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43화 (143/203)

“위아들도 할로윈 축제를 즐기는 줄은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이렇게 많이 인간 사회에 섞여 있는 줄은….”

이리가 미소 지었다. 더불어 살았던 천 년 전에 비하면야 ‘섞여 있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민망할 정도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위아들이 인간 사회의 문화에 적응하며 사는 것 같아서 기특했다.

둘은 아직 저녁 식사 전이었기에 식사할 곳을 찾았는데 다 주점뿐이었다. 오랜만에 맥주를 마시기로 하고 주점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직원 하나가 외치자 돌림 노래처럼 여기저기서 어서 오세요! 하며 인사했다. 어두컴컴한 조명에 시장통처럼 시끄럽고 공기도 찐득찐득한 곳이었지만, 굳이 나가지 않고 빈 테이블에 앉았다.

“스승님도 식사하세요.”

“그래. 오랜만에 같이 먹자.”

“맥주는 500cc만 시킬게요.”

도진이 벨을 누르자 직원이 날쌔게 왔다. 두 사람의 보기 드문 외모에 직원은 우선 감탄부터 하고 주문을 받았다. 도진은 안주 중에서 고기가 들어가는 것만 빼고 몇 개 시켰다.

끼웅, 끼웅!

끼웅이가 오징어 김치전 사진 위에 드러누웠다. 시켜 달라고 땡깡을 피우는 것이다. 그렇게 끼웅이 것까지 시키자 일곱 가지가 넘었다. 처음에는 외워 가려던 직원이 당황하며 메모지를 꺼내 다시 필기했다.

“어… 그, 일행이 나중이 오시나요?”

“아뇨. 저희 두 명입니다. 다 먹을 수 있으니 주세요.”

“아, 네에. 많이 드시네요. 두 분이서. 어?”

직원이 이리의 얼굴을 보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직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신분증 확인 좀 할게요.”

도진이 앞에서 웃음을 참는 동안 이리가 익숙하게 신분증을 꺼내 보여 줬다. 나이는 24세, 이름은 이리로 되어 있는 신분증으로, 인간 세상 특히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신분증이 없어선 안 되었기에 이해자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흐음. 나이 24살 맞아요? 더 어려 보이는데. 띠 말해 보세요. 무슨 띠예요?”

“성인 맞아요. 얼른 가서 주문 넣어 주세요. 우리가 시킨 메뉴가 많으니까요.”

“네. 메뉴판은 치워 드릴게요!”

직원이 총총 떠났다. 도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게 제가 24살이 아니라 20살로 하라고 했잖아요. 스무 살도 의심받을 판에 너무 욕심부렸어요.”

“도진아. 정작 스무 살인 네 신분증 검사를 안 했다는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역시 나는 성숙하고 어른스럽구나! 완전 멋진 어른 남자구나! 이렇게 생각하죠. 아, 스승님이 성숙하지 않다는 건 아니고요.”

이리는 숟가락에 제 얼굴을 비쳤다.

“외양을 더 성숙하게 바꿔야 하는 걸까.”

“그냥 민증 나이만 바꾸시라니까요. 스승님, 지금 그 모습이 진짜 모습이잖아요. 불로불사의 존재에게 진짜 모습을 유지하고 간직하는 건 아주 중요하다면서요.”

이리가 앞으로 불로불사가 될 도진에게 어렸을 때부터 누누이 했던 말이었다.

겉모습을 바꾸며 살다가 본래의 형태를 영원히 잃어버린 위아들도 많으니 웬만하면 모습을 바꾸지 말라고.

도진은 그런 말이 없었더라도 자신의 체형과 외모에 만족스러워서 이대로 유지할 생각이었다.

“하긴 그렇지. 그냥 나이만 바꿔야겠구나. 23살이나 22살로….”

“스승님, 스무 살은 절대 싫으신가 보다. 정말 귀엽네요. 그래요. 그럼 스물둘로 하세요.”

“자연스럽게 귀엽다는 말 넣지 마….”

“귀여운 걸 어떡해요. 그런데 스승님은 진짜로는 몇 살 때로 고정되어 있는 겁니까? 스승님도 소년 시절 있었죠? 왜, 그. 관조자 님 겉모습이 스승님의 어린 시절 맞죠?”

이리가 움찔했다.

“갑자기 관조자 얘기가 왜 나와?”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인데요.”

때마침 직원이 와서 테이블 위를 세팅했다. 도진이 세팅을 돕는 동안 대화가 잠시 끊겼다.

끼웅, 끼웅.

자기가 시킨 거 나왔다고 양팔을 벌리고 폴짝폴짝 뛰는 잡귀에게 이리가 김치전을 조금 뜯어 줬다. 직원은 새 모이만큼 조그맣게 김치전을 조각내는 이리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깊게 신경 쓰진 않았다. 궁금해하기에는 오늘 호프집이 너무 바빴다.

육포와 땅콩, 먹태와 황태, 골뱅이 무침, 치즈계란말이, 해물 떡볶이, 오징어 김치전, 어묵탕에 훈제연어 샐러드까지. 주문한 음식이 다 나오자 테이블이 가득 찼다.

“아, 맛있겠다. 저 배고팠어요. 스승님, 맛있게 드세요.”

“그래. 너도 많이 먹어. 천천히 먹고 배고프면 더 시켜.”

