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59화 (159/203)

“…전 연인들이 다 그랬나 보죠?”

“아, 아니. 뭐 꼭 다 그랬다는 게 아니라.”

학문가가 딸꾹질을 했다. 한영수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입가엔 미소를 띠었는데 눈매는 딱딱했다.

“지금까지 혼인을 여러 번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 신령님들은 가감 없이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이도 참. 질투심이 많다니까.”

이해자가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좋아 죽는 모습이었다.

그 뒤로도 학문가와 약사는 생각 없이 이해자의 취향이나 전 연인들을 언급했고, 한영수는 질투로 불타오르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이해자는 히죽히죽 웃어 댔는데 도진은 그 모습이 사이코패스 같아 보였다.

상대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걸 즐기다니!

‘스승님은 내가 질투할까봐 태고의 선인들 얘기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워하시는데.’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제 얘기를 하고 나니 신령님들 이야기도 궁금해지는군요.”

“뭐가 말이냐? 우리가 이해자를 어떻게 만났는지?”

“예.”

“나는 뭐. 선인님을 통해서 소개받았지.”

“나도 선인님이 새로운 심복이라고 소개해 줘서 알았다.”

너무 당연해서 더 얘기할 것도 없다는 투였다. 한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질문을 조금 바꿔야겠군요. 신령님들은 이리 선인님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우리?”

“예. 물론 신령님들끼리는 다 알고 계시지만 저는 모르니….”

“아니. 우리도 서로 모르는데.”

학문가가 딱 잘라 말하자 이해자와 약사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한영수도 얼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도진 또한 해괴하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신령님들은 스승님이랑 그렇게 오래 함께 지내면서 서로 어떻게 만났는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처음 만났을 때 어디서 만났는지 안 물어봤어요?”

“물어볼 생각도 안 했는데.”

“별로 안 궁금한데.”

“알고 싶지 않은데.”

“신령님들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무정하시네요.”

도진의 매도에 이해자가 쏘아붙였다.

“네 스승님도 소개해 줄 때 그냥 ‘이름은 약사야. 친하게 지내.’ 이게 끝이었거든?”

“스승님은 그러실 수 있죠.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건지? 본인들이 알아서 물어보고 해야지, 왜 주선자가 다 떠먹여 주길 원합니까?”

“됐다. 말을 말자.”

이리가 작게 웃었다. 한영수가 선물로 들고 온 한과를 갉아먹던 끼웅이가 이리의 웃음소리에 쫑긋 반응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리가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자 다시 한과를 갉아먹었다.

“이 기회에 서로 알아간다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네. 다들 나와 어떻게 만났는지 까먹지는 않았지?”

그럴리가요! 세 신령이 동시에 합창했다. 이리가 빙긋 미소지었다.

“누가 먼저 할래?”

“순서대로 하죠.”

이해자와 학문가가 약사를 쳐다보자 한영수도 약사를 바라봤다.

“약사 신령님이 가장 첫 신령님이었습니까?”

“가장 먼저 선인님의 신령이 된 녀석은 관조자다. 내가 알기로는 만삼천 년 전이지.”

도진은 이미 얘기를 들었기도 하고 이제 이런 만년 단위의 시간 개념이 익숙해져서 놀라지 않았는데, 인간 한영수는 ‘만…. 만 삼천?’하며 되풀이했다.

“그 녀석이 이럴 줄 알고 오늘 지각을 하나 보군. 아무튼 그 녀석 다음 차례가 바로 난데. 우리 선인님께서 원하시니 얘기 안 할 수도 없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약사가 하나로 묶은 긴 갈색 머리를 재차 묶었다. 긴 얘기가 될 거라는 신호였다.

* * *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당시 금강산 산신령은 선인들이 좋아하는 향노루발풀을 재배해서 보부상을 통해 진현계와 거래하고 있었다. 향노루발풀은 청양고추 같은 자극적인 향신료로, 현대에는 하늘꽃밭에서만 자라지만 당시에는 지리산의 특산물이었다.

이름처럼 노루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만 돋아나는 특이한 풀이기 때문에 산신령은 지리산의 깎아 세운 듯 높은 봉우리와 깎아내린 듯 깊은 골짜기 사이에 노루 서식지를 만들었다.

노루들의 생은 마치 극락에서의 삶과도 같았다. 배고프면 풀을 뜯어 먹고, 배부르면 눕고, 심심하면 산신령과 일꾼들의 옷자락을 물어뜯으며 놀기도 하고.

산신령의 보호 아래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새끼 노루 한 마리가 태어났다.

