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정말 귀여웠어.”
“스승님은 제 어린 시절을 다 알고 계시는데 저는 스승님의 어린 시절을 몰라요. 이건 불공평해요.”
도진이 툴툴거렸다. 일곱 살 때와 똑같았다.
“역시 스승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어야겠어요.”
“미안하지만 정말 얘기할 거리가 없어.”
“그럼 딱 꼬집어서 물어볼게요. 스승님이랑 자운 선인님은 언제부터 친구였어요? 태어나자마자 만나셨습니까? 누가 먼저 태어났어요?”
역시 자운이 궁금한 걸까.
이리는 난감함에 저절로 손목의 팔찌로 손이 갔다. 팔찌의 실을 더듬는 손끝을 도진이 매서운 눈초리로 응시했다.
“나는 태고의 선인들 중 가장 마지막에 태어났어. 내가 태어났을 때 친구들은 이미 수천 년을 살아온 상태였지만 금방 친구가 되었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스승님 존나 귀여웠겠다…. 친구분들 너무 부러워요. 다들 스승님 무지 귀여워했겠네요.”
“글쎄….”
“스승님 다 컸을 때 막 ‘내가 네 이유식을 타 먹였다’ 이러면서 놀림받진 않았어요?”
‘어린’ 시절이야 있었지만, 단지 나이가 어렸을 뿐 아장아장 걸어 다니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소년 모습으로 태어났던 것 같은데, 역시 확신할 수는 없었다.
“기억이 안 나. 사실 어린 시절 자체가 기억이 희미해.”
“기억이 희미하다고요?”
“너무 오래 전이라 그런가 봐. 그러니까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도진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게 싫어서가 아니었다. 기억이 희미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수천 년 산 위아들은 어렸을 적 일도 선명하게 기억하던데요.”
“나와 비교하려면 수만 년 산 위아들을 데리고 와야 하는 거 아닐까.”
“…그렇네요. 비교군이 없으니 뭐라 말을 못 하겠군요.”
도진이 제 접시에 담은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아작 냈다. 먹으며 얘기하자면서 정작 자신은 지금까지 딱 두 숟가락 먹었을 뿐이었다.
단단히 굳은 턱이나 잔뜩 주름진 미간. 누가 보면 무너지는 경제에 대한 심각한 토론이라도 하나 보다, 할 법한 분위기였다.
웬만해서는 진지해지지 않는 제자가 이렇게 심각하게 구는 경우는 이리와 관련된 경우 말고는 없었다. 이리는 그 이유도 짐작했다.
‘감정’은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기억 실타래에서 실을 뽑으면 그 기억과 관련된 감정도 사라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도진은 이리의 희미한 기억과 기복이 거의 없는 감정 상태가 뭔가 연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진이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지.’
이리도 어린 시절이 이토록 떠오르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떠오르지 않는 게 단순히 자신의 어린 시절인 건지.
아니면 ‘태고의 선인들’인지.
만약 후자라면 기억이 희미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떠올리지 않는 게 옳다.
‘이리. 이게 너한테 필요할 거야.’
굳은살 박힌 손바닥 위에 올려진 팔찌.
이리는 과거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유달리 선명하게 남은 기억을 더듬었다.
* * *
“이리. 이게 너한테 필요할 거야.”
할 얘기가 있다는 자운의 말에 따라가 보니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세 명 아니, 저를 포함해 네 명이었다. 전부 모이면 조용할 새가 없을 정도로 많던 태고의 선인들은 이제 단 넷밖에 남지 않았다.
이리는 상처투성이의 손바닥 위에서 팔찌를 집어 들었다.
“이물이네. 어디서 났어?”
“너 잘 때 바위틈에서 주웠어.”
“곧 죽는다고 이제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이란 걸 어떻게 알았어?”
“내 눈을 안 보잖아.”
“…….”
“이 팔찌, 너희가 만들었구나.”
자운과 섶되. 그리고 또 한 명이 짠 듯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잖아. 이리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가장 늦게 태어났는데 가장 강해. 이런 법이 어디 있어.”
“거짓말을 못 하게 하는 능력은 좀 양심이 없어.”
한마디씩 내뱉은 친구들이 넓적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빈 바위를 턱짓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이라 이리는 머릿속으로 오늘의 할 일을 정리했다.
진현계 임금이 왕위에서 내려가겠다는 뜻을 밝힌 후 왕이 되겠다는 의사를 표한 이들이 벌써 열 명이 넘었다. 이리는 금왕의 부탁으로 후보들의 자격을 조사해 주는 중이었다.
