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것이…….”
이군이가 늪이무기 때처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구미호는 지그시 눈을 감더니 곰방대를 깊게 빨았다가 내쉬었다.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일었다.
“신령이 드디어 올라가는구나….”
“지리산 신령님과 아는 사이이옵니까?”
“신령과 나, 늪이무기, 강림도령까지. 넷이서 한번 모험을 한 적이 있었다.”
“모험이요?”
도진이 흥미를 보였다.
구미호가 눈을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동공이 이번에는 늪이무기의 것처럼 세로 형태가 되었다.
“천 년 전, 강림 그것이 막 저승사자가 되었을 때였어. 당시 변성대왕이던가, 시왕 중 하나가 아끼는 고양이가 강림의 관리 소홀로 가출해서 어떻게서든 고양이를 찾아내야 했다. 그때 강림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해 본의 아니게 저승 관광을 했었지. 하루 종일 찾아 헤맸는데, 집 근처 수풀에서 곤히 자고 있더군.”
“강림도령과는 본래 아는 사이였습니까?”
“강림이 인간이었을 적 우리 셋이서 그 아이를 돌봤다. 부모가 없는 아이였기에…. 보통 아기는 볼살이 통통한데 그 녀석은 아무리 먹여도 볼에 살이 안 쪘어. 무려 지리산 산신령과 대요괴 둘이 아기가 살이 안 찐다고 쩔쩔매며 이리 선인께 달려갔었단다.”
“스승님께….”
“강림 그것이 냉한 얼굴로 잘 웃지도, 울지도 않던 놈이 이리 선인을 보자마자 대뜸 울음을 터뜨리더구나. 혹시 우리가 오해받을까 어찌나 걱정했던지…. 우리는 대요괴이니 말이야…. 하지만 다행히 선인은 우리를 오해하지 않았다. 아이를 잘 돌본다고 칭찬해 주었어. 오래전의 일인데 어제 일처럼 선명하구나…….”
과거의 추억에 빠진 듯 말끝이 길어졌다.
도진은 그 얘기를 들으며 이리를 떠올렸다.
혹여라도 아기를 괴롭혔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걱정하는 대요괴 둘을 보고 스승님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 귀엽다는 듯 미소 지으셨겠지.’
실제로 그 순간에 옆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리의 과거를 질투하거나 아쉬워했다가는 도진은 정신이 붕괴되고 말 터였다. 왜냐하면 이리 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과거가 긴 선인이니까. 하나하나 질투했다가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아, 씨. 끼웅이 데리고 올걸.’
구미호 역시 잡귀가 주식이라서 데리고 오지 않은 끼웅이가 후회스러울 만큼 생각났다. 이렇게 질투심이 끓어오를 때 끼웅이를 납작하게 누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데.
“그래서 늪이무기의 비늘은 잘 얻었느냐?”
“예. 세 개의 수수께끼를 내주셨고, 통과하여 비늘을 얻었사옵니다.”
“수수께끼라…….”
도진은 설마 구미호도 수수께끼를 낼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구미호는 상당히 쉬운 과제를 냈다.
“내 저택은 보는 바와 같이 아주 넓다. 그리고 다른 지역보다 계절이 빨리 지나가서 지금은 나뭇잎이 모두 떨어졌지. 내 아이들이 고운 손으로 낙엽을 치우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구나. 너희가 아이들을 대신해 낙엽을 치우거라. 단,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해치워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사옵니다. 해내겠사옵니다. 감사하옵니다.”
“감사합니다, 아지시시 님.”
구미호가 이제 나가라는 듯 손짓하고 다시 곰방대를 물었다.
안내받은 방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 종이 사람 키만 한 커다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하나씩 건넸다.
“쓰레기봉투는요?”
“따로 봉투에는 넣지 않고 한편으로 쌓아두세요.”
“왜요? 봉투에 넣어서 버리지 않으면 바람 불 때 또 낙엽 날릴 텐데.”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말이 많아. 흥.”
종이 새침하게 떠났다. 도진은 저게 새침이야? 그냥 싸가지가 존나 없는 거 아냐? 싶었지만 덕을 위해 참았다.
둘은 구역을 나눴는데 도진의 구역이 이군이의 구역의 3배나 넓었다.
“도진 님, 정말 고맙사옵니다. 저 혼자서는 이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절대로 혼자 치우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뭘요. 그런데 저는 원래 이런 일이 익숙하다지만 이군이 님은 신령이잖아요. 사실 신령은 허드렛일할 갈래는 아닌데…. 화 안 나요?”
늪이무기와 구미호가 나이가 많고, 힘이 강해서 그렇지 갈래로 치면 엄연히 신령인 이군이가 윗갈래였다. 그런데 전혀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듯한 이군이에게 묻자 신령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산신령이 되고자 하옵니다. 그것도 지리산 산신령이옵니다. 산에는 정말 많은 생물이 찾아오고 그중에는 저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그렇지만 저보다 낮은 갈래인 존재들도 많사옵니다. 저는 제 갈래가 높다 하여 그들을 지위로 누르는 산신령은 되고 싶지 않사옵니다.”
이군이는 어떤 산신령은 그런 방법을 택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라고 덧붙였다.
“저는 이번 지리산 신령님의 과제로 자신보다 엄연히 낮으나, 엄연히 높은 존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고 있사옵니다. 아마 과제를 내주신 목적도 이것일 듯싶습니다. 지리산 신령님은 정말 생각이 깊으신 분이옵니다.”
‘나보다 엄연히 낮으나, 엄연히 높은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건 진현계의 왕이 되고자 하는 도진도 알아야 하는 문제였다.
