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53화 (153/203)

“나도 너희와 같은 단짝 친구가 있었지. 지금은 모두 떠났지만…. 나도 겁 많은 시절이 있었고, 그런 나를 옆에서 이끌어 주는 녀석이 있었어.”

끼웅.

“그래. 서로를 여한 없이 아껴 주며 지내거라. 알겠느냐?”

삐이.

끼웅.

마원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두 잡귀를 토닥였다. 도진은 마음이 복잡해져서 이리를 바라봤다. 도진과 똑같이 두 잡귀를 보고 있던 이리가 눈동자를 들었다.

‘왜?’라는 물음에 도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라니. 내가 어떤 마음인지 다 알고 계시면서.

도진은 끼웅이에게 삐웅이가 나흘 후면 죽는다는 걸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삐웅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살아갈 끼웅이를 위해서.

그러나 이리는 생각이 달랐다. 이제 세상을 떠나는 삐웅이의 뜻대로 하기를 원했다.

‘스승님은 절대로 틀린 선택은 하지 않으셔. 곧 죽을 사람의 뜻에 따르는 게 맞는 거야.’

도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끼웅이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11월 7일, 삐웅이 탄생 5일째.

대여점은 아침부터 입동을 준비하는 위아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여점은 항상 바쁘지만, 24절기에는 특히 바쁘고, 그중에서도 11월부터 1월 절기들은 더더욱 정신 없이 바쁘다. 절기에 맞춰서 겨울잠을 드는 위아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내부 대기실이 가득 차서 넓은 정원에 접이식 간이 의자 수십 개를 펼쳐 뒀다. 놀이공원 줄 뺨치는 배배 꼬인 대기 줄이 만들어졌다.

“이보게, 도진이. 내가 기다린 지 벌써 세 시간이 넘었네. 대체 언제 이리 선인을 뵐 수 있단 말인가?”

“앞에 다섯 명만 지나면 되니까 좀 참으세요. 맨 앞에 계신 분은 지금 다섯 시간 기다렸다고요.”

“이보게, 김도진! 나는 예약까지 하고 왔는데 왜 줄을 서야 하는가?”

“여기 다 예약하고 오신 분들입니다. 제가 전화로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보게, 김도진 군. 나는 예약한 이물만 찾아가면 되는데 그냥 이물만 주면 안 되겠는가?”

“상담이 필수인 거 아시잖아요. 그러게 좀 먼저 상담부터 받아 놓지 그러셨습니까.”

“이보게, 김도진 장사. 내가 오후에 약속이 있는데 나 먼저 좀 들여보내 주게.”

“이보게, 김도진. 대추 열매 좀 줄 테니 나 좀 들여보내 주겠는가?”

“이보게, 도진이. 내 나이가 인간 나이로 치면 여든다섯인 노약자인데 좀 일찍 들여보내 주게나.”

사방에서 도진을 찾아 댔다. 입동이 본래 이렇게 더웠던가? 도진은 겉옷을 벗어 던졌다. 그래도 몸에서 열이 났다. 왜 이렇게 열이 나지? 뭔가 고성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이보게, 도진. 대체 언제까지-.”

“…….”

고객 하나가 뒤뚱뒤뚱 도진에게 다가오다가 도진과 시선이 마주치고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갔다. 다른 고객이 손을 들었다.

“이보게, 도-.”

“히익, 그만해. 지금 표정을 보라고.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야.”

“아이고, 세상에. 저런 흉악한 표정이라니. 악신이 따로 없구만.”

“쉿, 쉿. 다들 조용. 김도진은 덕 아끼는 스타일이 아니네. 진짜 맞을 수도 있으니 조용.”

도진을 부르는 소리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김도진의 성질머리가 얼마나 개 같은지 대여점의 고객 중에서는 모르는 이가 드물었다. 그렇게 다들 도진의 눈치를 보는데도 도진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놈의 고객들은 새벽 다섯 시부터 대여점 문을 두드렸다!

분명 입동날 여섯 시부터 운영한다고 공지했는데, 다섯 시부터 초인종을 눌러서 내 스승님을 깨워 놓고는 뻔뻔하게 차를 요구했다. 스승님은 그때부터 일곱 시간 동안 상담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신다. 그리고 앞으로 최소 일곱 시간은 더 나오지 못하실 것이다.

세상에 이딴 부조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만물은 다 이리 선인의 것인데, 자기 것을 빌려주느라 힘들게 일해야 한다니….