만물상점 개업 준비를 하면서 진현계를 오가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일이 아무리 바빠도 이제 곧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시간이 없지는 않았다.
이리가 바위 위에 앉자 자운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들이 앉은 바위는 푹신한 방석이 깔린 의자로 변했고, 가운데에는 과실주가 올려진 탁자가 생겨났다. 흙과 자갈투성이였던 바닥은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으로, 나무 그루터기와 잡초는 높다랗게 솟은 기둥이 되었고 햇빛을 가려줄 하얀 지붕도 만들어졌다.
대화하기 좋은 환경이 된 주위를 보면서 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래?”
“나 오늘 영면에 들 생각이야.”
“…….”
섶되의 말에 이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듣자 급격히 피곤해졌다.
이리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태고의 선인들 사이에 죽음이 전염병처럼 퍼진지 일 년이 되었다.
섶되는 올해 초록이 울긋불긋하게 물들 때쯤 영면에 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산이 울창하게 우거지지도 않은 봄인데.
이렇게 빨리 떠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원망이었으나, 이리는 호흡을 몇 차례 가다듬는 동안 그 원망을 멀리 치웠다.
섶되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태초부터 지구의 여정을 함께 해 온 이에게는 이 수개월도 기다리기 힘들었으리라.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다시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렸다. 눈을 뜨니 세 명의 친구들은 이리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리는 섶되를 바라봤다. 주홍빛의 머리칼을 보며 항상 어둠을 가르고 떠오르는 태양 같다고 느꼈는데, 이제보니 저물기 전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석양 같았다.
“그래. 네 결정이라면 존중해야겠지. 무덤은 정했어?”
“바로 이곳…. 여기서 너희와 이야기하다가 잠들려고.”
이리는 그 순간 이곳이 더는 아름답지 않게 느껴졌다. 달짝지근한 과실주 향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도, 따스한 햇볕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피부에 달라붙는 모든 것들이 끔찍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받은 사람은 이리뿐인지 다른 친구들은 무척 좋은 무덤을 선택했다며 한 마디씩 던졌다.
이리는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기에 입을 다문 채 미소 지었다.
“섶되는 오늘 떠나고. 나도 이제 곧 영면에 들 거고. 자운도 올해가 가기 전에 죽는다고 했어. 그럼 이리 너는 이제 정말로 혼자 남아. 우리는 네가 너무 걱정돼.”
이리는 친구가 따라 준 과실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정말 혼자가 된다면 너희의 걱정이 옳겠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세상엔 정말 많은 생명이 있다. 인간, 초목과 짐승, 위아. 이리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이리가 선인으로서 지닌 고유 능력은 세 가지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자는 거짓말하지 못하게 하는 능력.
물건의 기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능력.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기이한 물건들을 지배하는 능력.
사실 이리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물을 다루는 능력은 모든 태고의 선인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나누어’ 가졌다. 어떤 선인은 이물을 탐지하고, 어떤 선인은 이물의 능력을 파악하고, 어떤 선인은 이물의 사용법을 깨닫고. 이렇게 모두가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이물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에 태어난 이리는 이물과 관련된 능력을 모두 가진 것이다. 어째서 이리만 전지전능하게 태어난 것인지 그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태고의 선인들은 추측했다. 이물의 진짜 주인은 바로 이리라고. 만물이 이물을 탄생시키는 이유는 바로 이리를 위해서였다고.
이런 신묘한 능력의 영향일까? 모든 위아는 태어날 때부터 이리의 존재를 인식했다. 이리가 길을 걸으면 모르는 위아들이 다가와 친근한 사이처럼 말을 걸었다. 그러므로 이리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떠난 후에는 세상 만물이 자신의 친구가 되어 줄 터였다.
“이리…. 네가 그럴수록 우리는 더 미안해져. 너의 그런 신묘한 능력을 이용해서… 잠들지 못하게 희생시키는 것 같아서.”
섶되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는 태고의 선인이 필요하다. 어떤 강한 힘을 지닌 악한 자를 그보다 더욱 강력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자는 태고의 선인뿐이므로. 혼란을 조율할 강력한 힘을 지닌 자가 세상의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태고의 선인들은 죽고 싶다. 너무 오래 살았으니 이제 혼으로도 존재하고 싶지 않다.
모두가 죽고 싶지만, 누군가 한 명은 남아야만 한다.
영면을 포기하고 세상에 존재해 줄 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자는 이물에 대한 완전한 지배 능력을 지닌 이리 선인이 적절했다. 때마침 이리는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기꺼이 그 한 명이 되기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