“네!”

이리는 음식이 나와서 화제가 넘어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스승님.”

계란말이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몇 입 만에 삼킨 도진이 말했다.

“관조자 님의 겉모습, 스승님 맞죠?”

도진은 주제를 순순히 바꿔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게 왜 궁금할까.”

“당연히 궁금하죠. 스승님 친구분이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라고 해서 그 모습을 유지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만약 그 모습이 스승님이 맞다면 스승님 친구분은 제 연적이니까….”

“오래전에 죽었는데 무슨 연적이야. 그리고 걔랑 나는 정말 가족 같은 친구였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냈거든.”

“어쨌든 관조자 님의 겉모습이 스승님의 어린 시절인 건 맞는 거네요.”

거짓말을 못 하는 이리 선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괜히 껄끄러웠다.

“맞아. 내 어릴 적 모습이지.”

“스승님의 친구분은….”

“자운.”

“자운 선인님은 스승님을 좋아하셨어요?”

“너와 같은 의미로 좋아한 게 아니란다…. 좋아한다고 하면 꼭 연정만 있는 건 아니야.”

“네, 가족이고 친구라 이거죠. 그런데 스승님, 만 년 전에는 소년 모습을 자주 하셨나 봐요. 왜 그러셨어요? 아니, 따지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요.”

이리가 이번엔 육포를 뜯어서 끼웅이에게 주며 기억을 더듬었다. 너무 까마득해서일까. 뭔가 이유가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관조자가 아니었다면 이리는 저가 당시 소년 모습을 했다는 사실 자체도 잊었을 터였다.

“기억이 안 나세요?”

“응. 아마 친구들이 다들 어린 모습을 해서가 아니겠어? 친구들과 어울리는 형태를 갖췄을 거야.”

“신기해요. 스승님한테도 친구들이 있었다는 게.”

정말 무례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제자였다.

“지금도 있어…. 친구들.”

“스승님, 드시면서 어린 시절 얘기 좀 해 주세요.”

“딱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어서 말이야. 재미있기는 네 어린 시절이 재미있었지. 눈만 떼면 사고를 쳤잖아.”

“아, 제가 언제요.”

“매일 그랬어. 매일.”

이리가 웃음 지었다. 기억이 희미한 자신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도진의 어린 시절은 일분일초 모두 선명하게 떠올랐다.

갓난아기 때부터 세 살까지는 힘 조절을 비롯해 여러 도술을 걸어 놓아야 해서 이리가 데리고 살았다. 기저귀를 갈아 준 횟수도 도진의 부모님보다 이리가 더 많을 것이다.

아기장수는 울음소리도 우렁차서 이리가 잠시 떼어 놓고 일하고 있으면 대여점에 떠나가라 울어 댔다. 그러면 고객들이 더 안절부절못하며 얼른 아기에게 가 보라고 했다. 나중에는 상담실에도 아예 데리고 들어갔다.

도진은 동그란 눈동자와 오동통한 볼살이 매우 귀여운 아기였기 때문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고객이 없었다. 아기장수이니 조심하라고 일러 줘도 꼭 통통한 말랑 볼살을 찔러보다가 손가락이 부러지는 고객이 하루걸러 하루는 발생하고는 했다.

“네가 백액호의 눈썹 털을 한번에 다섯 가닥이나 뽑았을 때는 나도 조금 당황했단다. 강철이의 꼬리 비늘을 뽑아 버렸을 때도 그렇고. 강철이는 그 후로 대여점에 한 번도 안 왔어. 본래 몇 년에 한 번씩은 왔는데 말이야.”

“저는 아무에게나 볼살을 내주는 쉬운 아기가 아니었거든요.”

도진이 새침하게 말하며 어묵탕의 어묵 한 꼬치를 한입에 먹었다.

“안 뜨거워?”

“뜨거워요. 스승님은 조심하세요.”

이리는 이 상황에서 또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너 어렸을 때, 다섯 살인가. 고객이랑 상담 중일 때 네가 찻잔에 차를 따르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객도 따라서 벌컥 들이마시다가 입천장을 다 뎄었지.”

“네. 기억나요. 그때 그 고객 새끼가 무려 90분이 넘도록 상담실에서 안 나왔거든요. 나름대로 계책을 세운 거죠.”

“아… 계획이었어?”

“모르셨어요? 의외네요. 아기장수는 그토록 영특한 존재입니다. 칭찬해 주세요.”

칭찬받을 일인가… 싶은 와중에 끼웅이가 또 육포를 찢어 달라고 이리의 소매를 흔들었다. 도진이 끼웅이를 들어다 육포 접시에 올렸다.

“네가 뜯어 먹어. 평소에는 잘 뜯어 먹던 게 왜 애처럼 구냐.”

끼우웅…….

“끼웅이가 뜯기엔 좀 즐겨.”

“스승님, 끼웅이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세요. 저 질투 나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육포를 끼웅이가 먹을 만한 크기로 조각조각 뜯는 도진의 모습에 이리가 웃었다.

“예전에 너 일곱 살 때… 어떤 잔챙이 요물이 왔었는데.”

“네. 나무껍질 좀 얇게 뜯어 달라고 이따만한 판자를 가지고 왔었죠. 제가 툴툴대면서 다 뜯어 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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