성질 같아서는 확 다 쫓아내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이 위아들은 겨울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 위아들이었다. 겨울잠을 자기 위해서는 식량 비축과 온도 조절되는 침낭이 필요하고, 그 식량과 침낭은 이물로만 만들 수 있다. 도진도 그걸 알아서 저번 주 내내 식량만 만들며 일주일을 보냈다.

누가 안 준다고 했나? 기다리면 예약 순서로 다 줄 텐데 왜 시간 맞춰 안 오고 일찍 와서 언제까지 기다리냐 지랄들이지? 확 다 쫓아내고 시간에 맞춰서 다시 오라고 해 버려?

그래.

그러자.

애초에 시간 맞춰 오라고 했는데 지들이 말을 안 들었잖아.

도진이 사나운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고객들이 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후우. 고객님들….”

도진이 입을 여는 그때 바짓단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삐웅.

“뭐야.”

바짓단을 타고 낑낑거리며 올라온 삐웅이가 허리춤에서 도진을 올려다봤다. 도진이 쯧, 혀를 차고 삐웅이에게 손가락을 내려 줬다. 냉큰 올라탄 삐웅이가 그림자 주머니에서 커다란 대추 열매를 꺼냈다.

삐이.

“뭐 어쩌라고. 잘라 줘? 나 바쁜데 너까지 이럴 거냐?”

삐웅삐웅.

“…나 먹으라고?”

삐웅!

“…….”

도진이 대추 열매를 받아 들었다. 삐웅이가 초롱초롱, 이목구비가 없지만 분명 초롱초롱하게 느껴지는 얼굴로 바라봤다. 도진이 대추 열매를 깨물었다. 아삭, 하고 깨물자 단맛이 퍼졌다. 본래 11월 대추가 이렇게 달았나.

삐웅. 삐우웅. 삐이. 삥.

우물우물 씹는 도진을 삐웅이가 토닥였다. 도진은 삐웅이 말은 아직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나름대로 위로라는 것만은 느껴졌다.

끼웅! 끼우웅!

삐웅.

삐웅이는 어디선가 저를 찾는 끼웅이의 간절한 외침에 미끄러지듯 몸을 타고 내려가 도도도 떠났다.

도진은 이 작은 행동에 딱히 큰 감동을 받거나, 화가 싹 가라앉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의를 봐서… 고객들을 내쫓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 괜히 쫓아냈다가 스승님한테 한 소리 들을지도 몰라. 그냥 내가 참자.’

그래도 인내심이 조금은 늘어난 도진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드디어 끝나가고 있다. 마지막 고객을 상담실에 들여보낸 도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 1시. 며칠간은 계속 이런 스케줄을 강행해야 했다.

저야 고객들 시중드는 게 심적으로 피곤해서 그렇지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스승님은 어떠실지가 걱정이었다.

대체 스승님은 작년까지는 어떻게 혼자 일했을까?

보부상이나 이해자를 불렀다고는 해도 어쨌든 상담실에서는 혼자였을 텐데.

정말 세상 만물에 대한 애정 없이는 대여점 운영은 못할 짓이었다.

엉망이 된 대기실을 청소하는데, 개수대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수도꼭지를 틀어 놨나 싶어 가 보니 쌓여 있는 찻잔들 사이로 까만 그림자, 하얀 그림자가 보였다.

“……!”

도진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끼우웅?

삐웅삐웅.

끼웅.

삐이웅.

두 잡귀가 몸에 비해 커다란 수세미를 들고 나름대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자기 미니어처 찻잔도 설거지하지 않던 끼웅이가…!

‘야, 물장구치고 놀았으면 탁자 좀 닦아!’

‘끼우웅…!’

그냥 탁자 닦으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당장 이리에게 달려가 상처받았다고 울던 게 바로 엊그제 일.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뒷정리를 돕고 있다!

‘뭐야. 끼웅이도 죽을 때가 된 거야?’

도진은 이리가 들으면 타박할 생각을 하면서 사진이나 남겨 두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카메라 화면을 통해서 하얀 잡귀와 눈이 마주쳤다.

‘…….’

어쩐지 삐웅이가 눈을 찡긋한 듯한 기분이다. 분명히 맨얼굴인데도, 마치 자기만 믿으라는 듯이. 도진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삐웅이는 끼웅이에게 이런 식으로 문지르라며 수세미를 쥐여 주고 있었다.

찰칵.

아무튼 이 신기한 광경을 사진으로 남겨 두는 걸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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