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47화 (147/203)

“이리 선인….”

“안녕.”

털복숭이는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랐다. 털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가 부풀기를 반복했다. 누가 봐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 털복숭이에게 이리가 다정하게 물었다.

“왜 날 보고 도망쳤어?”

“그, 그게….”

“솔직히 말해. 내 눈을 보고.”

털복숭이는 이리의 명령에 마치 보이지 않는 두 손이 고정하고 있기라도 한 듯 이리의 눈을 응시했다. 이윽고 어린 도깨비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실토했다.

“사실 내가 사람 하나를 뒤쫓고 있던 참이라, 이리 선인을 보는 순간 지레 찔려서 도망쳤소.”

“어떤 사람?”

“내가 옛날에 알고 지냈던 사람이오. 친구였는데…. 해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소. 오히려 지키고 싶어서 따라다닌 것이오.”

도진은 ‘옛날’이란 표현에 좀 의아해졌다. 털복숭이는 태어난 지 이제 두세 달쯤 된 도깨비니까.

“지키고 싶다니?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어?”

“으음. 그건 아닌데. 친구로서의 보호 본능이랄까. 이리 선인께 그런 질문을 받으니 정말 왜 따라다녔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구려. 위험하지 않은데 왜 따라다녔을까. 그 친구는 날 잊었는데 왜…. 선인은 답을 아시오?”

오히려 털복숭이가 이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아무튼 그 사람을 해칠 의도는 없다는 거지.”

“절대 없소. 맹세하오.”

대화하는 내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뜻이다.

도진이 보기에는 결백한데, 이리는 의외로 고민했다. 도진이 털복숭이를 간판 위에 잘 올려 두고 이리에게 속삭였다.

“스승님, 제 생각엔 어떤 인간한테 빠진 것 같은데 그냥 보내 주죠.”

“그래도 될까.”

“제발요. 털복숭이가 지금은 사랑이란 감정을 깨닫지 못했는데, 좀 더 대화하다가 자기 감정을 깨닫고 우리한테 사랑을 이뤄 달라고 매달리면 어떡해요. 이런 식으로 위아랑 우연히 마주쳤다가 괜히 일만 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요.”

“으음.”

이리가 고민하는 그때 소매 속에서 끼웅이가 다시 끼훙! 하고 기침 했다.

“그래. 이제 돌아가자.”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안도한 도진이 털복숭이에게 훈계조로 말했다.

“털복숭이 님, 앞으로 우리 마주쳤을 때 도망치지 마세요. 아니, 저랑 마주쳤을 때는 도망쳐도 되거든요. 하지만 스승님 앞에서는 안 됩니다. 스승님 앞에서 도망치는 위아는 범죄를 저지른 위아나 원혼 계열 말고는 없단 말입니다. 아셨죠?”

“잘 알겠다.”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잘 가거라. 김도진. 이리 선인도 조심히 들어가시오.”

“응, 너도.”

“바이바이요.”

돌아선 도진이 다시 이리의 허리에 팔을 감으려는데 털복숭이가 통통통 뛰어와 둘의 앞에 섰다.

“그런데 둘은 여긴 무슨 일로 나왔소?”

도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럴 줄 알았다. 깔끔하게 헤어질 리가 없었다.

위아들이란 어떻게든 이리 선인과 말 한마디라도 더 섞어 볼 생각으로 가득 찬 존재들인데!

“보면 모릅니까? 데이트-.”

“우리도 할로윈 축제 보러 나왔어.”

“이리 선인이 이런 축제를 즐길 줄은 몰랐구려.”

“음. 나도 처음이긴 해.”

“제자가 졸라서 나왔소?”

“그렇지.”

“제자를 참으로 아끼는가 보오.”

“하나밖에 없는 제자니까.”

심문하는 사람이 뒤바뀌었다. 도진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물론 다 대답해 주고 있는 이리에게는 화나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털복숭이를 의심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까만 눈동자에 ‘귀여워’와 ‘사랑스러워’가 가득 매달려 있다. 이렇게 모든 생명을 좋아하니 그 긴 시간 동안 만물상점과 대여점을 하며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왜 하나밖에 없소? 제자를 더 둘 생각은 없소?”

입술을 삐죽이며 듣기만 하던 도진은 이 질문은 그냥 듣고만 있을 수는 없어 끼어들었다.

“그건 왜 물어봅니까?”

“아직은 없어.”

