라며 시선을 돌렸을 이리가 이번엔 도진의 쇄골과 윗가슴을 흘끔거렸다. 이물을 쪼물딱 거리는 손가락도 뭔가 느려졌다.

살짝 붉어진 귓가와 발그레한 뺨을 보던 도진이 ‘설마?’ 하며 희망에 부풀었다. 그때 이리가 전면 창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도진아.”

“네에.”

“고객 왔다. 일어나자.”

냉정하고 다정한 대여점 주인으로 돌아온 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대문 초인종이 울렸다.

‘아우, 씨. 방금 만져 주실 것 같았는데!’

도진은 절호의 기회를 놓친 듯한 기분에 괜히 가만히 있던 끼웅이를 움켜쥐고 짤짤 흔들었다.

[이름: 이군이

종족: 신령

서식지: 지리산 인근

연락처: 핸드폰 없음. 곧 만들 예정

내용: 두려움을 없애는 이물을 빌려주세요.]

신령, 상당히 높은 갈래의 고객이 찾아왔다. 20대 중반 남성 외양에 옷차림도 현대 한국 20대 청년의 차림새였다. 실제로도 신령이 된 지 이제 300년이 되었다고 하니 아주 어린(?) 신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진은 신령에게 차를 따라 주면서 옆에 놓인 커다란 캐리어를 힐끗했다. 사람도 들어갈 법한 커다란 캐리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뾰롱뾰롱.

누구나 소리를 들으면 정체가 무엇인지 가장 먼저 물어볼 특이한 소리였는데, 이리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지 의뢰서를 살폈다.

“두려움을 없애는 이물은 없어. 감정을 건드리는 건 금지되어 있거든. 무슨 일이길래 그래?”

“선인님, 사실 저는… 산신령 자격시험 중이옵니다.”

“산신령이라. 지리산?”

이군이가 퍼뜩 놀랐다.

“어찌 아셨습니까?”

“지리산 인근에 산다며…. 지리산 산신령이 진현계에 올라가기로 했구나.”

“예…. 후임이 구해지면 바로 올라간다고 하옵니다. 저는 지리산에서 태어나 지리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늘 지리산의 산신령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시험에 응시했사옵니다.”

“와. 산신령도 자격시험을 보는군요. 몰랐어요. 그럼 음악가 같은 분도 자격시험을 통과해서 산신령이 되신 거예요?”

도진이 묻자 이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했다.

“음악가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산신령이 되었어. 보통은 음악가처럼 후임이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편인데, 지리산 같은 인기 있는 큰 산은 자격시험을 보고는 해. 지금 지리산 산신령도 천 년 전, 자격시험에 합격해서 산신령이 됐지.”

“그랬군요. 꼭 대기업 입사 같네요.”

끼웅….

자기 찻잔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던 끼웅이가 도진을 올려다봤다. 도진은 찻주전자를 들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 보였다.

“그럼 시험 치를 때 너무 떨지 않기 위해서 두려움을 없애는 이물을 찾으셨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시험 과정 때문이기도 하옵니다.”

“시험 과정이요? 막 지리산의 역사랑 암석 구성이랑… 해발고도가 몇 m인지 어떤 자생수가 자라는지, 서식 중인 반달곰이 몇 마리인지 그런 문제 나오는 게 아닌가요?”

“그건 필기시험이옵니다. 저는 필기는 이미 합격했고 실기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와! 실기라니. 실기면 몇 분 만에 등정 완료하는지라든가 산불 제압에 걸리는 시간, 원혼과 악신 대항용 결계 강도, 이런 겁니까?”

차분히 기다리면 이군이가 다 설명해 줄 텐데 도진은 처음 듣는 문화가 어지간히 신기한지 질문을 쏟아 냈다.

“당연히 도진 님께서 말씀하신 부분도 다 실기시험에 포함되어 있사옵니다. 저는 그 항목들은 다 통과할 자신이 있고요. 하지만… 지리산 신령님께서는 이번에 실기시험과 더불어 과제도 하나 내주셨사옵니다.”

“무슨 과제요?”

“특별한 재료로 만든 망건 관자를 일주일 만에 만들어 선물하라는 것이옵니다.”

“망건 관자…. 상투 머리에 쓰는 망건 말입니까?”

“네…. 진현계에 올라갈 때 착용하실 거라고 하셨사옵니다.”

옛날 사람들은 상투를 튼 후 이마에 망건을 착용했는데, 그때 망건의 줄을 뀄던 단추와 비슷한 장식을 관자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 관자로 신분 계급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머리 장식의 일종이었다.

“특별한 재료라면 어떤 거요? 금이나 옥이라면 대여점에 많은데.”

이군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늪이무기의 지느러미, 아지시시의 꼬리털, 케르베로스의 뿔로 만든 관자를 원하십니다….”

“…….”

“…….”

“그 정도면 지리산 신령이 산신령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은 거 아닌지….”