새끼 노루는 태어나자마자 땅 위를 타박타박 걸어 다녔고 걸어 다닌 자리마다 향노루발풀이 자라났다. 태어나고 세 시간쯤 지났을 때는 맨손으로 풀을 뽑다가 생채기가 난 일꾼의 손가락을 핥아 상처를 낫게 했다. 일꾼 요괴는 혼비백산하여 산신령에게 달려갔고, 이에 놀란 부모 노루들도 그 뒤를 쫓았다.

“이보게. 무슨 소란이냐? 노루들이 혼란스러워 하질 않느냐.”

“죄송합니다, 신령님. 하지만 들어보세요….”

산신령은 모든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일꾼을 일터로 돌려보내고 노루 일가족의 앞에 섰다.

“허어. 어찌 이 아이에게 그런 기이한 능력이 생겼을꼬. 아이야, 네 부모가 선인들이 섭취하는 영험한 풀들을 먹고 자라 네게 영향을 줬나 보다.”

어린 노루가 삐약삐약 울며 산신령의 바짓자락에 긴 목을 비비적거렸다. 그 모습은 아주 평화로웠으나 새끼 노루의 부모는 큰 위험이라도 닥친 것처럼 울어 댔다. 산신령은 부모 노루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너희가 자식 새끼와의 이별을 예상하고 우는구나. 그래, 이 노루는 여기서는 살 수 없다. 이곳에 머무르다간 하계 족속이나 퇴마사의 먹잇감이 될 것이야. 선인님들께 부탁해 진현계에 머무르도록 해야겠다.”

월월월!

“이 녀석들아. 내 옷을 찢으러 드느냐. 네 새끼를 지키기 위한 조치거늘.”

월월!

“알겠다. 단, 사흘이다. 사흘 후에는 새끼를 위해서라도 이별해야 한다. 알겠느냐.”

산신령은 태어나자마자 그리고 낳자마자 생이별을 하게 된 노루 가족이 가여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일꾼에게는 함구령을 내리고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도 산신령은 새끼 노루를 내보내지 못했다. 이 짧은 시간에 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새끼 노루가 제 부모와 비슷한 크기가 될 때까지도 비밀은 잘 지켜졌다.

산신령도 어느 정도 안심하던 어느 날, 산 아랫자락의 퇴마사 가문이 단체로 들이닥쳤다.

“자네들이 여긴 어쩐 일인가?”

“무슨 일이긴. 향노루발풀을 구하고자 왔소. 마차 한가득 실어 주시오.”

퇴마사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풀밭을 훑었다. 신묘한 능력을 지닌 노루는 유난히도 번쩍번쩍한 황금빛의 털과 구슬 같은 까만 눈을 가졌기에 눈에 확 띄었다.

퇴마사 가문이 떠나고 산신령은 노루의 비밀을 아는 일꾼을 불러 야단쳤다.

“너는 요괴가 되어서 저 애를 팔아먹느냐? 요새 돈이 궁했느냐?”

“아이고, 오해십니다.”

“그럼 저들이 어찌 안 것이냐.”

“사실 저는 낮에는 궂은 노동을 하고 밤이면 노름질하는 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돈주머니를 두둑이 챙기고 노름을 하러 갔는데, 평소엔 요괴들이 어찌 놀든 거들떠보지도 않던 퇴마사 놈들이 제게 다가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놈들이 먼저 다가왔다?”

“예에. 퇴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금강산 산신령님의 향노루발풀 농장에서 일하는 요괴 일꾼 아니더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산신령님이 네게 도술을 걸었느냐?’

“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소. 무슨 도술 말이오?’

‘함구령이 꽤 오래 걸려 있구나.’

‘아, 신경 끄시오. 누가 함구령이 걸리든 말든.’

‘내가 여기서 너를 지켜본 지 10년이 넘었다. 대체 10년이나 지켜야 할 비밀이 무엇인가. 분명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게야. 무척 궁금하구나.’

“그러고서 오늘 동료들을 이끌고 온 것입니다.”

“그렇군. 조심한다는 게 도리어 화를 부르고 말았구나. 너를 믿고 함구령은 사용하지 않았어야 했다. 내 불찰이야. 내 불찰이야…….”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게 뻔했기에 산신령은 노루를 급히 천지천해로 도망 보내기로 했다.

“나는 이 산을 오래 떠나기 어려우니 믿을 만한 이를 고용하겠다. 길이 험해 인간들이 사는 곳을 통해 가야 하는데, 네가 노루 모습이라 우리에 가둬 놓고 다녀야겠구나.”

그에 노루는 앞발로 땅을 두 번 탁탁 밟고 두 번 깡총깡총 뛰었다. 그러자 열대여섯 살 소년의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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