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41화 (141/203)

“김도진, 네가 이군이를 도왔느냐?”

“돕기는 했지만 대부분 신령님 스스로 구했습니다.”

“옆에서 볼 때 어땠느냐. 지리산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 것 같더냐?”

도진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예. 산신령이 될 자격이 충분하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어린 잡귀 주겠다고 요술봉 장난감을 사 왔다. 무시무시한 대요괴 앞에서도 침착하게 수수께끼를 풀었다. 종들이 하는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삼도천의 위태로운 나무다리를 두려워하면서도 용기 내서 발을 내디뎠다.

“이군이 신령님은 지리산에 사는 존재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산을 어떻게 보호할지 계획도 이미 세워 놨습니다. 열의 있게 잘 다스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가….”

산신령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권력이란 이런 사람이 가져야 하는 법이지.”

권력이란 이런 사람이 가져야 하는 법이지.

나직한 어조의 중얼거림이 도진에게 파고들었다.

도진은 산신령에게 인사를 하고 대여점으로 돌아가며 생각에 잠겼다.

자격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이군이와 홍연.

반면 나는 어떠한가?

‘도진아. 내가 볼 때 너는 진현계의 왕이 될 자질이 충분해. 왕이 되어 볼래?’

어렸을 적 이리의 제안에 도진은 왕이 되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물었고, 각종 규율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게 가볍게 왕의 길을 선택했다.

그냥 이리를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 스승님이랑 자유롭게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서.

이래도 되는 걸까?

진현계. 나아가 세상을 다스릴 구체적인 정책을 계획해야 하는 건가?

잠깐… 그러고 보니 왕이 되면 오히려 바빠서 스승님이랑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 거 아냐?

일호도 홍연한테 운동할 시간도 없을 거라고 했다.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했지?

도진은 순간 섬뜩해졌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왕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도진은 지금까지와는 아예 다른 방식의 정치를 진현계에 선보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왕 한 명이 전체를 통치하는 게 아니라, 현대 한국처럼 복지부 장관이나 국토부 장관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 기간도 오천 년이 아니라 오백 년 정도로 짧게 줄이고….

왕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사상 최초로 일 안 하는 왕이 되어서….

‘잠깐. 나 일할 생각이 아니라 일 안 할 생각만 하고 있잖아.’

도진은 스스로 놀라서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하나쯤은 홍연의 ‘지옥 무인 관리법’ 비슷한 정책을 고안해 놔야겠지.

진현계 주민들의 고충은 뭐가 있으려나. 역시 다른 지역에 자유롭게 오갈 수 없다는 점? 진현계의 결정적인 장점이면서도 결정적인 단점이다. 뭔가 다른 지역의 물품을 배송시킬 때 하루 만에 오게 하는 건 어떨까.

머리를 굴리며 대여점 문을 열었다.

끼웅! 끼웅! 끼우웅!

아주 그냥 살판나서 흙 놀이를 하는 끼웅이와 웃으며 어울려 주던 이리 선인을 맞닥뜨렸다.

이리 선인이 끼웅이에게 묻은 흙을 후후 털어 주다가 도진을 발견하고 생글 웃었다.

“도진아. 왔어? 일은 잘됐고?”

끼… 끼웅.

도진은 그 예쁜 미소를 본 순간 모든 상념이 휘발되었다.

“스승님… 어떻게 저 빼고 흙 놀이를 해요!”

“응?”

“김끼웅 이 자식, 역시 데려갔어야 했어. 스승님, 끼웅이랑 둘이서 보낸 시간만큼 저랑도 단둘이서 보내야 해요!”

“뭐?”

“왕 되면 규율 만들 거예요. 이리 선인은 김도진과 하루에 10시간은 단둘이서 보내야 한다!”

“잠깐만. 도진아, 그건 너무 과한데.”

“과하긴 뭐가 과해요. 24시간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하시고 빨리 고생한 제자한테 뽀뽀나 해 주세요! 오늘은 최소 포옹 아니면 안 넘어가요. 빨리요!”

진현계의 고충이고 뭐고.

짝사랑 중인 청년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인생이 벅찼다.

25. 할로윈데이

“도진아.”

“아, 네!”

생각에 빠져 있던 도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리가 미소 띤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이리의 어깨에는 끼웅이도 있었는데, 팔짱 낀 모습이 무척 토라진 듯 보였다.

“스승님, 부르셨어요?”

“끼웅이가 너를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다고 날 데리고 왔어.”

“아하.”

자기 부름은 다 무시하더니 이리의 부름에는 한번에 고개를 번쩍 드니 삐진 것이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아…. 그냥 뭔가… 왕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왕?”

“네. 권력을 가질 자격, 뭐 이런 거에 대해 생각 좀 했어요. 스승님, 지금의 임금님께 번아웃이 세게 오긴 했지만 처음엔 열의와 열정이 있었겠죠?”

이리는 오묘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의 옆에 앉았다. 도진은 오동 화로의 연기가 이리를 괴롭히지 않도록 얼른 뚜껑을 닫았다.

“굉장히 열의가 넘쳤지. 2대 왕이 오천 년간 만든 규율이 열두 개였는데, 3대 왕은 왕에 오르자마자 규율을 백이십 개 만들었어.”

“그게 다 선인들 규제하는 규율이었고요.”

“다는 아니고 대부분이.”

“임금님은 선인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복수를 위해… 아니, 근데 자기도 선인이잖아요.”

“본인이 선인이기에 선인의 능력에 제한을 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은 너무 위험한 힘이니까.”

모든 선인은 언령과도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눈을 마주치면서 무언가를 지시하면 장군신이나 일부 악신들처럼 도술 면역이 높지 않은 이상은 그 말에 따르게 된다. 이건 사람 같은 지적 생명체가 아니어도 통한다.

예를 들어 이리는, 도진과 요리이기의 씨름 대결 중 뿌리 뽑힌 거목에게 ‘우암산은 참 살기 좋은 곳이었지.’라고 속삭임으로써 거목이 스스로 움직여 다시 산에 뿌리를 내리게 한 바 있었다.

말 그대로, 말 한마디로 지진 해일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선인이었다.

이리가 유달리 강하긴 하지만, 다른 선인들도 이와 같은 능력을 지녔다.

왕은 이 경이로운 능력을 아주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선인은 도술적인 면에서도 상대할 존재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본인이 왕이 되어 제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인에 대한 제약만 쏟아 냈으나 선인들은 반발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들도 제한의 필요성을 느꼈다.

둘째, 가장 강한 자가 반발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전지전능한 태고의 선인이 왕 앞에 스스로 무릎 꿇으니 다른 선인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럼 스승님…. 저는 괜찮을까요?”

“뭐가?”

“저는 왕이 되면 선인의 능력에 제한을 조금 풀어 줄 생각이잖아요. 지금까지처럼 한 나라가 멸망할 수준이 아니면 절대로 개입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퇴마사가 부탁하지 않아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일방적으로 개입해서 진상 규명하고 악신 새끼 지옥에 보내 버려도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 거란 말이에요.”

“…….”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에 걱정이 어렸다. 고민이 생겨도 곧잘 훌훌 털어 버리던 제자가 이렇게 진지하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이리는 흐뭇해졌다.

“도진아. 답은 간단해.”

“…….”

“네가 왕이 된다면, 선인이 조금 더 자유로워져도 된다는 뜻이야. 반대로 만약 네가 왕이 되지 못한다면 아직 선인을 자유롭게 풀어 주기에는 위험하다는 뜻이겠지. 세상은 결국에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