이리조차도 공감하는지 그러게, 했다.

위아라면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유명한 대요괴들이 있다. 다음 갈래인 악신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대요괴 갈래에 머무르고 있는 존재들.

늪이무기, 아지시시, 케르베로스.

셋 모두 그러한 존재들로, 늪이무기와 아지시시는 그나마 한국에 살고 있지만 강림도령의 권속인 케르베로스를 만나려면 저승에 가야 한다. 머리 세 개 달린 짐승 형태의 포악한 대요괴는 강림도령 이외의 존재는 시왕까지도 죄다 물어뜯는 녀석으로 유명했다. 물론 늪이무기와 아지시시의 포악함도 악명이 자자하고.

“경쟁자는 몇 명이었어?”

“산도깨비 한 명이었사옵니다. 산도깨비가 후보에 오른다는 얘기에 다른 신령들이 일찍이 포기했기 때문에….”

“산도깨비라면 확실히 어려운 상대였겠구나. 그런데도 너는 포기하지 않았네.”

이군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산도깨비가 산을 지배하게 되면 잔챙이 위아들과 인간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없으니까요. 지리산에는 정말 많은 잔챙이가 살고 있사옵니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텃새들도 많고, 인간 관광객들도 수없이 드나들고요. 저는 종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지리산이 좋사옵니다. 산도깨비에게는 빼앗기고 싶지 않았사옵니다.”

만난 이후로 계속 유약하게 굴었던 신령이 가장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군이는 입이 바싹 마르는지 차를 벌컥 들이켰다.

끼우웅!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끼웅이가 깡총깡총 뛰며 도진의 손에 매달렸다. 도진이 아, 맞다 하고서는 끼웅이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군이의 빈 찻잔도 다시 채우며 물었다.

“그런데 산도깨비는 자기 힘으로 관자를 만들고, 그쪽은 우리 대여점의 도움을 받으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산도깨비가 과제를 듣고 포기했거든요.”

“뭐요? 그럼 지금 후보가 이군이 님 한 명이라는 소립니까?”

“예. 저뿐이옵니다…. 그런데도 지리산 신령님께서 과제를 거두지 않으셔서….”

“성격 한번 괴팍하네.”

도진이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면 진짜로 산신령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거 아니에요?”

“아닐 거야. 지리산 신령은 예전부터 진현계에 올라가고 싶어 했는데 후계자를 찾지 못해서 계속 미뤘거든.”

“그럼 이런 열정적인 후계자를 만나면 바로 물려줘야죠. 이러다가 이군이 님도 포기해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실까요.”

“산신령 자리는 열정만 보고 물려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원래부터 지리산 산신령들은 후계자를 정할 때 어려운 시험을 내주고는 했어.”

이리가 ‘어려운 시험’의 예시를 덧붙였다.

하룻밤 사이 논 100마지기를 다 갈라고 한다거나 잡곡 한 섬을 쏟아 놓고 구분해서 주워 담으라고 한다거나.

도진으로서는 하다가 열 받아서 냅다 걷어차고 나올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군이는 듣는 내내 결연한 표정이었다.

“권력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시는 것이옵니다. 저는 마땅히 이 자격시험을 치러야만 하옵니다.”

“맞는 말이지. 방법을 생각해 보자.”

‘권력을 가질 자격.’

도진은 어째서인지 이 표현이 뇌리에 박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산신령도 아니고 무려 진현계의 왕이 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 그 강대한 권력을 지닐 자격이 있는지 생각한 적 없었던 것이다.

‘스승님께서 내게 자질과 재능이 있다고 했어. 그 이리 선인이 나를 왕 후보로 지지하고 있단 말이야. 이걸로 자격 끝이야. 의심할 필요가 없지.’

도진이 스스로에게 되뇌는데 다시금 캐리어에서 뾰롱뾰롱 소리가 들렸다. 이리 선인은 생각에 잠겨 있고, 끼웅이는 차만 마시고 있고.

나만 궁금하단 말이야?

도저히 못 참겠던 도진이 물었다.

“캐리어에는 뭐가 있길래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겁니까?”

“아!”

이군이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지퍼를 열었다. 커다란 캐리어에서 꺼낸 것은 바로 분홍색 요술봉 장난감이었다.

“요술봉은 왜 가지고 다녀요? 변신 마법 신령이신지?”

“그, 대여점 직원 중에 어린 잡귀가 있다고 해서 사 왔는데, 암인일 줄은 몰랐사옵니다. 알았으면 미니어처 버전으로 사 왔을 텐데.”

이군이가 분홍 요술봉의 버튼을 누르자 뾰롱뾰롱에 이어 발랄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끼웅이가 고개를 들고 관심 갖는 듯하다가 곧 찻잔에 얼굴을 박았다. 이군이가 멋쩍게 볼을 긁고는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이리가 빙긋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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