지금도 이미 엄연히 높고, 엄연히 높은 존재에게도 막 대하는 도진으로서는 특히.
‘스승님은 이것 때문에… 옆에서 나도 보고 배우라고 돕게 하신 거구나!’
벼락같은 깨달음에 도진은 감탄하면서도 이리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알겠습니다. 얼른 해치우고 저승 가자고요.”
“예!”
둘은 흩어져 자기 구역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빗자루질을 하고 있던 종들은 어느새 다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도진은 뛰어난 청력으로 종들이 안채에 모여서 나누는 수다를 들었다.
‘핸드크림 있어? 나 핸드크림 좀.’
‘나 있어. 여기.’
‘이거 말고 시어버터 향 없어?’
‘어떡해. 손톱이 까졌어. 시시 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나도야. 어떡하지? 같이 네일 받으러 갈래?’
‘응, 가자.’
‘나도 갈래. 겸사겸사 핸드크림도 사 오고.’
치장에 애쓰는 종들에 도진은 조금 동질감을 느꼈다. 이리 앞에서 상의 탈의하고 돌아다니기 위해 씻으면서 얼마나 근육 운동을 하는지…. 인터넷에서 ‘순간적으로 근육 펌핑하는 운동’ 검색해서 나오는 영상은 죄다 시청했다. 아마 그 순수하고 가혹한 스승님은 알지 못할 것이다.
수백 년은 족히 먹었을 거목들이 많아서 치워야 할 낙엽의 양도 생각보다는 많았지만, 얼른 다 끝내고 스승님에게 가슴 근육을 뽐낼 생각으로 열심히 쓸어모았다.
구석마다 낙엽이 소복하게 쌓였다.
‘진짜 이 낙엽들을 다 어쩔 생각이지?’
태울 생각이든, 모아서 버릴 생각이든 다 한군데에 모으는 게 낫지 않나?
대여점의 상수리나무 같은 경우는 낙엽이 떨어지면 근처 잔챙이들에게 나눠 준다. …라기보다는 그냥 잔챙이들이 알아서 나눠 갖는다. 이리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근처에서 오래 산 녀석들이 텃세 부리면서 너는 이만큼, 나는 이만큼 나누다가 다툼이 난 적도 있다.
‘아, 스승님 보고 싶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보고 왔는데 왜 이렇게 오래 못 본 느낌인지 모르겠다. 구미호의 과제가 내일 아침에 끝날 테고, 그러면 또 곧장 저승에 가야 하니까 내일이 되면 정말로 오래 못 보게 되어 버린다.
도진은 체력은 말짱하나 심적으로 기운이 빠져서 담벼락에 기대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에 들어갔다. 그의 사진첩에는 대여점 업무 관련 폴더 하나 말고는 죄다 이리 사진밖에 없었다.
스승님은 뽀뽀해 달라거나 안아 달라는 청은 거절하는 대신 사진 찍겠다는 청은 잘 받아 주었다.
화면 속의 웃고 있는 이리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는 그때였다.
부스럭, 부스럭.
앉은 채로 고개만 돌리자 한복을 차려입은 종 하나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보이는데, 저쪽에서는 도진이 안 보이는지 사람이 없다고 확신한 종이 어깨를 움츠리고 이얍! 기합을 줬다.
퐁, 하고 붉은 여우 한 마리로 변한 종이 낙엽 더미에 뛰어들었다. 도진은 순간 여우 요괴인가 했는데, 그냥 여우 뿌리의 요괴였다. 낙엽 속에서 꼬리잡기 놀이를 하거나, 사냥하는 것처럼 도약했다가 착지하거나, 배를 까뒤집고 낙엽 목욕을 하거나…. 정신없이 뒹굴던 여우는 한참 후에야 일어나 다시 새침한 사람으로 둔갑한 후 총총총 안채로 발걸음했다.
도진이 어이가 없어서 잠깐 더 앉아 있는 사이 한 명이 또 같은 짓을 반복했다.
낙엽을 치우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호오. 내 예상보다 깨끗이 치웠구나. 너희들 덕분에 내 아이들이 하루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약속대로 꼬리 털을 내어 주마.”
새벽 해가 뜬 후 도진과 이군이가 청소한 구역을 둘러본 구미호가 만족스러워하며 보라색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받아든 이군이가 열어보자 하얀 털이 한 줌 들어 있었다.
“감사하옵니다. 지리산 신령님께 전해 드릴 말이 있으십니까?”
“…….”
이무기와는 달리 구미호는 꽤 오래 고민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아침 하늘을 보는 눈은 마치 저물어 가는 석양을 보는 듯 쓸쓸했다.
“시시 님….”
“아지시시 님, 심기가 안 좋으신가요?”
“시시 니임….”
종들이 구미호에게 일제히 다가가 아양을 부렸다. 구미호는 어여쁜 종들의 뺨을 매만지거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괜찮다, 했다.
“인사는 되었다. 그 꼬리 털이 나의 인사인 게지. 이군이, 네가 지리산 신령의 인사인 것이고…. 이제 가거라. 강림에게도 소식을 전해 주어야지.”
“예…. 보중하시옵소서.”
“안녕히 계십시오, 아지시시 님.”
“아, 이리 선인에게는 말을 전할까 하는데. 여전히 고운 외모를 갖고 계신지.”
“직접 하시든가요. 바빠서 이만.”
도진이 쌩하니 마당을 가로질렀다. 이군이가 무례한 행동에 기겁하며 구미호의 눈치를 살폈으나 구미호는 다행히 웃으며 무례를 넘어갔다. 종들만 눈을 뾰족하게 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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