“아직은이라니. 아직은이라뇨! 스승님! 제대로 대답하세요. 영원히 없으시잖아요. 절대로 안 돼요. 제자는 저 하나예요. 꿈도 꾸지 마세요!”

“내가 두 번째 제자가 되고 싶구려.”

“으아아악! 스승님, 우리 집에 가요. 끼웅이 감기 걸려요. 털복숭이 님도 얼른 짝사랑하는 인간이나 쫓아가시죠? 늦은 밤인데 걱정 안 되십니까? 스승님, 어여 가요.”

도진이 이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가 저항 없이 그에게 이끌려 걸었다. 이리와 털복숭이가 눈인사라도 하려는데 도진이 그마저도 가로막았다.

“도진아, 좀 침착해.”

“스승님한테 제자 어쩌구 추근덕하는 녀석을 만났는데 어떻게 침착해요. 생각해 보세요. 누가 저한테 두 번째 스승이 되고 싶다고 하면 스승님은 침착할 수 있겠어요?”

“으음.”

“그렇죠? 이제 제 마음 아시겠죠?”

도진은 자신에 비하면 자그마한 스승을 떠밀다시피 하며 걸었다. 원망하는 듯도 하고 애교부리는 듯도 한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털복숭이는 골목 밖으로 나가 인파 속에 섞이는 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다정한 사제지간을 바라보던 도깨비는 이윽고 푸른 불로 변해 자취를 감췄다.

인간들이 웃고 떠들며 옆을 지나갔다.

할로윈데이에는 죽은 이가 돌아온다는데 정말일까?

에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26. 8일

푸르릉!

끼우웅!

푸힝, 푸히잉.

끼웅, 끼우웅.

이리 만물 대여점의 넓은 정원에서 용마와 끼웅이가 뛰어노는 소리가 요란했다.

바지를 걷고 수돗가에 앉아 은유리병, 배꽃 은장도, 은색 연필, 은척과 은박 등 은으로 된 모든 이물을 박박 닦고 있던 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 저는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사람이라면 응당 노동을 해야죠.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김끼웅 저 자식은 옆에서 애교 부리지는 못할망정 처놀기나 하고….”

이리가 작게 웃었다. 그 역시 수돗가 옆의 빨랫줄에 천으로 된 이물들을 널고 있었다.

“그래도 끼웅이 덕분에 용마랑 놀아 주는 시간은 벌었잖아. 끼웅이 나름대로 일하는 거야.”

이리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용마는 하루 종일 자동차 형태를 취해야 하는 점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사흘 이상 원래 모습으로 뛰어놀지 못하면 밤새 경적을 울려 놀아 달라고 졸라 댔다. 그 때문에 언제나 체력이 넘치는 도진이 놀아 주고는 했다.

끼웅이가 온 후로는 달라졌다. 용마는 밤만 되면 갓 태어난 것처럼 자그마한 망아지로 변해 끼웅이를 등에 태우고 뛰어놀았다. 체력이 약한 끼웅이는 30분 뛰놀면 지쳐 버렸지만, 용마는 그 30분도 만족스러운지 도진에게 추가 놀이 시간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도진도 이리와 둘만의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었다.

“나도 용마가 저렇게 끼웅이를 아낄 줄 몰랐어.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가 친구가 생겨서 좋은 모양이야.”

“나비 선인님의 용마랑은 안 친해요?”

“만나면 같이 잘 노는데, 그 만남이 백 년에 한두 번이라….”

“그렇겠네요. 제가 빨리 선인이 되는 수밖에. 저도 얼른 제 용마를 갖고 싶어요. 설마 저 녀석이 제 용마한테 텃세 부리진 않겠죠?”

“끼웅이한테 텃세를 안 부렸으니 네 용마한테도 안 부리겠지.”

“그래야 할 텐데. 제 용마는 절 닮아서 성격이 불같을 것 같거든요. 텃세 당하면 바로 날뛸지도. 뒷다리로 빵 차 버릴지도.”

“내 용마도 가만있지는 않을걸.”

“저 녀석도 성격이 있는 편이긴 하죠. 누구 하나 피 볼까 봐 걱정입니다.”

끼히잉, 때마침 까만 망아지가 날뛰다가 장독대를 깨뜨릴 뻔했다. 범인은 그냥 흠칫하고 말았는데, 끼웅이는 깜짝 놀라며 갈기에 숨어 버렸다. 여전히 간덩이가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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